2012.02.17 20:49

요정의 허물 1-4

조회 수 2994 추천 수 0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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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jpg  
  
 
 
 
 
  〃여기에 나의 일지를 시작한다. 항상 그래 왔듯이 나는 이 일지를 믿지 않는 이들에게 미리 선언해둔다.
 
  "진실은 시답잖은 이유로 거짓이 되곤 한다."
 
  그래서, 이 일지를 작성하는 내가 누구냐 하면 엘립 묠리스다. 더러는 이 이름을 들어본 사람도, 또 더러는 들어보지 못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보통, 일지를 작성할 때면 자기소개를 하는데 몇 페이지를 소모하겠지만, 미안하게도 나는 그렇게 친절한 기록자가 아니다. 나를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나에 대한 정보를 밝힐 이유가 없다. 그저 당신은 내가 엘립 묠리스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사내라는 것만 알고 있으면 된다.
  이쯤 되면 무엇을 훔칠 것인지 적어야 하는데, (읽는 당신이나 쓰는 나나 )아쉽게도 무엇을 훔쳐야 하는지 갈피가 잡히지 않는다. 그렇다고 허상을 쫓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분명히 실체를 가지고 있는 무언가가 아카데미 시리프 안에 하나 더 있다. 하나를 훔치자 하나가 남았다는 말이다.
  본 계획대로라면 빌어먹을 아카데미 따위와 안녕, 하고 헤어졌을 텐데, 인생, 계획대로 되는 일은 거의 없다. 지금 내가 여전히 아카데미 내부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인생은 거지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번의 은신처는 이미 흔적까지 지워버렸기에 새로운 은신처를 찾아야 했다는 것도 포함해서 말이다. 그래서 현 은신처는 다락방이다.
  자, 어디서부터 기록할까. 항상 투덜대며 일지에 기록해왔듯이 기억력 나쁜 녀석들은 일지를 쓸 생각부터 안 하는 게 좋을 거다. 진짜 개고생이다. 어떨 때는 태어났을 때 겪었던 일까지 적어야 하는 때가 있다. 일지라는 것이 (소설로 따지자면) 발단이 될 사건이 항상 최근에 일어난 일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의 경우가 그러한데, 당신에게 묻겠다. 진짜 나는 어디서부터 기록해야 할까?
  미안하다. 일지를 써가면서 느는 것이 글 실력이 아니라 생각나는 대로 흘려서 적는 기술뿐이라 이 모양이다. 이렇듯 혼잣말이 취미라 처음 내 일지를 접한 어느 누군가는 답답하고 지루하게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인능력이 부족한 내게 그것을 그만두라고 하는 것은 가혹하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생각해보니 대인능력 부족이라기보단 대인 접촉 기회가 부족하다고 하는 게 맞겠다. 도둑이 어디 얼굴을 떠벌떠벌하고 다니나. 기억을 훔치면 간단하다고 치부할 녀석은 깡그리 죽어버리라지. 죽기 전에는 꼭, 연인을 의심하여 기억을 훔쳐보니 별거 아니었는데 부작용으로 자신에 대한 기억까지 훔쳐버려서 연인과 모르는 사이가 되어 상처까지 입는 상황도 겪어보라지.
  옆길로 샜다. 다시 말하지만 어디서부터 기록할까. 중요한 일이니만큼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을 생각이다. 농담이 아니다. 묀테의 손은 변질을 일으킨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언제나 도를 지나치지 말자는 생각으로 기록하고 있다.
  결정했다. 레인과 처음 만났을 적의 이야기를 하겠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일 년 전인가? 작가들은 문학적 과장을 곁들여 그 해 유독 추운 겨울날이라고 표현하곤 하지만, 겨울이면 당연히 추운 건데 그렇게 표현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그러니 겨울 날씨에 맞는 추운 날이라고 표현하겠다. 그날 나는 럼을 퍼마시고 있었다. 무려 머물던 마을에서 가장 큰 나무 아래서다. 개잎갈나무였나? 술 마시는 사람한테 그런 게 중요한가. 정말로 그 나무가 컸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걸. 근데 밖에서 먹던 이유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야 부어 마시다가 쫓겨난 것이 당연하겠지만. 싸구려 주제에 독하기는 또 엄청나게 독해서 밖이 춥지 않은 건지 내 몸이 따뜻한 건지 구분도 못 할 지경이었다.
 
  "나도 한 병만 줘요."
 
  안색이 파리한 여인이었다. 어딘가 아픈 건가, 하고 생각했지만 생각했을 뿐이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술병 하나를 건넸다. 술이야 떨어지면 또 사면 되고 아무리 봐도 그 여인이 이 술을 마실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리에 들어갈 재료를 구하려 하는 거겠지. 하지만, 내 판단능력은 술로 인해 흐려져 있었나 보다. 술이야 사면 된다. 길거리에서 음객에게 술 한 병을 구할 필요는 없다.
  그녀는 내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죽는다."
 
  결코 협박이 아니었다. 나름의 경고였다. 몸이 안 좋아 보여, 자극적인 것을 마시면 몸이 버티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한 모금 마신 것을 토해냈다.
 
  "역시 입으로는 못 마시네요. 술친구라도 되어 드리고 싶었는데."
 
  그 이후의 일은 개략적으로 이렇다. 그녀가 내게 무언가를 물으면 내가 그에 대해 대답한다. 그때의 나는 정말로 술벗이라도 필요했던 건지, 아니면 이 귀찮은 여자에게 바라는 것이 있었는지 쓸데없는 것을 말해버렸다. 내가 무엇을 말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녀가 이런 대답을 한 것으로 봐서는 대강 추측할 수 있다.
 
  "그렇다면 훔치지 않으면 되겠네요."
 
  내 표정이 어땠을지 거울로 보고 싶었다.
 
  "정말 필요하지 않다면 기억을 훔치지 않으면 되겠지요. 누구나 실수한다는 말은 변명 같지만, 그런 변명이라도 해 봐요. 훨씬 나으니까. 그리고 그 실수를 반복하지 말고, 교훈으로 삼아요."
 
  그녀는 일어섰다. 술 마시는 것을 보지 못했는데 그녀가 들고 있던 술병은 비어있었다.
 
  "저도 많이 취했으니, 들어가 봐야겠네요. 전 술에 약해서 오늘 나눴던 대화는 십 분의 일도 기억 못 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이런 날씨에 밖에서 자면 죽어요."
 
  그러면서 그녀는 자신이 두르고 있던 얇은 외투를 내게 둘러주었다. 그게 다다. 우리는 어차피 잊힐 대화를 하고 헤어졌을 뿐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사실 그녀는 위로해 주기 위해 내게 접근한 게 아니라, 위로받고 싶어서 접근했었던 게 아니었을까. 술을 마시는 누군가가 으레 그러하듯이.
 
  이름도 모르는 그녀를 다시 만난 것은 최근, 아카데미 시리프에서였다. 달이 떠오르지 않은 밤, 나는 아카데미에서 빠져나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시야 확보가 어려운, 거짓말같이 어두운 밤이다. 과장이 아니라, 별빛도 보이지 않았다. 달이야 있다가도 없지만, 별이 구름에 가려지지도 않았는데 없는 경우는 드물지 않은가?
  그날 아카데미 내부에서 나는 두 명의 여자와 만났다. 한 명은 일 년 전 내게 술 한 병을 빌리고 외투를 건네준 파리한 여자, 한 명은 긴 흑발이 땅에 닿을 듯한 여자. 이 일지는 이 둘을 중심으로 적어갈 예정이다.〃
 
 
 
 
 
  〃만났던 당시의 일은 이 정도로 족하다. 파리한 여자 레인과도, 흑발의 여자와도 아무런 대화도 안 했으니까. 멀리서 지켜보았을뿐더러 그녀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들리지도 않았다. 그녀들이 헤어진 후, 나는 레인의 뒤를 쫓아 그녀가 은신하는 곳을 알아냈다. 놀랍게도 특수한 힘으로 외부에서 보이지 않게 만들어 놓은 방이었다. 레인을 따라 들어가니 수많은 책의 탑이 쌓여있었다. 그 책들은 사전에서부터 소설까지 그 종류가 가지각색이었고, 두께 또한 천차만별이었다.
  그 중심에는 레인이 있었다. 침대라고 생각되는, 책으로 만든 조형물 위에 누워있었다. 우리는 말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그 끝에 든, 그녀가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 레인은 계속 나를 보며 누구냐고, 왜 들어왔느냐고, 어떻게 이곳을 알았느냐고 물어보았다. 나는 엘립이라고, 네게 전해줄 게 있어서라고, 너를 쫓아서 이곳을 알았다고 대답했다.
 
  "엘립? 엘립 묠리스?"
 
  레인은 내 멱살을 잡더니 욕지거리를 섞어가며 나를 비난했다. 네가 뭔데 남의 소중한 것을 훔쳐가느냐고. 너만 아니었다면 나는 행복했을 텐데. 고픈 배를 쥘 필요도, 아픈 몸을 뉠 필요도 없었을 텐데. 불우한 어린 시절을, 그 시절을 이어받은 현재를 살아갈 필요도 없었을 텐데!
  예상치 못한 악의는 그대로 상처가 된다. 내가 그녀를 따라온 것은 그때에 받았던 외투를 돌려주기 위해서였으며, 그때 받았던 위로에 대한 감사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은연중 그녀가 나를 기억하고 있지는 않을까 기대했었을지도 모른다. 기대라는 것이 결코 플러스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기절한 그녀를 침대에 누이고 얇은 외투를 돌려주었다. 본래 용무는 그게 전부였으므로 돌아섰는데, 눈에 익은 책이 보였다. 레인과 그 책의 관계를 잠시 생각한 뒤, 나는 빈 책에서 종이 하나를 찢어 책 위에 붙여놓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약을 먹였다.
 
  아카데미 시리프에는 다섯 탑이 있다. 탑이라고 일컫기는 해도 학생들의 기숙사로 쓰이는 건물이다. 각 건물에는 이름이 붙어있는데 각각 염원, 인내, 기개, 성실, 무명이다. 그 중 인내 속에 레인이 거주하고 있는 다락방이 있었다. 무명 외의 각 건물은 구조는 같으니 어쩌면, 하고 생각했던 게 맞았나 보다. 염원에도 같은 위치에 다락방이 존재했다. 다만 다른 점은 수많은 장서 대신, 방 안이 금은보화로 그득 차 있다는 점이다.
  일단 급한 대로 이 다락방을 은신처로 삼았다. 오늘의 일지는 여기까지.〃
 
 
 
 
 
  〃당연하게도 다락방은 두 개 더 존재했다. 
  기개에는 각종 도구가 있었다. 농사를 짓는 데 필요한 도구부터 제의에 쓰이는 도구까지 정리되어 있었다.
  성실에는 종교 서적과 관련 도구, 보물이 있었다. 샐릭스 파가 주가 되고 간혹 샤르페 파 관련이 있었다.
 
  염원 - 보물
  인내 - 책
  기개 - 도구
  성실 - 종교
 
  개인적으로 저 네 곳을 돌아보면서 떠오르는 낱말이 있다.
  창고.
  아니, 금고일까.
  누군가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숨겨놓았다는 것도 그런 느낌이 들게 한다. 대체로 예상과 비슷하거나 맞을 것이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또 하나의 다락방이 존재하느냐의 여부다. 아카데미의 중심부에 세워진 무명은 다른 네 개의 탑과는 다른 구조지만, 그곳에도 다락방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 다락방이 다른 네 곳보다 훨씬 중요한 곳일 가능성도 높다.
  이제 그 다락방의 위치를 찾아내기만 하면 되는데, 그게 문제가 된다. 인내에 있던 다락방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레인의 뒤를 밟았기 때문이다. 만약 직접 찾아보려고 했다면 결코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같은 맥락으로 마지막 다락방이 존재한다 가정하고, 직접 찾을 때 운이 나쁘면 몇 달, 혹은 몇 년 이상이 걸릴 것이다.
  일단, 그녀에게 그 부근을 물어보러 가겠다.〃
 
 
 
 
 
  〃망했다. 어째서 나는 그런 말을 한 거지. 앞으로는 그 누구의 기억도 훔치지 않기로 했으면서.
  인내의 다락방에 갔다가 왔다. 아무런 기대도 없이, 그저 목적을 위해 질문하러 간 것이다. 그러나 목표 달성은 실패. 횡설수설 시간만 날리다 돌아왔다. 레인 외에 그 다락방의 존재를 알만한 사람이 있을까.
  불현듯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것은, 얼마 전 보았던 검은 머리의 여자다. 레인과 대화하고 있었던 여자 말이다. 어쩌면 레인과 협력관계에 있을지도 모른다. 밤이 늦었지만, 일단 찾아가 보겠다.〃
 
 
 
 
 
  〃"레인은 병도 병이지만 조울증이 있어요. 급격히 우울해질 때가 있고 갑자기 웃음을 못 참을 때도 있죠. 그 애가 우울할 때는 의식적으로 무시해주세요. 괜히 동정하면 짜증만 내니까요."
  요약하자면 내가 바보라는 소리다. 다락방에 관한 것을 물어본다고 나갔으면 다락방에 대해 물어볼 것이지, 왜 그런 걸 물어본 건지.
  그녀를 찾는 건 쉬웠다. 그 특이한 머리의 길이와 색 때문이다. 그녀와 레인은 친구사이라고 추측된다.
  별개로 기록할 게 있다면.
  기분 나쁜 여자아이였다.〃
 
 
 
 
 
 
 
 
 
 
/사족/
사랑합니다. 에포입니다.
이 회는 "이젠 어찌 돼도 좋아……." 라는 심정으로 썼습니다. 이 시점에서 메모가 급속도로 많아져서 매우 곤란했지요. 무한 필력의 작가 님들은 머릿속에서 모든 얼개가 잡히는 듯하지만, 저는 무리입니다.
  • ?
    행인 2012.02.17 22:00

    딱 좋네요. 이전 편까지 레인의 입장에서만 쓰인 글이라 내용 파악이 힘들었는데 엘립의 입장에서 쓰인 글을 읽으니 내용이 어느정도 파악이 되네요. 결국 엘립은 레인이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은 아니었군요... 이제 이전 편까지 나왔던 내용들과 엘립이 쓴 글의 내용들을 종합해서 어느 것이 사실인지 어느것이 거짓인지 파악해나가야할 것 같은 느낌이네요.


    그것보다 메이아가 왜 기분나쁜 애인지 궁금하네요. 레인의 입장에서만 봤을 땐 뭔가 착한 아이라는 느낌이었는데. 아무튼 잘보고 갑니다. 건필하세요.

  • ?
    epoh 2012.02.18 00:05

    미리 죄송하다는 말을 합니다.

    죄송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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