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8.12 20:55

[파편] 뿔피리

조회 수 85 추천 수 1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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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마을에 어떤 남자가 살았다. 남자가 철이 들 즈음부터 그의 머리에는 뿔이 돋았는데 남자는 이 뿔을 감추기 위해 늘 모자를 쓰고 다니게 된다. 이유도 모르게 돋은 뿔은 남자의 콤플렉스였다.
  어떤 마을에 어떤 여자가 살았다. 여자는 유명한 플루트 플레이어였다. 그녀는 특별한 자신에게는 특별한 악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모자 쓴 악기장인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됐다.
  여자는 남자의 악기공방에 찾아가 자신만의 악기를 만들어 달라 요구했다. 남자는 기존에 만들어 뒀던 악기 중 하나를 여자에게 건넸다. 여자는 화를 냈다. 나는 기성품을 요구한 게 아니라면서. 이에 대한 남자의 대답은.

 

  "자격시험 같은 거예요."

 

  어떤 음색을 연주하는지, 어떤 리듬으로, 어떤 주법으로, 어떤 멜로디로, 어떤 마음으로 연주하는지. 그걸 알지 못하면 단 한 명을 위한 악기라는 말은 꺼낼 수 없다.
  여자는 연주를 시작했다. 남자는 여자의 연주에 감동했다. 이 여자를 위한 악기를 만들고 싶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 첫 악기가 완성됐고, 당연하게도 여자는 그 자리에서 연주했다. 남자는 눈을 감고 감상에 젖었다. 그 감상을 여자는 매몰차게 깨부수었다.

 

  "이번에는 제가 시험할 차례네요."

 

  감히 자신을 평가하려 했겠다. 그런 심정이었을 것이다. 꽤 훌륭한 악기였지만, 여자는 만족할 수 없었다.

 

  "다시 만들어주세요."

  남자로서는 혼신을 다한 작품이었는데, 그렇게 당연하다는 듯이 퇴짜를 맞았으니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남자는 화가 났다.
  그 후로 시작된 두 사람의 기묘한 기 싸움은 꽤 오랜 시간 지속됐다. 남자는 여자의 악기를 만들었고 여자는 남자의 악기를 연주했다. 창고에는 그녀에게 인정받지 못한 걸작들이 하나둘 쌓여갔고, 계절은 몇 바퀴 돌아가 생명의 시작과 끝을 담담히 고하고는 했다. 악기의 개수가 늘어갈 때마다 남자는 어제의 남자를 능가했다. 그리고 여자를 향한 마음도 어쩌면 그러했다.
  그녀가 내가 만든 악기를 받아준다면, 어느새 내 몸집보다도 커진 이 마음을 같이 전하자.
  더 가두어두기엔 그의 심장은 좁아터질 것 같았으니까.
  그럴 예정이었다. 그럴 예정이었는데.
  자그마한 실수였다. 남자의 모자가 있어야 할 곳을 벗어나 중력을 따라 낙하했다. 그리고 그 광경은 공교롭게도 여자의 앞에서 벌어졌다. 여자의 시선은 낙하한 모자가 아니라 모자가 감추고 있던 남자의 은밀한 부위를 향했다.
  부풀어 오른, 세월에 따라 부풀어 오른 뿔.
  여자는 도망쳤고, 남자의 악기는 연주되지 않았으며, 남자는 결심했다.
  다음 날 남자의 악기공방에 여자가 찾아왔다. 남자는 여자에게 자신의 머리를 보여주었다. 평평한 단면이 눈에 들어온다.

 

  "잘랐어요."

 

  인생 대부분을 함께 했던, 늘 그의 모자 속에 숨어있던 그것을 남자는 자를 결심을 했고, 하룻밤 새 이행했다. 여자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공방에서 뛰쳐나갔다.
  남자의 마음도 아마 그녀를 따라 뛰쳐나갔을 것이다. 그의 마음은 여자를 붙잡아 미안하다고, 그저 미안하다고 말하려 했겠지만, 실체가 없는 마음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몸은 차마 움직이지 못하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끝났다. 그의 사랑은 방금 끝난 것이다. 하하. 시작한 적도 없는데 끝이 존재할 수 있다니, 사랑이란 것은 정말 불합리하기 짝이 없다.
  자신과 다른 것을 배척하는 걸 탓할 수는 없다. 돋아난 뿔을 보고 괴물이라고 생각해도 별수 없다.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면, 이제 그녀는 남자의 악기를 연주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남자는 모자를 뒤집어썼다.
  때는 밤. 남자는 여자에게 선물해 줬던 악기들을 하나둘 꺼냈다. 하나같이 그녀를 담아 놓았다. 어떤 것을 들어도 여자의 모습이 아른거릴 정도로, 오로지 그녀를 떠올리며 만들었다.
  쾅쾅쾅.
  공방의 문을 누군가가 두드렸다. 여자였다. 옷은 엉망진창에 얼굴은 한껏 더러워졌다. 여자는 숨을 헐떡이며 손을 내밀었다. 악기를 다루었던 고운 흰 손에 생채기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손에 쥔 건.

 

  "악기…… 만들어 주세요."

 

  자격시험 같은 것은 필요 없었다.
  남자는 자신이 폐기물 수거장에 던져버린 뿔을 받아들었다. 밤이 깊었지만 악기를 만들어야 했다. 상상했다. 여자의 음색, 리듬, 주법, 멜로디, 마음……. 그 모든 것을 상상했다. 선명하고 생생하게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었다. 지금까지 만들어 온 악기들이 떠올랐다. 지금이라면 각 하나하나의 악기마다 무엇이 부족했었는지, 왜 여자의 악기가 될 수 없었는지 명확하게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남자는 점차 몰입했고 무아지경에 빠졌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에게 뿔이 났던 이유는 그녀에게 악기를 만들어 주기 위해서였구나, 하고.
  피곤해서 잠들었던 여자는 깨어나 하룻밤 사이에 완성된 악기를 손에 들었다. 남자는 마감을 마친 뒤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하지만 이제 남자가 두 번 다시 눈을 뜰 일이 없다는 걸 여자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여자는 남자의 생명력으로 만들어진 악기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어떤 마을에 남자가 살았다. 남자는 유명한 악기장인이었는데, 어떤 여자를 사랑하여 그녀를 위해 많은 악기를 만들어냈다. 그 하나하나가 명품이라 음악인이라면 한 번쯤 연주해보고 싶을 정도였으며, 그 가치가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악기의 이름에는 남자가 사랑한 여자의 이름이 붙여져, 사람들은 그 악기들을 로베 시리즈라고 불렀다.
  어떤 마을에 어떤 여자가 살았다. 여자는 유명한 플루트 플레이어였다. 그녀에게는 특별한 악기가 있었다. 그 악기를 만들어준 사람 또한 그녀에게 특별했다. 그렇기에 그 악기는 그녀의 죄였고, 용서였으며, 사랑이었다. 여자는 그 악기를 가진 이후로 플루트를 그만두었다고 한다. 그녀의 집에서는 언제나 구슬픈 곡조의 연주소리가 들렸고 어떤 이도 그 악기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고 한다.
  로베는 오늘도 로베 시리즈의 마지막 번호를 가진 뿔을 연주한다. 이 울림이 지금은 곁에 없는 누군가에게 닿기를 바라며.

 

<END>
2016년 3월 8일의 파편

  • ?
    소설가J 2017.05.11 13:20
    와..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배경을 깊게 묘사하지도 않았는데 배경이 상상으로 쫘악 설정되면서 인물의 표정과 감정까지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필력이 정말 엄청나시네요.. 새내기 소설가로서 정말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결말도 감동이네요 인상 깊구요! 많은 작품 기대할게요! 응원합니다~!ㅎㅎ
  • ?
    epoh 2017.06.04 13:42
    감상평 감사드립니다. 뒤늦게 확인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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