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2.17 04:20

요정의 허물 0

조회 수 3894 추천 수 0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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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정의 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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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0 작가

 

 

 

 

 

  나는 정말로 과대망상에 빠진 것일까? 내 눈에 그녀가 보이는 한 그런 물음은 의미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그녀에 관한 이야기를 꺼낼 때 받는 경멸, 멸시의 시선은 견디기 어렵다. 나 자신만 업신여겨진다면 상관없겠지만 그녀의 존재가 거짓말 취급당하는 건 도저히 참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이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하지 않는다. 아무리 친분을 쌓고 서로 이해해줄 수 있는 친우라 하더라도 그녀에 관해 이야기하면 실없는 소리라며 코웃음 치곤 했으니까. 그때마다 속으로 분을 삭이던 나는 결국 포기해버렸다. 그녀가 실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그야 허풍쟁이로 보일 것이다. 요정이니 마법이니 그런 허무맹랑한 것들을 누가 쉽게 믿겠는가? 당장 나도 나 자신이 정신병에 걸린 것인지 의심하는 마당에. 하지만 요정은 실제로 존재하고 있고, 요정이 부리는 마법도 분명 있다. 지금까지 내가 보아왔던 것이 환각이나 환청이 아니라면 말이다.

  (루빌라. 아아, 루브여. 오해하지 마세요. 내가 의심하는 것은 내 머릿속이에요. 비록 아무도 그대를 믿지 아니하더라도 난 믿고 있다는 걸 알아줘요. 나에게 당신은 절대적인 걸요. 당신이 이 잿빛 현실에 있든, 내 허튼 망상 속에 있든.)

 

  이 글을 읽는 누군가가 내가 하는 말이 모순이라는 것을 눈치채기를 바란다.

  요정의 존재를 역설하는 것을 포기한 내가 지금껏 써왔던 요정소설에 관한 이야기다. 그녀의 존재를 주장하는 것을 포기한 내가 그런 소설을 써대는 것은 분명 아귀가 맞지 않는다. 하지만 반론할 거리가 있는 게, 그 소설을 환상소설로 읽지 않은 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어떤 진실이라도, 받아들이는 사람이 믿지 않으면 거짓이 되어버린다. 물론 당신이 읽고 있는 이 글도 사람에 따라 진실이 되고 거짓이 될 것이다.

  바로 그것이다. 나, 파말레 렉시가 여태껏 해온 것은 그것을 위해서였다.

  내가 쓴 글들은 순전히 내 글을 진실이라고 믿어줄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환상이 아닌 실재로서 읽어줄 그 누군가를 위해서였다. 열 명도 안 될지도 모르지만, 한 명밖에 없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아무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개중에는 직접 요정과 접촉해 본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사람에게 말하겠다.

 

  "나는 당신과 대화하고 싶다."

 

  참고로 말하자면, 어설프게 나를 골리려는 자들은 조심하길 바란다. 내가 지금껏 써온 소설에는 약간의 거짓말도 포함되어 있으니까 말이다. 요정을 아는 사람만이 눈치챌 수 있는 사소한 것이다. 나에게 그녀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그 거짓말을 바로잡으며 말을 걸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비로소 나는 23년 동안의 고독을 지워버리고 진정한 친구를 얻게 되고, 그 친구에게 내 깊은 심정을 털어놓을 것이다. 술잔을 기울이며 처음 요정과 대면했을 때의 심정을 이야기하고, 그 친구와 요정이야기를 안주 삼아 밤을 지새울 것이다. 그러다가 미처 끝마치지 못한 이야기를 뒤로하고 나중에 다시 만나자며 헤어지는 것이다. 아마 여리고 낯가리는 루빌라라도 그대에게 손을 흔들겠지.

 

  사실대로 말하자면 이것도 거짓말이다.

  그런 사람이 내게 찾아온다고 해도 루빌라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이미 이 세상을 떠났다. 떠난 것일까? 내가 알고 지낸 요정이 그녀밖에 없으니 진실은 알 수 없다. 그녀가 일러준 대로라면 그녀는 다른 세상으로 떠난 것이 맞다. 아무리 내가 보았을 때 그것이 죽음의 형상이더라도 그녀는 죽은 게 아니다. 루빌라는 절대적이다.

  그리고 요정을 아는 당신이 날 찾을 일도 없을 것이다. 당신이 이 글을 읽을 때면(그러니까 이 글이 출판되었을 때면) 나는 이미 루빌라를 쫓아 다른 세상으로 떠난 후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저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이 세상에 파말레 렉시라는 거짓말쟁이와 루빌라라는 요정이 있었다는 사실을 누군가는 알아주었으면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제부터 내가 쓸 글은 말하자면 나의 자서전이다. 어렸을 적 루빌라와의 만남, 그리고 내가 이 글을 쓰기까지의 이야기를 쓸 생각이다. 지금까지 루빌라와 나누었던 대화들, 그리고 그녀가 내게 준 추억과 작은 선물들에 관한 이야기를. 그러나 자서전이 아닌 소설이란 형태로.

  당신은 이 글을 환상소설로 읽어줄까, 아니면 자서전으로 읽어줄까?

  정말 궁금하다. 사실 그렇게까지 궁금하지는 않다. 궁금하다는 것은 거짓말이고, 위에 있는 말들도 전부 거짓말일지도 모른다.

  몰랐는가? 거짓말이야말로 작가의 소양인 것을.

 

  - 파말레 렉시, 『좀 더 자유로운 영혼의 꺼풀(223년)』 중에서

 

 

 

 

 

  파말레는 펜을 놓았다. 그가 펜을 놓은 책상은 평소보다도 지저분했다. 어지러이 쌓여 있는 종이들과 참고 서적. 말라서 바닥까지 드러난 잉크통 두 개와 아직 반가량 남아 있는 하나. 꺾여서 더는 쓸 수 없는 펜촉들이 나뒹굴고, 그 근처에 갓 내려놓은 펜이 있다.

  드디어 끝마쳤다. 『좀 더 자유로운 영혼의 꺼풀』의 초고를 다 써냈다. 파말레는 집필을 마치고 나면 으레 그래 왔듯이 성취감에 취해 기지개를 켜려고 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전혀 개운하지가 않다. 오히려 찝찝할 정도다. 아마도 이제 영영 글을 쓰기 위해서 펜을 들 일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파말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분명 일어난 것은 파말레였지만, 파말레에게 느껴진 것은 자신의 오른손이 붕 떠오르는 그런 느낌뿐이었다. 오른손은 무언가를 찾아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차갑고 딱딱한 것을 잡아냈다.

  그제야 파말레는 자신이 찾아낸 것을 똑바로 마주할 수 있었다.

  유리병이었다.

  파말레는 그것이 세상이 자신에게 하는 거짓말인지, 아니면 꾸밈없는 진실인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의 메마른 손에 쥐어 있는 그 병이 실존하는지조차 확신하지 못했다.

  병 속에 놓여 있는 그것은, 파말레의 인생 전반을 지배했으며 지금은 사라져버린 무언가의 허물이었다. 그 허물을 응시하는 파말레의 눈은 이미 정상적인 초점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 게슴츠레한 것이 꼭 잠결에 억지로 일어난 사람 같았다.

  그는 그 상태에서 계속 무어라고 끊임없이 말을 해댔는데, 그가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까지 이해하지 못한 그 말은 다음과 같다.

 

  "거짓말."

 

  "하고 싶지 않았어."

 

  "사실은."

 

  "거짓말."

 

  사실은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는 것인지, 거짓말하고 싶지 않았다는 말이 사실은 거짓말인지.

  아마 파말레는 영원히 모를 것이다. 자기 자신조차 기만해야 하는 작가이기에.

 

 

 

 

 

 

 

 

 

 

/사족/

사랑합니다.

에포라고 합니다. 요정의 허물은 판타지를 표방한 소설이긴 하지만 좀 심히 이상한 이야기일 가능성이 꽤 높습니다. 옴니버스…였으면 좋겠다고 생각 중이고요. 막 ep1 초고를 다 썼으므로 프롤로그 격인 ep0을 올립니다. 잘 부탁해요.

  • ?
    행인 2012.02.17 21:36

    느낌이 좋네요. 잘 보고 갑니다.

  • ?
    epoh 2012.02.18 00:02

    느낌뿐이라 부끄럽습니다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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