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2.17 17:24

요정의 허물 1-1

조회 수 3139 추천 수 0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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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정의 허물

CHAPTER 1 아카데미 시리프

EPISODE 1 일지

 

 

 

 

 

  "엘립 묠리스."

 

  나는 그 이름을 듣는 순간 경악했다.

  실존하는 현실인지 날조된 거짓인지조차 확실치 않은 도둑이며, 아무것도 훔치지 않는 도둑. 엘립을 모르는 혹자는 아무것도 훔치지 않는 도둑이란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야 어불성설이다. 훔친 물건은 이 세상에 처음부터 존재치 않은 것이기에.

  이해하지 못할 독자들을 위해서라도 나는 좀 더 설명해야 할 것이다. ㄱ이라는 물건이 있다고 치자. 엘립은 그 ㄱ이란 물건을 갖고 싶다. 갖고 싶기에 훔친다. 그러나 여기서 훔치는 것은 ㄱ이라는 물건이 아니다. ㄱ에 대한 기억을 가진 존재들의 기억을 훔치는 것이다(여기서 존재란, 사람뿐만이 아닌 기록물 같은 것들도 포함된다). 그 후 ㄱ은 사람들의 인식 외 존재가 되고, 엘립은 유유히 그 ㄱ을 훔친다. 결국 사람들은 ㄱ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잊지 않기 때문에 도둑맞은 지도 모르게 된다.

  이 엘립이라는 자가 공공연히 입소문을 타는 것은 그의 일지 덕분일 것이다. 보물이나 재화가 있는 곳을 파헤쳐보면 간혹 발견되는데, 그 일지에는 엘립이 어떤 물건을 훔치는 동기, 훔치기까지의 과정과 그 과정에서 훔친 기억들에 대해 적혀있다. 엘립이 훔친 물건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겐델스의 78번째 풍경화, 송장의 피를 먹은 보석으로 세공된 마리앤느의 팔찌, 가라앉은 도시 미펠레로 안내하는 마법의 지도 등이 있다. 물론 겐델스가 그린 풍경화는 공식적으로 77점뿐이다. 늙은 공주 마리앤느는 수많은 장신구를 착용했으면서도 유달리 팔찌를 하지 않았던 것으로 유명하며, 미펠레라는 도시는 존재 자체가 불가사의하다.

  일설에는 엘립 묠리스는 민간신앙에 나오는 기억을 먹는 잡귀, 묘른을 모티프로 해서 만들어진 허구의 인물이라고 한다. 일지의 필적이 제각각이라는 사실을 들어, 부유한 자들에게 불안감을 주기 위한 민중의 저항 수단이라는 말도 있다.

  엘립 묠리스를 신봉하는 무리는 다음과 같이 반론한다. 필적 위조쯤은 숨어다니는 신분이기에 당연하며, 일지 중 심하게 과장된 것들은 저항 수단으로 이용된 게 맞지만, 일부는 진짜라는 것이다. 즉 저항 수단이 된 것은 엘립이 어느 정도 민간에 알려진 뒤라는 것.

  기억을 훔치는 주제에 숨어다니는 것은 말이 안 되며, 그렇기에 엘립 묠리스는 가상의 인물이라는 것이 중론이지만, 내 앞에, 자신이 엘립이라고 주장하는 자가 있다.

  나는 화를 내는 대신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느냐고 물어보았다. 단지 우연히 묠리스의 성을 쓰는 엘립이라는 이름의 사내가 내게 볼일이 있어 찾아왔을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당신의 따님을 훔치고자 찾아뵈었습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도 전에 그가 말했다.

 

  "곧 거짓말이 되겠지만요."

 

  - 폭스 필렙, 『가장 아름다운 심장을 도둑맞다』 중에서

 

 

 

 

 

  〃거짓말쟁이.〃

 

 

 

 

 

  〃엘립이라고 하면 역시 일지겠지. 아마 이 기록을 보는 사람은 생뚱맞게 웬 엘립, 하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래, 아까부터 생각해봤는데 생뚱맞다고밖에 표현할 방도가 없다. 생뚱맞다고 하면 갑작스레 시작되는 이 일지도 생뚱맞다고 해도 될 것이다.

  일기(일지를 쓰려고 했지만, 나는 일기와 일지의 차이를 잘 모르겠다) 같은 글을 써 보는 건 어렸을 때 이후 처음이라 어떤 식으로 써야 할지 막막하다. 혼란스럽다고 해도 좋다. 그러므로 지금부터는 오늘 있었던 일을 차근차근 시간순으로 풀어보려고 한다.

 

  우선 맨 처음 나왔어야 할 자기소개부터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일기에 자기소개를 한다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이지만. 아, 그런가. 일기와 일지는 다른 누군가에게 공개할지에 따라 구분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이제부터 이 일지를 읽을 당신에게 나는 자기 자신을 소개할 의무가 있다.

  내 이름은 레인이다. 평범한 소녀, 라고 소개하고 싶지만, 슬프게도 나는 전혀 평범하지 않다. 나는 음식을 먹지 못하는 병에 걸렸다. 목구멍으로 넘길 수는 있지만, 소화를 못 해서 전부 토해낸다. 여기서 '전부'는 말 그대로 전부다. 속이 깨끗이 빌 때까지 계속 토한다. 이게 또 얼마나 괴로운가 하면, 한 끼 식사를 토해내고 나면 정신이 아득해져서 기절해버릴 정도다.

  물론 과장이 조금 섞여 있지만. 말한 김에 미리 적어두는데 나는 의외로 허풍쟁이다. 내가 쓰는 기록 전부를 믿지는 마라. 애초에 인간은 자신을 좀 더 부각하기 위해 거짓말하는 본능이 있다고 한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일지도 객관성을 잃어버린 것처럼 들리겠지만, 사실이 그렇다는데 어쩌겠나? 쓰는 것이 신이 아닌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아차차. 이야기가 샜다. 아직 내 소개도 다 못 했는데. 이런 식으로는 자기 전까지 다 못 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내가 삼킬 수 있는 것은 공기와 물 뿐이다. 말 그대로 이슬만 먹으며 자란, 아니다. 방금 표현에 눈살이 찌푸려졌다면 사과하겠다. 수년 동안 반복해온 자기 위안을 위한 말이 무심코 튀어나왔다. 이 경우엔 손이 무심코 놀려졌다고 표현해야 옳겠지만 말이다.

  내가 영양을 섭취하는 방법은 따라서 입으로 음식을 삼키는 것이 아니다. 조금 독특한 방법인데 일반 사람이 보기에는 기분 나쁠지도 모른다. 당신의 상상력이 뛰어나든 뛰어나지 않든, 한순간이라도 그 장면을 상상한다면 핏기가 가실 테니 자세한 기록은 생략하도록 하겠다.

   하여튼 이 방법으로 어떻게든 연명할 수는 있는데, 완벽한 방법은 아닌 모양인지 몸이 성치 않다(게다가 배가 부르다는 느낌도 들지 않는다). 잔병치레도 많고 특히 어지러운 것은 못 참을 정도다. 몸이 이렇다 보니 밖으로 나가기 위해선 큰 결심이 필요하다. 외출을 삼가다 보니 자연히 피부도 새하얘졌다. 마지막으로 봤던 거울 속 얼굴이 곧 죽을 것 같은 병자였다면 상상이 가는가.

  이 정도면 충분할까? 다시 읽어보니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것 같다. 병약 소녀 레인이라고 소개하면 간단할 것을.

 

  내가 최근 생활하는 곳이자, 지금 이 기록을 쓰고 있는 곳은 바로 아카데미 시리프다. 크게 말해서 그렇다는 거지 자세히는 다섯 탑 중 하나인 인내 속에 있다. 내 신분이 선생이나 학생이라고 추측한 사람이 많을 텐데, 미안하지만 나는 그렇게 머리가 좋지 않다. 그렇다고 돈이 있는 것도 아니고.

  요는 불청객이라는 소리다. 일지에 적지 못하는 모종의 이유로 나는 아카데미 시리프에 잠입했다. 원래 나는 친구 메이아의 기숙사 방을 쓸 계획이었지만, 우연치 않게 발견한 다락방 덕분에 감시의 눈을 비교적 수월하게 피하게 됐다.

  이 다락방은 특이한 게, 발견했을 당시에 엄청난 수의 장서가 쌓여 있었다. 장서들을 다 치우고 나면 기숙사 방보다 더 넓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장서들을 따로 처리하기가 곤란해서 치우지 못했지만.

  어쨌든 내가 이 다락방을 중심으로 탐색을 시작했다는 사실만 알면 된다. 이 정도면 배경설명은 충분하겠지. 나는 의외로 충실하고 친절한 기록자일지도 모르겠다.

 

  엘립에 대해 관심을 두게 된 계기는 다락방의 장서 중 하나 때문이다.

  무리하게 아카데미 내부를 탐색하던 나는 몸 상태가 급격히 나빠져서 장서로 만든 침대에 몸을 뉘이고 있었다. 만들어놓고 처음 써 봤는데 책 높이가 맞지 않아 울퉁불퉁해서 굉장히 불편했다(지금은 익숙해져서 잘만 쓰지만). 또 별다른 이음새가 없어 조금만 몸을 뒤척여도 여지없이 무너지곤 했다. 무너지고 쌓고, 무너지고 쌓고. 침대가 세 번째 무너지는 순간 내 정신상태도 무너졌다. 책을 손에 집히는 대로 던졌는데 근처에 쌓여있던 책 탑에 맞았다. 책 탑은 당연하다는 듯이 중심을 잃고 내 쪽으로 쓰러졌다. 책 모서리가 몸 여기저기를 강타하는 아픔이 어느 정도인지 굳이 서술치는 않겠다.

  책의 산에 파묻힌 채로 하도 성질이 나서 책 한 권을 잡아 다시 던지려고 했는데, 원체 좋지 않던 몸인데다 날뛰기까지 해서 기운도 없고, 또 제2의 참사가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여 조용히 내려놓았다. 이유 없이 괜히 억울하고 서러워서 눈물이 나려 했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이 손에 잡힌, 던지려다 만 책의 제목이었다.

 

  '일지 : 모든 병을 치료하는 영약'

 

  모든 병을 치료한다는 말에 흐르려던 눈물도 쏙 들어가버렸다. 나는 재빨리 자세를 고치고 그 책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전체적인 내용을 요약하자면 엘립 묠리스라는 기억을 훔치는 도둑이 칼바이란 지방의 성주로부터 영약을 훔쳐낸다는 이야기였다. 그 글을 다 읽고 난 뒤의, 아니 엘립이라는 이름이 나왔을 때부터의 내 심정은 이미 실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조금이나마 기대한 자신이 바보 같이 느껴졌다. 모든 병을 치료하는 영약이 이 세상에 존재할 리가 없지 않은가? 엘립이 훔쳐서 없어졌다고 쳐도, 기억을 훔친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지 않은가? 이런 글은 일지라는 제목을 가진 환상소설에 불과하다.

  거기에 사실 여부를 떠나 엘립이라는 자에게 화가 날 지경이었다. 결과적으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으로 된다고 해도 도둑질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물론 이건 개인감정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엘립이 영약을 훔치지 않았다면 지금 나는 많이 달라져 있지 않았을까, 하고 상상해버렸기에 화가 난 것일지도 모른다.

  모두 부질없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잠이 들었다.〃

 

 

 

 

 

  〃네가 쓰고 있는 건 전부 거짓말. 전부.〃

 

 

 

 

 

  〃진짜 잠들어 버렸다. 졸았다는 게 옳은 표현인 것 같다. 한 시간이면 충분히 다 쓸 수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해가 밝을 때까지 전부 써낼 수 있을까? 일단 노력해보겠다.

  그 후 잠에서 깨어났을 때 몸살감기에 걸린 것인지 정신이 몽롱하고 몸도 움직일 수 없어서, 탐색을 잠시 중단하기로 했다. 내가 엘립을 만났을 때까지, 줄곧 나는 책으로 만든 침대에 누워있었다. 그렇게 며칠 정도를 허비했다.

  발이 땅을 울리는 소리가, 거기에 이어 바닥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늘 그렇듯 나는 메이아가 음식을 가져오는 것으로 생각했다.

 

  "뭐야, 여긴?"

 

  아무리 내가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상태였어도, 목소리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정도는 구분할 수 있었다. 굵은 중저음의 목소리다. 나는 힘 없이 누구냐고 물었다. 얇은 쇳소리 같은 목소리다.

 

  "너야말로 누구냐?"

 

  힘겹게 고개를 치켜들고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봤다. 그때 봤었던 첫인상은, 아마 저기압 상태인 기분과 안 좋은 몸 상태가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쳤는지, 좋지 않았다. 태어날 때부터 그런 건지 아니면 햇볕에 그을린 건지 거뭇한 피부에, 마지막으로 언제 감았는지 떡진 머리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얼굴에 대해 왈가왈부할 정도는 아니지만, 솔직히 열에게 물어보면 아홉은 비호감이라 대답할 것 같다. ………. 이건 기분이나 몸 상태가 어쩌고 할 게 아니구나.

  그다음 일어난 일은 자세하게 기록할 수 없다. 말했듯이 몸 상태도 안 좋았고 그 때문에 기억에 혼선이 있는 것 같다.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고 내 영역에 침범한 이 녀석이 누군지, 아니면 이 녀석이 이곳의 원래 주인이라서 돌아온 건지, 그것도 아니라면 아카데미 측에서 내 존재를 눈치채고 나를 붙잡으러 온 건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서로 누구냐고 고집 세게 물어보았던 것 같다. 그 후 서로 쌍욕을 하며 싸우며 어쩌다가 서로 이름을 알게 되었던 것 같고, 그가 자신의 이름을 엘립이라고 밝혔을 때 그것이 진실인지 아닌지도 따지지 않고 맹목적으로 그를 미워하고 증오하면서 악을 썼던 것 같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시야에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 악을 바락바락 쓰다가 지쳐 기절해버린 것 같다. 엘립이라는 사람이 방에 들어왔다는 것이 사실인지 꿈인지 구분치 못하는 모호한 상태였다. 나는 내 머리를 믿는 대신, 변해버린 방의 풍경을 믿기로 했다.

  우선 처음 보는 외투를 덮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무너진 책 탑들은 어느샌가 다시 쌓여있었다. 결정적인 것은 침대 옆에 놓여있는 책, '일지 : 모든 병을 치료하는 영약'이다. 그 책 위에 붉은 메모지가 붙어있었다.

 

  '영약은 없지만, 감기약은 가지고 있지.'

 

  그때 나는 어떤 특별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자신의 이름을 엘립이라고 밝힌 자가 다시 이곳을 방문할 것이라는. 어쩌면 그에 대한 기록은 여기서 끝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 예감을 믿고 홀가분해진 몸으로 이 일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 엘립이라는 자가, 아무것도 훔치지 않는 도둑이 아니라도 상관없다. 엘립이라는 이름이 진짜든 가짜든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왠지 모르게, 이 일지를 계속해서 써내려간다면 내가 이곳에서 찾는 그것에 도달할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일지의 존재의의는 단지 그뿐이다.

  이제 눈 좀 붙여야겠다.〃


 

 

 

 

 

 

 

 

 

 

/사족/

사랑합니다. 에포입니다.

드디어 일화 첫 번째를 시작하게 되었는데요. 왜 저는 쓸 때마다 '병 걸린 여인'이라는 클리셰를 사용하게 되는 것일까요Orz.

신경 쓰고 있지 않으면 죄다 병에 걸려 버립니다. 어떻게든 해야 할 텐데 말이지요.

어쩌면 S의 기질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허허.

  • ?
    행인 2012.02.17 21:42

    기억을 훔친다는 설정도 흥미롭고 제일 처음의 인용문에서 나오는 내용이 레인이 엘립 묠리스와 만나는 부분과 서로 자연스럽게 맞닿아서 읽는 맛이 나네요. 재밌게 봤습니다. 건필하세요.

  • ?
    epoh 2012.02.18 00:03

    코멘트 감사합니다'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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