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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틀의 레이드 공작가에서 아이가 한 명 더 태어났다. 이제 두 명의 아이를 가진 레이드 공작은 체면도 생각하지 않고 펄쩍 뛰었다. 이미 나이가 많아 아이가 제대로 태어날 지 의문이었지만 그런 걱정은 기우였다. 레이드 공작 부인은 지금은 은퇴했지만, 한 때는 여자의 몸으로 일류 기사단의 단장까지 했던 여자였다. 그런 사실을 방금 기억해낸 레이드 공작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아이가 태어난 후 이제 부인의 몸조리도 끝나자 레이드 공작은 조심스레 그의 아내와 얘기했다.

"이름을 뭐라 짓는 게 좋겠소?"
"라이나. 이 아이의 이름을 라이나로 짔는 게 어떨까요?"

- 부가설명 : 사실 왕족이나 귀족가의 자제 이름을 지을 때는 오랜 시간이 걸린답니다. 더군다나 공작가이니 어련하겠습니까? 하지만 설정으로 간단하게 지었습니다. -
새로 이름을 받은 라이나는 그의 아버지 얼굴을 보며 빙긋 웃었다.
아이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라이나의 오빠가 저 멀리서 뛰어왔다. 그리고 딱 라이나 앞에서 멈췄다.

"하루. 드디어 동생이 생겨서 좋겠구나?"

라이나의 오빠, 하루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호기심에 차있었다. 동생이 너무나도 귀엽게 생긴 것이다.

"하루야. 동생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나중에 볼 수 있잖니? 그렇다고 검술 수련 도중에 뛰쳐나오면 어떻게 하니."

그제서야 하루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하루를 보며 그의 아버지인 레이드 공작은 등을 토닥여줬다.

"괜찮아. 오늘만 봐주마."

하루는 그 말을 듣고 얼른 라이나의 옆에서 그 동생을 지켜봤다. 이제 나이 9살인 하루에게 태어난 동생인 라이나. 나이 차이가 9년이나 났다.

"이름이 뭐예요?"

하루가 계속 라이나를 보면서 레이드 공작에게 물었다.

"라이나 란다. 라이나. 이제부터 네 동생이니 잘 대해주렴."

하루는 여전히 호기심에 찬 눈으로 그의 동생을 보면서 작게 읊었다.

"라이나. 넌 내 동생이야. 그렇지?"

하루가 밝게 웃었다. 하루와 눈이 마주친 라이나도 어느새 빙긋 웃었다.

동생을 볼 수 있게 된 날부터 하루의 검술 실력은 날로 늘어갔다. 빨리 끝내고 동생, 라이나의 얼굴을 보러 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오늘 검술 선생님이 나보고 잘해주셨다고 칭찬해주셨어. 그래서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라이나. 너도 크면 내가 칭찬해줄게."

하루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못 알아들었는지 라이나는 해맑게 웃었다. 하루는 식사 도중에도 라이나 얘기, 친구들과 있을 때도 라이나 얘기, 문학이나 예술 수업을 할 때도 라이나 얘기를 했다. 검술 훈련도 물론 잘하면 빨리 갈 수 있다는 생각에 더욱 열심히 했다. 동생과 있을 시간을 벌고 싶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새로운 검술을 배웠어. 요즘 들어 내가 부쩍 실력이 늘었다고 하시면서 날 또 칭찬해주셨어."

하루는 라이나의 볼을 콕 찔렀다. 부드러운 아기의 피부가 좋았다. 하루는 라이나를 바라보다가 잠이 들어버렸다.
하루가 일어났을 때는 너무 늦게 일어났는지 해가 다 밝아있었다. 재빨리 검을 들고 뛰쳐나갔다. 검술 훈련에 늦자 선생님은 벌을 내렸다.

"하루. 지금부터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벌을 내리겠어요. 식사도 하시면 안 됩니다."

하루의 또래에게 가만히 있어란 벌은 굉장히 힘들었다. 가장 싫어하는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하루는 라이나를 보다가 자신이 늦었으므로 조용히 의자에 앉았다.
저녁에 하루는 일어날 수 있었다. 목과 다리가 후들거렸다. 앉아있는 것도 힘들었던 것이다. 하체에 쥐가 나서 제대로 걷지도 못했던 것이다.

"라이나. 오늘은 오랜만에 벌을 받았어. 하지만 너를 탓할 수는 없지? 내 잘못이었으니까. 만약에 네게 잘못이 있다면 그건 바로 네가 너무 귀여운 거야."

하루는 라이나의 손을 잡았다. 손은 작았다. 하루의 손에 비해서 너무 작은 라이나를 보면서 하루는 다짐했다.

"나는 꼭 너를 지켜줄게. 그러니까 더 열심히 수련할게. 더 열심히 공부할게."

하루는 다음 날, 아침부터 부지런히 설쳤다. 어제 검술을 하지 못했으므로 그 전에 배운 것이라도 해야했다. 그렇게 하루는 라이나와 있는 시간을 조금씩 줄여가면서 더욱 열심히 수련하고 공부했다.

"하루야. 더 이상 너에게 가르칠 것이 없구나."

어느 날, 하루가 선생님께 불려갔다. 그리고 이제 졸업해도 된다는 말을 듣자 하루는 기쁨과 슬픔이 동시에 교차했다.
이제 선생님과 대등해졌다는 것과 라이나를 더 볼 수 있다는 기쁨도 있었지만, 검을 좋아하는 하루에게는 수련을 혼자서 해야하고 친구들을 더 많이 볼 수 없다는 슬픔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졸업장을 든 하루가 교문을 나설 때, 그와 친했던 아이들과 모르는 친구들이 줄을 이어서 섰다.

"무슨 일이니."

하루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친구들은 모두 수련을 하다 말고 온 것이다.

"하루. 너에게 검술 대결을 신청한다."

한 친구가 하루에게 목검을 던졌다. 그걸 받은 하루는 친구들을 어리둥절한 표정을 봤다.

"나부터 간다!"

하루의 친구 한 명이 목검으로 횡베기를 하면서 하루에게 달려들었다. 하루는 여유롭게 피한 다음, 목검으로 그 아이의 목검을 내리쳐서 가볍게 승리했다.
이어서 10명을 이기고 나자 여학생들이 하루를 바라보며 각자 뭔가를 내밀었다.

"꼭 돌아가서 봐줬으면 좋겠어."

그렇게 말하고는 여학생들이 사라졌다. 하루 뒤에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진 친구들이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하루를 보고 있었다.

"왜 그래....."
"이 매정한 녀석. 우리를 그렇게 두고 가고 싶었어?!"
"맞아. 우리가 얼마나 너와 친했는데."

하루는 웃으면서 눈물 한 줄기를 흘렸다.

"바보 자식들. 너희가 우리 집에 오면 되잖아."

그들이 한꺼 번에 하루를 안았다. 하루가 버둥거렸다. 하지만 10명을 한꺼 번에 떼어낼 힘은 없었다.

"그래. 꼭 찾아가줄게. 우리가 졸업하면 다시 너에게 검술 대련을 신청하겠어. 그리고 이기겠어!"
"그래. 꼭 이겨줘."

하루의 눈에서 또 한 줄기의 눈물이 떨어졌다.


"오라버니? 여기서 뭐하세요?"

번쩍 정신이 든 하루는 살짝 젖은 눈을 비비며 옆에 있는 라이나를 쳐다봤다.

"어, 어? 라이나. 오늘은 무슨 일이니?"
"그냥 심심해서요."

라이나가 침대에서 다리를 흔들거리면서 말했다. 하루는 잠시 아련한 추억 회상을 그만두고 라이나의 옆에 앉았다.

"라이나. 너도 얼른 결혼해야지."
"오라버니를 두고 어떻게 먼저 결혼 하겠어요."

혼기인 라이나는 아직 어린 티가 남아있지만 그럭저럭 훌륭한 신부감이었다. 나이 17살에 아직 시집을 못 간 라이나를 걱정하며 하루는 한숨을 쉬었다. 하루도 이제 나이 26. 아이 한 명은 있을 나이였지만, 좀 더 있다가 결혼할 생각이었다.

"돌아가신 어머니, 아버지께서 하늘에서 오라버니 결혼하시기를 기다리고 계실 거에요."

하루는 안 그래도 젖은 눈동자를 다시 비볐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라이나. 넌 역시 내 동생이야."

갑자기 엉뚱한 소리를 하는 하루를 보고 라이나는 장난스럽게 미소지었다.

"그게 또 무슨 말이에요. 히히."

라이나와 하루는 같이 웃으면서 식사를 하러 갔다.

밝은 달을 보면서 하루는 추억에 잠겼다. 그 때도 오늘과 같이 밝은 달이 빛나는 때였다. 아름다운 그녀를 보면서 하루는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에 빠졌다. 하지만 이미 그녀는 없다는 생각을 하자 하루는 침울해졌다.

"오라버니. 날씨가 추워요. 들어오세요."
"조금만 더 있다가 잘거니, 먼저 들어가 자거라."

라이나는 추운지 재빨리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어디선가 악기 켜는 소리가 들린다. 아마도 라이나 일 것이다. 하루는 그 음악에 빠져들었다.
자주 듣지만 오늘따라 듣기 좋았다.
이 넓은 성에 사는 사람은 마치 하루와 라이나 밖에 없는 것 같았다. 그만큼 조용했다.
바로 옆에 있는 라이나가 악기를 켜고 있으니 마치 천사라도 되는 것 같다.

"라이나. 그런데 아직도 떠날 생각은 없니?"

악기를 켜다가 하루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하루 쪽을 보며 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금방 들을 수 있었다.

"아직....."
"그러니? 그렇다면 기다려줄게. 언젠가 마음이 바뀔 때까지. 그것이 비록 영원이라는 시간일 지라도."

달이 구름에 가리자 하루는 조용히 안으로 들어갔다. 라이나도 따라서 들어갔다.
침대에 누워서 부모님을 생각했다.
집은 무가(武家)였기 때문에 라이나도 물론 무술 같은 걸 배웠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악기를 다루는 시간이 훨씬 많았다. 그만큼 그녀에게 악기는 생명과 같이 소중한 것이었다.
하루는 몸도 뒤척이지 않고 눈을 감고 잠들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이 습관이 되었는지 하루는 눈을 떴다. 커튼을 제끼자 떠오르는 태양이 하루를 반겼다. 오늘 따라 훈련을 하지 않는 하루는 기지개를 켜고 간단하게 차를 한 잔하며 일출을 봤다.

"떠오르는 태양이라..... 마치 내가 태어날 때, 같군."

물론 하루는 자신이 태어났을 때를 알 수 없다. 하지만 그의 일기에 적혀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태어나는 날부터 일기를 쓰셨다. 그리고 첫장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나의 첫 아이, 하루. 이 아이는 태양이 떠오름과 동시에 세상과 눈을 마주쳤다.]
아직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일기장이였다. 그리고 아직도 하루는 이어서 쓰고 있었다. 벌써 엄청난 권 수를 자랑하고 있다. 따로 서재에 보관해둘 정도로.

"주인님. 잡상인이 찾아왔습니다만... 돌려보내시겠습니까?"

잡상인이라는 말에 호기심이 발동한 하루는 들여보내라고 했다.

"아. 감사합니다. 여기 있는 물건들이 바로 그 물건들입니다."

잡상인은 하루 앞에 있는 탁자에 물건을 쏟아냈다. 가히 엄청난 양이었다. 그 것들을 일일히 설명하는 잡상인.

"이건 유니콘의 뿔로 만든 것인데, 불면 소리가 아주 좋습니다요. 또 이건 드래곤의 이빨로 만든 검인데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걸 벨 수 있습니다요. 거기다 이건 드래곤의 비늘로 만든 갑옷인데 어떤 검이든 이 갑옷을 통과할 수는 없죠. 거기다 이건 공작님과 맞는 건 아니지만 매혹의 드레스 입니다. 이걸 입으면 어떤 남자든 안 넘어오질 않습니다요."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듣고 있던 하루는 속으로 웃었다. 그렇게 돈이 필요했던가, 하며. 웃음이 나와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잡상인은 하나라도 팔고 싶어서 그렇게 과장되게 하는 거겠지만 역시나 하루는 웃겼다. 그리고 다 설명해도 하루의 눈빛을 보고 안 살거라는 걸 알고는 스스로 물러나려 했다. 그런데 하루는 아직 하나 소개를 하지 않은 것이 있어서 그걸 물었다.

"이건 왜 소개하지 않소."
"이걸 어떻게 팔겠습니까."

하루가 가리킨 것은 그 물건들을 넣었던 주머니였다. 대충 가죽 보따리 같아 보였다. 거기다가 크기도 아까 이 사람이 말했던 드래곤의 비늘로 만들었다던 갑옷을 겨우 넣을 정도의 크기였다. 그런데 20가지 이상 물건을 넣는다는 것은 비정상이었다. 거기다가 주머니는 늘어난 흔적도 없었다.

"내가 사고 싶은 것은 그것이오. 금화 3개를 줄 테니 나한테 파시는게 어떻소."

하루는 그를 보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당황하면서 급히 물건을 안에 넣었다.

"그건 안 되는 말입니다. 이걸 팔다니. 그럼 이 물건들을 어찌 가져갑니까요. 절대로 안 됩니다."

그는 손까지 저어가면서 말했다. 하루는 일부러 뭔가가 생각난 듯이 옆에 있는 보석 상자에서 뭔가를 꺼내어 그에게 보였다.

"금화 30개 정도면 몰라도 어찌 팔 수 있겠습니까?"
"금화 30개라... 비싼데. 이걸로는 안 되겠소?"

하루가 내민 보석을 보자 그는 기겁했다. 그가 보기에도 그 보석은 금화 100개는 줘야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얼른 그 보석을 이리저리 보다가 붉은 빛을 내는 그 보석에 현혹되어 얼른 보따리를 내밀었다.

"알겠습니다. 드리겠습니다요."
"좋네. 그렇다면 이 물건들은 내가 마차를 줄 테니 거기다 실어가도록."
"정말 감사합니다요!"

그는 얼른 물건을 나르고 사라졌다. 그러다가 하루는 크게 웃었다.

"주인님. 왜 그러십니까?"

하루가 알 수 없이 웃자 그는 어리둥절했다. 그 보석은 자신이 보기에도 값비싸보였다. 겨우 보따리 하나와 바꾸다니, 머리가 이상해진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자네도 봤지 않은가? 그가 나에게 사기를 치려고 하는 것을."
"네. 봤습니다만...."
"그가 사기를 쳤다면 나도 사기를 쳐야겠지 않은가?"

비로소 집사는 어떻게 된 일인지 알고 덩달아 미소를 지었다. 하루에게 한 방 먹었을 잡상인을 생각하자 그는 웃겼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뭘 이런 걸 가지고."

하루는 막 내려오는 라이나를 보며, 어제 말했던 것을 다시 물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라이나는 아무 말 없이 대충 씻은 다음 밖으로 나갔다. 어딘가 가려는 모양이었다. 하루는 궁금한 마음에 얼른 그녀를 따라갔다.
성을 나가자 그녀는 주위를 살피며 조심스레 걸어갔다. 그리고 커다란 공터가 나왔다. 하루는 나무 뒤에 숨어서 그녀의 행동을 지켜봤다.

"오. 라이나. 오늘은 조금 늦었네."
"그래. 온. 오늘 너에게 중요한 이야기를 해주고 싶어."
"뭔데?"
"이제부터 너와 만나지 않겠어."

갑자기 온이란 청년의 얼굴이 굳었다. 라이나의 강건한 태도에 그만 굳어버린 것이다. 온은 평범한 농사일을 하는 청년이었는데 라이나와 사귀고 있었던 것 같다.

"나. 여기를 떠날 거야."

그 순간, 라이나의 말에 하루는 놀랐다.

"오라버니. 숨지 마시고 나오시는게 어떨까요?"

들키지 않을 줄 알고 따라왔는데 들키자 하루는 미안한 표정으로 나왔다.

"레이드 공작님!"

그는 급히 고개를 숙였다.

"오라버니. 이제 떠나겠어요. 오라버니와 함께."
"그래? 그것 괜찮겠구나. 온이라고 했나?"

하루의 말에 그는 벌벌 떨었다.

"라이나를 사랑하는 것은 아네. 하지만 자네와 신분이 틀린 이상,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어렵지만... 라이나와 깨끗하게 헤어질 수 없나?"

그리고 하루는 라이나가 보이지 않게 금화를 그에게 건넸다. 그는 잽싸게 금화를 받아들고 저 멀리 떠나버렸다. 그런 모습을 보며 하루는 씁쓸히 입맛을 다셨다.

"라이나. 봤지?"
".....네에."

그녀의 어깨가 축 처졌다. 그리고 눈물이 또르르 굴러서 떨어졌다.

"나는 어릴 때, 결심했지. 너를 지키겠다고. 그래서 나는 너를 지켰지. 만약에 저 청년과 네가 도망을 쳤더라면 아마 그는 너의 재산을 탐내면서 언젠가 너를 배신하고 떠나버리겠지. 그러면 너는 슬픔에 잠기겠지?"

하루의 말에 라이나는 더욱더 눈물을 흘렸다.

"괜찮다. 여행을 하면서 더욱더 사람들과 친해지거든 같이 평생을 같이 해줄 남자를 찾아보자구나. 그 때는 나도 결혼할 테니."

고개를 끄덕이며 라이나는 성으로 돌아가서 짐을 챙겼다.
마법 주머니에 그는 모든 일기들과 짐들을 넣은 뒤에 떠났다. 그 뒤를 이어서 집사는 성을 책임지고 있기로 했다.

하루와 라이나는 우선 근처에 세이틀에서 수도인 스레트 다음으로 크다는 도시인 카룰라이어에 도착했다. 카룰라이어는 무역도시로 유명했는데, 이 도시에 오면 항상 사람들로 북적거린다는 말이 맞다는 것을 실감했다.
잠깐 소개하자면, 세이틀과 반대편에 있는 나라에 오가려면 육로를 통해서 가는 방법과 해로를 통해서 가는 방법이 있는데, 육로를 통해서 가려면 문제점이 많았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비용도 많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해로를 열어서 다니게 된 것이다.
카룰라이어에서는 외국인도 많이 볼 수 있었다. 세이틀의 카룰라이어라고 하면 변방의 나라들은 대부분 알아줬다. 부유한 도시로 유명하기도 했던 것이다.
아무튼 귀족인 사실을 숨기며 하루와 라이나는 여행을 계속 했다.

"여기에서 우선 며칠 머물다 가자."
"네."

라이나는 하루의 의견에 대부분 찬성했다.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하루와 라이나는 여행 비용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 돌아다닌 끝에 시설도 괜찮으면서 비용도 그나마 적게 드는 여관을 찾을 수 있었다. 라이나는 지금까지 하루와 마주보고 잔 적은 있지만 완전히 다른 방에서 자본 적은 없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방 하나에서 같이 지내기로 했다. 그래서 라이나는 하루가 방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항상 악기를 연주하거나 책을 보면서 기다렸던 것이다.

"오랜만에 오라버니랑 같이 자네요. 히히."

라이나는 좋아하며, 방으로 들어갔다. 평소랑 너무 틀린 방이다보니 불편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오히려 이런 곳에서 자는 것은 그들에게 특별한 일이었으므로 기뻤다.

"우선 그 유명한 카룰라이어를 돌아볼까?"
"그러죠."

여행 비용은 충분히 들고왔다. 하지만 근검절약이 바로 하루가 언제나 지키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최고급 여관을 고를 수도 있었지만 싼 여관을 찾기 위해 걸어다닌 이유도 그 중에 하나였다.
카룰라이어에는 밤이어도 사람이 많다보니 시장 쪽에는 사람이 북적거렸다.

"우리 이런 곳 정말 오랜만이죠?"
"그래. 대충 6년 만인가?"

그 때 기억으론 그들은 몰래 성을 빠져나가 축제에서 즐기고 왔단다. 그 후에는 한 달간 외출 금지로 꽤 고생했지만, 그들에게는 좋은 추억거리였다.
라이나가 둘러보면서 악세서리도 사고, 옷도 사고 있었다. 하루는 시장을 돌아다니다 누군가를 발견하고 뛰었다. 그 누군가는 분명 그가 아는 사람이기도 했다. 긴 생머리를 늘어뜨리며 달리는 그녀를 보자 하루의 달리는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골목길로 그녀가 들어가자 하루는 그 골목길로 따라들어갔다.
그런데 허무하게도 아무도 없었다.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그저 어두운 골목일 뿐이었다. 하루는 환각을 본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지만 아래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보며 그런 생각은 접었다.

'언제부터 우리를 미행했던 거지.'

그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힘을 주어 끊어버린 후에 그 골목길을 나왔다. 라이나는 여전히 물건을 사느라 정신이 없었다. 뭔가 허전함이 하루에게 느껴졌다. 밝기는 하지만 하루에게는 한 없이 어두워보였다.
라이나가 물건을 다 사들고 와서, 하루는 그 물건을 들고 여관으로 들어갔다.  식사는 대충 여관에서 한 다음 잠시 밖으로 나왔다. 라이나는 이런 걸 좋아하는가보다, 하고 생각하는 틈에 하루는 또 뭔가를 봤다. 반대편 건물의 옥상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하루는 옥상으로 올라가 한 번에 다른 건물까지 도약하며 팔을 뻗었다. 하지만 잡히는 것은 공허함 뿐이었다. 털썩 떨어진 그는 주위를 둘러봤지만 보이는 것은 사람들이 분주한 그 시장 뿐이었다.

'어째서 미행하는 것이지.'

그의 기억으로는 그녀는 결코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라이나가 반대편의 옥상에 있는 하루에게 빨리 오라고 소리쳤다. 그녀의 표정을 보자니 빨리 가지 않으면 또 한 소리 들어야할 것 같았기에 하루는 그 자리에서 바로 뛰어 아슬아슬하게 건물에 들어갈 수 있었다.

"오라버니. 무슨 일 있어요?"
"아니. 그냥 헛것이 보여서."

하루는 잠을 자려고 누웠다. 그런데 그의 눈에 또다시 그녀가 보였다. 이번에는 놓치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나갔다. 이번에는 자신들이 있는 여관의 밑에서 그들을 보고 있었다. 하루가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녀는 도망치지 않았다. 사라지지 않았다.

"......"
"오랜만이군. 하루."

그녀의 말에 하루는 말을 잃었다. 그녀의 모습은 상당히 바뀌어있었다. 그녀가 항상 차고 다니던 검은 온데간데 없고, 볼에는 어떻게 난 상처인지 칼에 베인 자국이 있었다. 말투도 묘하게 바뀌어있었다. 다만 바뀌지 않은 것은 그녀의 기다란 머리카락과 그녀의 목소리였다.

"왜 그런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건가. 나와 만난 것이 그렇게도 싫은가?"

그녀의 표정에는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떠올라 있었다. 하루는 슬그머니 뒤로 물러났다. 그녀와 같이 있을 때도 저런 표정이 있은 후에는 항상 엄청난 일들이 벌어지곤 했다.

"아, 아닙니다. 그런데.....어찌 이런 곳에."
"당연히 너와 만나기 위해서지. 바보 같이 내가 챙겨주지 않으면 항상 수련을 빠뜨리기 일수인데다가, 아직 외적인 수련만을 계속 해대니까 제대로 된 길에 들어서지 못하는 거다. 바보 같이."

그녀는 혀를 찼다. 그녀는 어느새 하루의 옆에 와서 그의 허리에 있던 검을 빼앗았다.

"정신을 놓으면 안 된다고 그렇게 일렀거늘."

그녀의 말에 하루는 정신을 차리고 그 검을 되찾기 위해서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하루를 한 발로 간단하게 막았다.

"음.....그나마 손질은 잘 해놨군."

그녀가 검을 이리저리 보다가 다시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에게 던져줬다. 아슬아슬하게 받은 그는 그녀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아까 미행한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아니다. 나는 스토커가 아니니 그런 생각은 하지 말도록. 나는 그저 너희가 성을 빠져나왔을 때부터 따라다니는 것 뿐이다."

'그게 스토커잖아.'

하루는 속으로 욕을 하면서도 그녀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방금 욕했지? 뭐 상관 없어. 한두 번 그러는 것도 아니고. 아무튼 오늘 밤, 너에게 나는 하나를 전수해주고 갈 생각이다."
"전수?"

하루는 그녀의 말에 놀랐다. 그녀가 그에게 뭔가를 전수해준다는 것은 거의 세 번째만이었다.

"기를 다스린다고 하면 될까?"

그녀의 말을 듣고 하루는 그대로 정좌했다. 그녀는 그런 그를 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어두운 하늘, 그 아래에서 한 청년이 자신의 기를 보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후우.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스승, 아니. 사부님.'

청년은 하루였다. 약 두 시간에 걸친 강의를 듣고 실전에 옮겼다. 그리고 그의 기를 파악한 그녀는 바로 어떤 약을 먹였다. 잠시 뒤에 하루는 그 약의 효과가 생겼음을 깨닫았다. 그녀가 강의한대로 기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바보. 그럼 나는 이제 간다."

그 말과 동시에 그녀는 주위에 먼지를 잠시 일으키며 사라졌다.

"아직도 여전하시네요."
"어? 라이나. 다 봤어?"
"네. 저 몰래 빠져나가시다니. 너무 하시네요."

라이나는 볼을 한껏 부풀리며 불만을 드러냈다. 하루는 그녀에게 사과를 하면서 짐을 들고 바로 다음 방향으로 향했다. 그들이 가는 곳은 세인라이어라고 하는 무(武)의 도시였다.

세인라이어. 무의 도시답게 거대한 무술도장들이 즐비하게 서있었다. 그 도장들은 대부분 동양의 무술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이 쪽에서는 동양의 무술이 신기해서 들여오다보니 그게 한 도시에 집중되었다. 그 곳이 바로 세인라이어다.

"오라버니. 이런 곳은 안 들려도 됐지 않나요?"

라이나가 주위를 뚱한 표정으로 둘러봤다. 하루 자신도 오기 싫었지만 여기서 만나야할 사람이 있었다. 그의 사부를 만난 이상은.
하루가 변하지 않은 거리를 보면서 자신이 기억하는 거리를 찾아나갔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서 거대한 저택이 위치한 것을 봤다.

"저긴 어디죠?"

라이나의 물음에도 하루는 아무 반응 없이 그 저택의 문지기에게 말했다.

"루벤 님께 지인, 하루가 왔다고 전하라."

문지기는 고개를 끄덕이고 얼른 들어갔다. 얼마 뒤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 받았다. 하루와 라이나는 그 저택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들어가서 소파에 앉았다. 윗 층으로 이어진 계단에서 한 중년의 남자가 내려왔다. 그는 저택에 비해서 아주 간단한 옷을 입고 있었다. 비싸보이지도 않은, 그냥 흔한 옷들 중의 하나였다.

"오. 공자 님이 아니십니까? 아, 아니지. 이제는 공작이신가요? 하하핫!"

그는 호탕하게 웃으면서 마주보고 앉았다.

"옆은 공작님의 아내이십니까?"

그의 말에 하루는 손을 당황하며 손을 저었다. 라이나도 놀라서 얼굴이 붉어졌다.

"루벤 님도 참. 아직 저는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여기는 제 여동생인 라이나 입니다. '친'동생 입니다."

루벤이 그제서야 미안한 표정으로 일어나 고개를 숙이며 라이나에게 정식으로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장사를 하고 있는 루벤이라고 합니다."
"뭘요. 루벤 님처럼 잘 모르시는 분들도 있답니다."

라이나가 애써 붉은 얼굴을 지우고 어렵게 말했다. 루벤은 순식간에 웃는 표정으로 바꾸며 하루를 쳐다봤다. 무슨 용건으로 왔냐는 것이다.

"드디어 사부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오! 그렇습니까? 드디어 헤르시안느님께서 나서실 모양이군요."

나선다는 말에 하루가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헤르시안느는 그의 사부의 이름이다. 이 쪽에서 이름이 헤르시안느지만 그녀는 사실 동양에서 왔다. 주위에서는 그녀를 무술의 달인으로 부르고 있었다.

"나선다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모르셨습니까? 이건 정말 말씀드리면 안 되는데....."

루벤이 곤란한 듯이 우물쭈물했다. 하루가 탁자를 손가락으로 조금씩 두드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갈수록 루벤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그 것 좀 그만 하시죠! 헤르시안느님께서는 사실 마계로.....!"

그는 자신의 실수를 자책하며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하루는 싱긋 웃으면서 그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에휴. 정말..... 할 수 없죠. 사실 헤르시안느님께서는 마계로 가시게 됐습니다. 아마 마계에서 큰 일이 벌어졌는데 그게 헤르시안느님과 연관되었다는 사실을 들었었죠."

하루는 그 말을 듣고 기겁했다. 마계라면 분명 자신의 사부인 헤르시안느와 정반대의 성질을 지닌 존재들이 들끓는 곳일 것이다. 헤르시안느가 지금까지 마계와 반대된 성향의 기술을 보인 적은 없었다. 그렇다고 마(魔)와 연관된 기술을 쓴 적도 없었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는 마계를 정말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마계라니..... 그런 곳으로 사부님을 보내게 할 수는 없습니다!"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 헤르시안느님은 당신의 사부임과 동시에 제 사부이기도 하니까요."

그는 쓴 웃음으로 그들을 쳐다봤다. 라이나는 모르는 말들이 많았지만 그래도 헤르시안느가 위험에 처한 것은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저희도 사부님을 따라 마계로 가는 것이......"
"그렇게 생각해봤습니다. 하지만 마계로 가기 위해서는 고위 흑마법사의 힘을 빌려야하는데, 당신도 아시다시피 흑마법사는 보기 힘들고, 거기다가 고위라면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요즘 들어서 흑마법사 소탕이라는 이름으로 제가 아는 흑마법사는 모두 죽었습니다."

하루는 쥐고 있던 컵을 악력으로 깨어버렸다. 그의 손에서 피가 베어나왔다. 그의 사부가 만약에 마계로 간다면 영락없이 당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떡해서든 구해보는 것이 어떻습니까?"
"저도 얼마 전에 사병을 시켜 보냈으니 조금 있으면 연락이 올 겁니다. 그 때까지 기다리시죠. 그 전에 치료부터 해야겠고요."

하루의 손에는 유리조각이 박혀있었다. 그 조각을 하루는 간단하게 손으로 뺐다. 다행히 컵이 깨질 때, 작은 파편이 없었다. 대부분 커다란 파편이었다.

"정말.....사부님의 수제자다우시군요. 참을성이 대단하십니다. 하하하핫!"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그런 지독한 분 밑에서 배웠는데."

라이나는 대화에 낄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 둘의 표정은 행동과 달리 너무 심각했기 때문이다.
라이나와 하루가 다 씻고 자신들의 짐까지 내려놓은 다음에야 라벤의 사병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라벤님. 한 명 찾아내기는 했습니다."
"그래? 지금 어딘가?"
"이 곳은.....레이드 공작이라는 분의 영지입니다."

그의 말에 눈이 커졌다. 그러고보니 하루의 기억 저편으로부터 뭔가가 번뜩였다.
아직 라이나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그러니까 떠나기 1년 전에 그의 집사는 특이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요즘 제가 마법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라는 생각에 하루는 침을 꿀꺽 삼켰다. 흑마법사라면 대부분 성격이 포악하고, 마왕을 섬긴다고 알고 있다. 그리고 수준이 높아질수록 마계로부터 끌어들일 수 있는 마물의 등급이 높아진다. 마법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나 클래스와 서클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걸로 알고 있다. 흑마법사는 일반 사람들을 잡아서 생체 실험을 하는가 하면, 더 강하게 되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도 가리지 않고 행한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그의 집사가 흑마법사라고?

'마법을 배우면서 최근 현기증이 심해집니다. 하하'
'얼마 전에 새로운 마법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의 말들이 점점 떠오르자 하루는 점점 자신의 생각을 확신해갔다.

"거기서 크루라고 하는자가 흑마법사라고 합니다."

하루는 그 말을 듣고는 한숨을 쉬었다.

'그럴리가 없지. 집사가 흑마법사일리가 없어.'

"공작님 어떻게 할까요?"

통신을 끊으며 하루에게 물었다. 물론 하루는 돌아간다고 했다. 라이나가 겨우 온과 헤어지고 왔는데, 벌써 돌아간다니 불만이 많은 듯 했다. 하지만 자신의 오빠, 하루의 사부를 찾는다고 하니 할 수 없이 그냥 따라갔다.
가는 길에 위험한 일이 많아서 그들은 4일이란 시간이 걸려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

"집사. 오랜만이오."
"주인님. 빨리 돌아오셨군요."

그는 환하게 웃으며 그들을 맞이했다. 최근 들어 주름살이 한층 더 늘었다.
우선 성 안으로 들어갔다. 하인들은 여전했다. 변한 것은 없었다.
방 안에서 하루는 루벤과 차를 마시며 자신들의 사부를 찾으러 가려면 어떡하는 것이 좋을지 계속 말을 주고받았다. 그러다가 하루는 집사를 불렀다.

"얼마 전에 흑마법사를 찾으러 왔다는 자가 있었나?"

집사는 한참 생각했다.

"네. 있기는 했습니다. 수상해서 쫓아보내기는 했습니다만....."

루벤의 사병은 돌아오지 않았었다. 단독으로 행동하면 늦어도 하루면 도착할 거리였다. 그런데도 돌아오지 않았다니. 그 흑마법사를 만나고 당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 이 부근에 흑마법사가 있소?"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것 같습니다. 아! 그러고보니 오늘이 바로 그 흑마법사가 나타나는 날이군요. 이틀에 한 번씩 나타나는데 아무 피해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도 그렇게 싫어하는 기색은 아닙니다."

하루는 밤에 그 흑마법사가 오면 찾아갈 생각으로 잠을 자지 않고 기다렸다. 그의 옆에는 라이나가 깊히 잠들어있었다.
달이 밝게 빛을 내는 밤이었다. 루벤과 하루는 방을 빠져나왔다. 성 내부는 조용했다. 그런데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아랫 층에서 나는 소리였다. 하루의 눈에 비친 것은 은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검은 피막 날개를 한 사람이었다.

"주인님이십니까? 크크크크크큭."
"지, 집사. 지금 무슨 일이오!"

집사의 밑에는 하녀가 겁을 먹은 표정으로 있었다. 하루를 보더니 기어서 그의 옆으로 피했다.

"아름답게 빛나는 달. 제가 성을 나가지 않은 이유를 아십니까? 당연합니다. 이 성에 있는 하녀들의 피를 빨아먹으면 되니까 그런 겁니다. 크흐흐. 그리고 로벤. 당신의 사병은 제가 피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빨았습니다. 이미 이 성의 끝에 쳐박혀있으니 다음에 찾아가시길 바랍니다. 아. 찾아가실 수 있으면요. 크하하하하!"

집사의 표정이 사악하게 변했다. 그리고 집사는 자신의 손가락을 깨물었다. 피가 그의 손가락에서 줄줄 흘러나왔다. 십 몇 분간을 그는 피를 흘렸지만 마치 피가 계속 생겨나는 듯이 웃고 있었다. 로벤과 하루는 계속 경계했다. 언제 공격할 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랬다. 그의 피는 결국 그들의 밑에 있는 카펫을 모두 적셨다. 그러자 그 카펫에 이상한 마법진이 생겨났다. 알 수 없는 글자들로 빼곡 했다.

"이 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십니까? 제가 당신을 밀어내고 공작이 되는 날을."

그리고 옆에 있는 계단에서 눈을 비비며 내려나온 라이나가 카펫을 밟는 순간 그들 셋은 모두 마계로 이동 당했다. 그리고 하녀를 포함한 세 명은 모두 마계로 가버렸다. 그 집사의 모습이 점점 변해가더니 이내 하루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럼 안녕히 가시죠. 주.인.님."

그는 조용히 하루의 방으로 들어갔다.

천천히 눈을 뜬 하루는 달빛을 받고 일어났다. 주위는 밤이었다. 마계이니 어련하겠냐 했지만 이렇도록 어두울 줄은 생각도 하지 못한 것이다. 옆에 쓰러져 있는 루벤과 하녀, 라이나를 깨웠다. 달빛이 있어서 볼 수 있었다. 아니었으면 하루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루 님. 도대체 여기는....."
"마계인 것 같습니다."

루벤은 고개를 푹 숙였다. 흑마법사를 찾으러 다니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엄습해왔다. 하지만 사부를 찾아야한다는 생각에 얼른 생각을 고쳤다. 그는 하루를 쳐다봤다. 아직 청년인 하루의 눈빛은 반짝였다. 분명히 사부를 찾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럴 것이다. 하루보다 빨리 기(氣)를 깨우쳐 지금 검기까지 사용할 수 있는 단계지만, 마계에서 이겨나가려면 그런 것 가지고는 택도 없었다.

"오라버니. 무서워요."

라이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녀도 덩달아 떨고 있었다. 하루는 그 둘을 우선 살짝 안았다. 하녀가 순간 얼굴을 붉히며 떨어지려고 했지만 하루가 막았다.

"이번만은 괜찮습니다. 새로운 세계에 적응하려면 우선 서로 감싸줄 줄 알아야하니까요."

저 멀리서 늑대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하루는 경계했다. 검을 뽑았다. 루벤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이번에 늑대는 혼자인 것 같았다. 점점 늑대의 울음소리는 커져만 갔다.

우우우우우우우우-

길게 울리는 늑대의 하울링이 다가왔다. 그런데 그들은 놀라서 검을 떨어뜨릴 뻔 했다.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책으로만 보던 웨어 울프였다. 두 발과 두 손으로는 엄청난 길이의 발톱이 자라있었다.

"루벤. 오랜만에 호흡 맞춰볼까요?"
"좋습니다. 파트너."

그의 말과 동시의 그들이 앞으로 달려나갔다. 웨어 울프의 기다란 발톱이 그들을 공격했다. 마치 모든 것을 베어버릴 것 같은 그 발톱에 소름이 끼쳤다. 하루의 검이 웨어 울프의 사각(死角)으로 이동하여 횡베기를 시도했다. 하지만 웨어 울프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여 하루를 덮치려고 했다. 그 순간을 노리고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루벤이 횡베기와 종베기를 연속으로, 그러니까 십자 베기를 했다. 그의 검에 웨어 울프의 등에는 선명하게 상처가 남았다.

"쳇. 아직 피니쉬가 남았었는데."

루벤이 아쉽다는 듯이 검에 묻은 피를 털어버렸다. 웨어 울프는 상처 때문에 분노의 하울링을 내었고, 엄청난 속력으로 루벤을 공격했다. 거대한 몸이 달빛을 등지고 빛나는 순간! 하루의 검에서 푸르른 검기가 생기면서 찌르기로 웨어 울프의 왼쪽 가슴의 아래를 찔렀다. 웨어 울프의 반사 신경으로 다리에 걷어차인 하루가 공중으로 튕겨 올라갔다가 떨어졌다. 하루의 검이 웨어 울프의 심장에 박힌 채로 있었다. 괴성을 지르면서 날뛰는 웨어 울프를 향해서 루벤은 정면에 나섰다. 그의 얼굴에는 상황에 맞지 않게 웃음이 번졌다. 웨어 울프가 그를 향해서 발을 휘두르자 루벤의 검은 검기를 머금고 웨어울프에게 십자 베기를 했다.
심장에 검이 꼽히고도 저 정도로 날뛸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한지 하루는 쓰러진 상태에서도 호기심에 찬 눈동자를 하고 있었따.
십자 베기에 움직임이 둔해진 웨어 울프가 그대로 당했다. 잠시 경직된 사이에 루벤의 검이 다시 한 번 심장 쪽으로 찔렀다. 검기를 머금어서 그런지 웨어 울프의 심장에 있던 세포들이 괴사(壞死)했다. 그리고 바로 거대한 몸집을 한 웨어 울프가 쓰러졌다. 미처 피하지 못한 루벤이 깔리려고 했으나, 하루가 일어나서 웨어 울프에게 숄더 어택을 가했다. 옆으로 쓰러진 웨어 울프를 향해서 승리의 미소를 지은 루벤과 하루는 하이파이브를 했다.

"마지막 숄더 어택이 절 구했군요. 감사합니다. 파트너."
"별 말씀을."

하루의 손을 잡고 일어난 루벤은 두 자루의 검을 빼서 피와 털을 닦아냈다.
이제 그들의 눈 앞은 어둠이 닥쳐왔다. 마계에 오자마자 저런 강한 마물이 웨어 울프를 만났으니 이제는 더 강한 마물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하루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사부를 구하기 이해서는 몸도 던질 하루였으니까.
얼떨결에 딸려온 라이나는 잠옷차림으로 하품을 했다.

"오라버니. 잘 곳은 없나요."

마계에서 잘 곳을 찾는 라이나를 보던 하루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아직 잠이 덜 깼군.'

웨어 울프와 잠시 싸운 루벤과 하루는 어느새 자신들의 몸이 땀에 흥건히 젖어있다는 것을 알고 잠시나마 다시 웃을 수 있었다. 그만큼 긴장했다는 뜻이다.

"세니. 라이나. 얼른 서두룹시다. 아무리 마계라고 인간이 살고 있으니 머무를 곳은 있을 것이오."
"네. 현명하신 생각이예요."

'과연 현명한 생각일까?'

루벤은 생각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이 마계에서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모른다. 우리의 판단이 섣불렀거늘, 어찌하여 저렇게 여유로울 수 있단 말인가.'

루벤은 몰랐지만 하루에게는 마계가 썩 낯설 지 않았다. 그건 자신도 몰랐다. 왜냐면 그건 그의 운명인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들의 발걸음은 점점 느려졌다. 배고픔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이 황량한 벌판을 무조건 걷는다고 사람들이 나올 것이라는 장담도 못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여행 준비도 식량을 준비해놓은 것은 다행이었다. 마계에도 나무가 있었기 때문에 힘들게라도 불을 지폈다.

"후훗. 루벤. 드디어 뭔가가 보입니다."
"네에?!"

루벤을 불렀지만 오히려 하녀인 세니와 동생인 라이나가 더 빨랐다. 그들의 눈에 비친 것은 평범한 마을이었다.
하루가 그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마계인, 즉 마족들이 경계태세에 돌입했다.

"하아- 이거 곤란하게 됐군."

주위에 창을 들고 경계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루들은 당황했다. 이 상황을 어떻게 넘겨야할지 몰랐던 것이다. 그러던 중에 루벤이 먼저 말을 꺼냈다.

"혹시 우리 말을 할 줄 아시오?"

루벤의 말에 그들이 술렁거렸다. 아무도 못 알아듣는 듯 했다. 그러다가 어떤 사람이 입을 말했다. 떠듬거리기는 해도 확실히 우리 말이었다.

"아....저....당신....들은 어디?"

말이 잘 안 맞긴 했지만 알아들을 수는 있었다. 하루는 안도의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저희는 중간계에서 왔습니다."
"중간...계? 여기는...마계."

그가 알겠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고 얼른 달려갔다. 그리고 한 노인을 끌고 왔다. 노인은 하루들에게 고개를 먼저 숙였다. 그가 입을 열었는데 유창한 우리 말이 나오자 놀랐다.

"중간에서 오셨다니. 반갑습니다. 저는 이 마을의 촌장을 맡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중간의 인간을 봅니다. 하하."

그는 미소를 지으며 손짓을 했다. 그러자 창을 든 이들이 모두 고개를 숙이며 창을 거두었다.
하루는 도박삼아 촌장에게 사부의 물어봤다.

"음.....긴 검은 머리에, 여자. 거기다가 무술을 잘 한다면. 아! 그래! 생각났습니다. 얼마 전에 머물다가 가신 분이군요."
"어디로 가셨습니까!"

하루는 급했다. 만약에 자신의 사부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아마 마왕님을 만나러 가지....."

루벤이 촌장의 어깨를 흔들었다. 그도 당황한 것이다. 마왕이라니.....

"진정하십시오."

촌장의 말에 잠시 흥분했던 마음을 가라앉힌 루벤은 뒤로 물러났다. 촌장은 기침을 하면서 조용히 숨을 가다듬었다.

"그 길로 가려면 며칠을 걸어야 합니다. 괜찮습니까?"

하루와 루벤은 그들의 사부를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상관없습니다. 사부님을 찾는 길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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