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2.28 08:26

조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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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내뱉은 숨결이 하얗게 얼어붙는다.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새하얀 눈. 얼음. 그것을 촉촉히 적시는 차가운 입김과, 끝 없는 심연에 빨려들어가기 직전의 그녀의 모습뿐이다. 수십 킬로그램에 달하는 장비들의 무게는, 지금까지 쌓여온 피로의 무게에 더해져 전신을 압박해온다. 그 중압감을 덜어줄 수 있는 건, 그녀와 안자일렌¹을 하고 있다는,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 나와 그녀가 서로를 지탱해주는 유일한 버팀목이라는 곤경의 상황이었다.

 


 「한시라도 눈을 떼면 바로 낙오다! 낙오자를 데리고 갈 여유는 아무래도 없겠지. 알아서 잘 따라오도록.」
 대장님의 말은 가슴 깊이 새겨뒀을 터인데, 어째서.
 어쩔 수 없었나…. 모든 것을 삼켜버릴 듯한 눈보라는, 너무나도 갑작스레 찾아왔고, 그런 상황에서 나를 구하러 달려든다는 것은, 모두의 희생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규율을 어기고 대열에서 이탈해, 내 곁을 지켜준 사람이 한 명. 딱 한 명 있었다. 눈 앞을 분간할 수 없는, 백시현상(Whiteout)² 때문에 누구인지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알 수는 있었다. 이럴 때에, 나에게 손을 내밀어 줄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으니까.
 「너…. 뭘 하는 거야, 지금! 죽고 싶어? 당장 돌아가!」
 「죽고 싶냐니, 그런 건 잘 모르겠어. 하지만, 널 죽게 두고 싶지는 않아.」
 세상에 이처럼 멍청한 말이 더 있을까.
 자신의 목숨은 생각치도 않고, 남의 목숨을 구하러 온다고?
 「꺼져! 너 따위 짐만 될뿐이고, 죽어도 차라리 혼자 죽겠어.」
 「이미 늦었어. 게다가, 너 아까부터 어딜 보는 거야? 앞도 안 보이는 주제에, 말은 잘하네. 따라와.」
 내 비어있는 왼손을 덥석 낚아채더니, 다짜고짜 나를 어딘가로 끌고 간다. 끌고 간다는 표현이 무색하게, 앞이 안 보이는 나를 놀라울 정도로 배려한 걸음 덕분에, 한 발 한 발 어색하게 딛으면서도, 한 번도 넘어지지 않고 몸을 누일만한 곳에 도착했다.
 「누워 있어.」
  말투는 내 등 밑에 푹신하게 깔려있는 눈보다도 차가웠지만, 그 뒤에는 눈보라 뒤에서 끊임없이 빛나고 있는, 햇살과 같은 따스함이 숨겨져있다고 대번에 알아차렸다. 풋―하고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알았어. 너도 쉬어.」
 하고 대답을 해줬다. 가끔은 이렇게 귀여운 면도 있으니까, 질리지 않고 있을 수 있던 거겠지.
 「뭐야, 그 기분 나쁜 웃음은.」
 「추워서 정신이 조금 나간 모양이야. 그것보다 영감, 시끄러운 녀석 둘이 없어졌다고 좋아하고 있겠지.」
 분위기를 조금 완화시키기 위해서 농담을 던져본다. 남극에 발을 딛고 나서는, 내내 얼굴을 찌푸린 채였으니, 가끔은 이런 분위기도 필요하겠지.
 「배낭 풀고 파티라도 하고 있겠지.」
 말하는데 힘을 허비하지 말라는 잔소리도 이내 이어졌다. 예예. 그래야지요. 누구 말씀인데.
 그대로 눈을 감자, 새하얗던 세상은 암전(Blackout)되었다. 머릿속도 슬금슬금 자리를 어둠에 내어주고 있었다.

 


 일….
 이러….
 「일어나!」
 눈 앞이 흐릿하다. 얼굴에 불투명한 비닐봉지를 하나 씌워놓은 것만 같다. 조금 뚱한 반응을 보이자, 귀 따가운 말을 더 몰아친다.
 「여기까지 와서, 자다가 얼어 죽을 셈이야?」
 앓는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렇지 않으면 욕을 먹으며 생을 마감하게 생겼다.
 「이렇게 구석에 박혀 있어야, 저쪽에서도 수색하기 힘들다고. 아마 부리나케 찾고 있겠지. 눈보라도 얼추 그친 것 같으니, 베이스캠프 쪽으로 걷자.」
 그 전에, 더욱 중요한 게 있다. 나는 말없이 묵묵히 배낭을 뒤져, 먹을 것을 꺼내든다.
 「일단 굶어죽진 말아야겠지. 헷.」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입으로 행복감을 만끽한다. 그다지 맛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상황에 무엇이 맛이 없으랴. 손톱이라도 뜯어 먹고 싶을 지경이다. 대충 허겁지겁 목 뒤로 음식물을 넘기고, 서둘러 배낭을 다시 멨다.
 눈이 들이치지 않는 곳을 벗어나, 다시 눈보라 속으로 발을 뗐다. 이제 눈 앞의 분간도 어느정도 되고, 눈보라와 바람도 상당히 약해져서, 걷기에 큰 지장은 없었다.
 「이쪽 방향인 것 같아.」
 「방향인 것 '같아'냐! 세상에.」
 무책임한 추측은 말아줘. 이곳은 마음대로 움직이기엔 너무나도 위험한 곳이야. 더이상 헤매는 건 질색이다!
 「그러면, 이쪽 방향이야.」
 「확실해?」
 「확실해.」
 「나를 걸고?」
 「널 건다면, 지금 당장 반대방향으로 가도 괜찮겠지.」
  …무섭네.
 「그럼, 간다.」
 발이 푹푹 빠지는 눈 위를 걷는다. 사실은 걷는다는 표현도 애매할 정도로 힘들게 발을 내딛고 있다. 가만히 있다가 얼어 죽는 것보단 낫지만, 이쪽은 과하게 힘들다고.
 
 「하아―.」
 내뱉은 숨결이 하얗게 얼어붙는다. 나는 너무나도 힘든 나머지, 제자리에 풀썩 주저앉는다.
 「어이, 너랑 나는 이렇게 연결되어 있으니, 네가 그러면 나도 못 간다고!」
 그녀와 나 사이의 자일³을 흔들며 불평한다. 그녀는 우리 사이의 로프가 팽팽해질 때까지 앞서간다.
 무언가가 나를 매우 강한 힘으로 끌어당긴다. 앉아있는 채로 눈밭에 전신이 쓸린다. 반사적으로 피켈⁴을 지면에 박고, 확보자세를 취한다. 그리고 그녀가 있던 방향을 바라본다.
 그녀가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것은, 쌓인 눈 밑으로 연결된 한가닥의 로프 뿐. 그것도 바닥과 맞닿아, 끝에서는 땅속으로 파고들고 있는.
 히든 크레바스구나―라고, 깊은 구멍 속으로 조금씩 끌려가며 생각했다. 45m 자일의 절반 이상이 이미 먹혀들어갔다.
 20m.
 피켈이 눈 속에 꽂힌 채로 이동하며, 지나온 자리에 반듯한 직선을 하나 그리고 있다. 이마저도 금방 끊겨버릴테지.
 10m.
 조금씩 공포가 엄습해온다. 이대로면 곧….
 5m.
 로프를 타고 덜컹거림이 전해진다. 2m 남짓의 조그마한 틈 사이에서, 나름의 몸부림을 치고 있겠지.
 1m.
 나조차도 떨어지기 직전. 정신을 바짝 차리고, 온 힘을 손가락 끝에 쏟아 자일을 쥐었다.
 조금이라도 방심했다간, 둘 다 추락한다.
 깊이가 얼마나 될 지는 모르지만, 떨어져 살아 남는다고 해도, 위로 다시는 올라올 수 없다.
 그 안에서, 얼어 죽던지, 굶어 죽게 되겠지.

 

 「끊어, 바보야.」
 안에서부터 외침이 들려왔다. 나는 침묵으로 답했다.
 「자일을 끊으라고! 너, 죽고 싶어? 너라도 살아야 할 것 아냐!」
 「그러면, 네 손으로 끊으면 되잖아. 넌 살고 싶은 거 아니야?」
 조금 호흡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게다가, 죽고 싶은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너를 죽게 내버려둘 수는 없어.」
 절대로, 널 죽게 할 수는 없어.
 「진짜 바보네…. 그래, 난 살고 싶어. 그런데 말이야, 이미 배낭도 떨어트려서 등강기도 없고, 늑골도 부서진 것 같아. 그러니까, 끊으라고!」
 「그래? 그렇다면야.」
 나는 배낭을 던져두고, 크레바스의 벽면을 타고, 압자일렌₂을 했다. 가파른 벽면을 미끄러지듯이 타고 내려간다. 욕과 함께 만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미안한데, 나는 평소에도 귀가 별로 안 좋거든. 하나도 안 들려.
 그녀의 옆에서,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되어 버린 얼굴을, 자일을 쥐고 있다가 부어버린 왼손으로 어루만졌다.
 「그러면 말이야. 너를 혼자 죽게 내버려둘 수는 없어.」
 「미안해. 정말 미안해. 다 거짓말이었어. 애초에 베이스캠프의 방향도 아니었어. 애초에, 그런 거 몰랐어. 그런데 말야. 네가 움직일 생각을 않으니까…. 미안해….」
 울지마.
 여자 앞에서 울게 만들 셈이야?
 「알고 있었어.」
 그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러니까, 애초에 베이스캠프의 방향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고. 지나온 길, 대략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왜, 말하지 않았어…?」
 「옳은 방향으로 가더라도 내가 살아남을 확률에는 별 차이가 없지만, 너와 싸우게 되면 내가 싫어질 확률은 백퍼센트니까.」
 뭐라고 작게 중얼거린다.
 「뭐? 나 귀 어두운 거 알잖아.」
 「이 바보야! 내가…너랑 어떻게 싸우겠어….」
 「헤에―. 그렇구나. 실수했네.」
 「…사랑해.」
 순간 따뜻하고 부드러운 무언가가, 내 입술 위에 포개어졌다. 맞닿은 볼로 서로의 온기를 느꼈다. 혀가 얽히는 것을 신호로, 조용한 도입부가 끝나고, 전개부가 이어졌다.
 추운 줄도 모르겠다.
 몸도 마음도, 따뜻함으로 가득 차서.
 사랑으로 충만해서.

 그렇게 한참을, 서로 끌어안고 크레바스 속에서 줄 하나에 의지한 채로 매달려 있었다. 이대로 끝이라고 해도, 바로 연주회에 내보내도 될만큼, 손색없는 코다를 찍을 수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멀리서부터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두두두두―하고, 프로펠러가 돌아가는 소리.

 「우리 이러고 있는 거 들키겠어. 어떡하지? 그냥 숨어버릴까?」
 장난스레 농담을 던져본다.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진다.
 「이 밑으로 뛰어내린다면 되겠네.」
  농담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아줘. 아직 난 너와…
 사랑하고 싶으니까.
 너를 향한 내 외침을, 아직 제대로 전하지 못했으니까.

 「사랑해―!」
 둘의 목소리가 겹쳐서, 깊은 바닥으로도, 높이 치솟은 아찔한 하늘로도 울려퍼졌다.

 

주¹:등반이나 크레바스를 건널 때 등의 상황에서, 안전을 위해서 서로의 몸을 로프로 잡아매는 일.

주²:주로 겨울철에 일어나는 현상으로 눈이 많이 내려서 모든 것이 하얗게 보이고 원근감이 없어지는 상태.

주³:등산 등에 사용되는 로프.

주₁:등산 용구의 하나로 머리 부분에 도끼 모양의 쇠붙이가 붙어 있는 지팡이.

주₂:등산 등에서 밧줄을 써서 급한 비탈을 내려가는 일.

 

사실은 글감을 두가지 받아서 써 본 소설입니다.

여자친구가 「누님에 대한 사랑」(3살 연하면서!)

친구가 「빙하에서의 조난」.

 

두 개 쓰기 귀찮아서 그냥 합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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