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1.19 20:58

스토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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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납고 포악한 겨울이 사라졌다. 나무 밑에 곰탱이처럼 숨어있던 봄은 기지개를 펴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겨울 동안 쥐죽은 듯이 조용하게 시간을 보내던 꽃들도 고개를 들어 자신을 뽐내기 시작했다.

봄의 하늘은 새색시마냥 붉어져있었다.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기세라, 슬슬 밤의 커튼이 찾아와 덮어주지 않으면 곤란할 지경이다.

 

나는 공원의 벤치에 덩그러니 앉아서 전방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 것도 없었다. 이곳은 공원이 분명했지만 이상하게도 사람은 없었다. 아이들이 놀기에는 늦은 시간이라고 쳐도, 연인들이 찾아와서 사랑을 나누기에는 늦은 시간도 아니다. 공원을 두리번거리던 나는 금방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이건 공원이 아닌 이름뿐만 공원인 황무지다. 공원의 필수요소인 놀이기구는 여러종류로 사방에 곳곳에 위치했지만, 다 늙어가는 할아버지처럼 주름이 나 있어서 금방이라도 부서져버릴 기세다. 중앙에는 모래사장이 있었지만 간간히 유리조각이 보이는 걸 봐서 아이들이 놀기에는 무리다. 확실히 이곳은 아이들이 야구단을 짜와서 놀아도 신경쓰지 않을 만큼 성의없는 공간이었다. 아이들에게 빵점, 연인들에게 빵점, 그리고 나에게도 빵점. 총 도합 삼백점 만점에 빵점을 받아버린 공원이 불쌍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걸. 나도 빵점을 줘버렸으니까.

 

나는 자리에서 엉덩이를 털며 일어났다. 사납고 포악한 추위가 사라지니, 이번에는 덜 차갑지만 쌀쌀한 꽃샘추위가 찾아온다. 추운 것을 싫어하는 나로서는 불행한 일이다. 어째서 겨울 다음에 봄인 것인지, 봄을 건너뛰고 여름이 바로 찾아왔으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나만의 망상이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꽃들이 멸종한다고 해도 나는 별 상관없이 기뻐할 것이다. 아니, 꽃이 사라지면 산소공급량이 사라지니까 이건 기뻐하면 안되구나. 뭐, 상관없겠지.

 

나는 슬쩍 뒤를 바라보았다. 텅텅 비어버린 벌판에 덩그러니 버려진 나무 같이, 혼자서 멍하게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소녀가 눈에 띄었다. 등까지 기른 머리카락에 하얗고 예쁘장한 얼굴이 잘어울리며, 특히나 검은 원피스가 인상적이다. 이런 추운 봄날에 원피스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건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소녀가 누구인지는 모른다. 얼굴도 처음보는 것인데 기억에 남아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아까부터 계속 이쪽을 바라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다. 마치 큰 일을 벌이려는 장군 같은 느낌이다. 소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몸을 엄청 떨기 시작했다. 이봐, 그렇게 떨면 내가 엄청 나쁜 사람처럼 보이잖아. 소녀는 뻣뻣하게 몸을 움직이면서 다가오기 시작했다. 걷고 있으면서 굳어져있고, 그 상태로 떨리는 모습은 로봇 같은 느낌이다. 웃어버릴 뻔했다.

 

"저, 저기!"

 

뭔가 결심한 듯한 말투다. 소녀는 주머니에서 꾸깃꾸깃하게 접어졌지만, 왠지 모르게 정성이 들어가있는 듯한 하트가 눈에 띄는 편지를 나에게 뻗었다. "받아주세요!"라고 외치면서 뒤로 뛰쳐나가는 소녀의 모습에 어안이 벙벙하다. 나는 소녀의 뒷모습과 편지를 번갈아가면서 쳐다보았다. 그리고 대충 생각한지 십여초가 지났을까. 누구나 아는 뻔한 사실이 드러났다.

 

"혹시 편지를 열면 하트가 뻥하고 터진다거나."

 

물론 그런 이벤트는 없을 것이다. 나는 조심스럽게 편지를 개봉했다. 그리고 내용물을 읽으면서 머리를 부여잡았다.

 

좋아합니다.

010 - 1234 - 4444

연락주세요.

 

간단하고, 간단하면서, 어쩐지 과감한 러브레터다.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마 평범한 소녀라면 내가 이걸 읽는지, 읽지 않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주변에 숨어있을 것이다. 확실히-저기 골목 사이에서 소녀의 뒷모습이 눈에 띈다. 마구마구 흔들리는 머리카락, 그리고 떨어져나가는 오른팔------------뭐?

나는 몸과 분리되는 팔을 바라보면서 멍해질 수 밖에 없었다. 몸과 팔을 이어주는 사이는 이미 피가 삐져나오고 있었다. 거짓말? 거짓말이지? 나는 휴대폰을 꺼내서 러브레터에 적혀있던 번호를 입력하고 통화를 시작했다. 그리고 다리는 천천히 움직이면서 서서히 그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뚝, 하고 전화 연결이 되었다.

 

-나는 널 좋아해. 좋아해. 좋아해. 좋아해. 아니,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여태까지 너의 주변만 쫓아다녔어. 그러니까, 이딴 여자와는 어울리지마, 이딴 여자는 너에게 안어울려, 이딴 쓰레기는 보석과는 어울리지 않는 법이야. 하하핫. 이 여자도 바보인가봐. 바로 너의 곁에는 내가 있었는데, 과감하게 접근하다니. 바보네. 바보였어. 하하핫

 

아까의 소녀의 목소리와는 다른 목소리가 알 수 없는 말을 계속해서 지껄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통화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눈 앞에는 아까의 소녀가 무참히 찢겨져서 버려져있었다. 피를 철철 흘리며, 팔뚝이 떨어져나간 시체의 모습은 보기에는 별로 좋지 않았다. 소녀는 확실하게 망가졌다. 이제 소녀는 하나의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다. 그 사실에 구역질이 났다. 토할 것 같다.

 

"어머나? 들켜버렸네?"

 

나는 고깃덩어리로 전락해버린 소녀의 앞에서 벽에 기대있던 또 다른 소녀를 바라보았다. 염색이 아닌, 천연색의 금발이 먼저 눈에 띈다. 그 다음에는 소녀 보다 우월한 얼굴. 그리고 무차별하게 피가 묻어버린 하얀 셔츠와 검은 치마. 그리고 그 밑에 떨어져있는 식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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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완연한 봄날의 따뜻한 사냥꾼이 눈 앞에 서있다. 이번에는 달콤한 꿀을 노리는 아름다운 벌레를 사냥한 듯 하다. 사냥꾼은 아무 말 없이 서서히 내쪽으로 다가왔다. 내 품 곳곳에서 사냥꾼의 온기가 느껴진다. 따뜻하지만, 이질감이 느껴진다. 마치 다른 세상의 사람 같다. 나는 멍한 표정으로 사냥꾼을 바라보았다.

 

"근처의 벌레새끼들은 다 죽여버려야 되. 그래야 앞으로 해충이 꼬이지 않고, 너는 나만의 것이 될 수 있어. 그러니까-이제부터 너는 나의 것. 아무에게도 주지 않을거야. 나만의 것. 나만의-보석."

 

사냥꾼의 눈동자는 이미 담아있는 것이 없었다. 아니, 담긴 것이라곤 호수에 비춰지는 듯한 내 모습이 전부다. 나는 그녀를 떼어냈다. 고깃덩어리처럼 변해버린 소녀의 모습과 곧 있으면 변해버릴 나의 모습이 비교된다. 나도 저렇게 되는 걸까? 사냥꾼의 사랑을 받으면서? 소녀와는 다른 의미로 죽어버릴지도 몰라. 그러니까--------도망가야 되.

 

"왜? 왜? 왜? 넌 나의 보석인데? 왜 떠나가? 어딜가? 누구 마음대로? 아무에게도 주지 않을거라니까? 이리와. 가지마. 안그러면-죽여버릴거야."

 

나는 사냥꾼의 말에 뒷걸음 치기 시작했다. 사냥꾼의 눈의 색깔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뭐에 홀린 듯, 불투명한 색의, 단지 나의 몸을 노려보기만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 같았다.

 

"경고했어."

 

사냥꾼은 사냥감을 노리듯 나를 덮쳐왔다.

 

"보석은 정제되면 더 아름다워지는 법이야. 그러니까 내가 널 정제해줄게. 무슨 모양이 좋을까? 아, 그래 꽃 모양이 좋겠다. 보석으로 된 꽃이니까, 영원히 시들지 않을거야. 그래. 그래. 넌 꽃이 되어 나만 바라만 봐주면 되. 그러니까, 사랑해."

 

목과 팔과 다리가 연달아 떨어져나가는 듯한 느낌이다. 작은 식칼로 이런 짓을 할 수 있다니, 색다른 느낌이었다. 나는 의도하지도 않았는데 서서히 하늘로 향하는 눈동자를 어쩔 수 없었다. 아니, 눈동자가 아니다. 이미 떨어지기 시작한 머리를되돌릴 수는 없-------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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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냥꾼은 그렇게 말하면서 눈 앞의 조형물을 바라보았다. 아스팔트처럼 시멘트로 되어있거나, 나무 같은 평범한 재료가 아닌, 인체라는 특이한 재료로 만들어지는 특이한 조형물이다. 그것은 꽃의 형태를 띄고 있었다. 팔다리가 없는 몸은 꽃받침의 역할을 하고 있었고, 팔과 다리는 가슴 위에 붙여져서 꽃잎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중앙의 머리는 언제든지 사냥꾼을 바라보기 위해서 박제되어있는 사슴 같이 박혀있었다. 사냥꾼은 그런 머리를 바라보면서 미소 지었다.

 

"언제나, 언제나, 언제나, 나만 바라봐줄거지?"

 

------------

  • ?
    ColdWind 2010.11.25 17:43
    매우 함축적인 소설이군요 ㅋ
    사실 이 단편에서 무엇을 이야기하시려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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