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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 냄새가 나는 아침이다.
 차가운 수돗물이 얼굴을 적셨다. 코끝에서 맴돌던 야릇한 냄새가 사라졌다. 기계적으로 얼굴에 물이 닿았다 떨어졌다. 시원하다. 지난날의 모든 낡은 것들이 씻기는 느낌이다. 먼 옛날에 아담과 이브가 지었다던 원죄마저도. 수챗구멍으로 물이 흘러내려 가다가, 소리도 없이 멎었다.
 수건으로 얼굴을 닦다가 거울에 비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앞머리까지 젖었잖아. 칠칠맞고 섬세하지 못한 남자다. 머리카락에 맺혀 있던 물방울이 한 줄기 물이 되어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다. 문득, 정말로 뜬금없이, 소름이 돋았다. 거울 속의 남자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멀뚱멀뚱하게 쳐다봤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오한이 나면서 온몸이 떨렸다. 수건을 잡은 손이 주체할 수도 없을 만큼 심하게 떨려 수건이 바닥에 떨어졌다. 나는 싱크대를 부여잡고 서서, 떨림을 진정시키려고 애를 썼다. 소용이 없었다. 고개를 들어 마주한 거울 속의 남자는, 측은스러울 정도로 심하게 떨고 있었다.
 화장실에서 나온 뒤에서 몸의 떨림은 좀처럼 멎지를 않았다. 그 정도는 줄어들었지만, 떨리는 것은 여전했다. 나는 팔로 무릎을 감싸고 앉아서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발에 무언가 딱딱한 것이 와 닿았다. 리모컨이었다. 영문 모를 떨림 때문에 아침을 완전히 망쳐버렸는데, 리모컨까지 말썽이라니. 나는 신경질이 나서 리모컨을 차 버렸다. 갑자기 TV가 켜졌다. 리모컨이 어디 부딪치면서 전원이 눌린 모양이었다. 여자 아나운서가 낭랑한 목소리로 '이어서 다음 소식입니다.'하고 말했다. 아마 뉴스인 모양이었다. 나는 아나운서가 제멋대로 뉴스를 읽게 내버려둔 채 머리를 다리 사이에 파묻었다.
 그리고 다시, 순간적으로 어떤 얼굴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그다음에 갑자기 심장이 요란하게 뛰기 시작했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마치 한참 운동하고 난 뒤에 느껴지는 박동 같기도 했고, 흥분했을 때 느껴지는 박동 같기도 했으며, 갑자기 상황이 변해 놀라서 느껴지는 박동 같기도 했다. 이게 무슨 박동이건 간에, 나는 한 남자의 얼굴을 떠올리려 애썼다. 이유 모를 떨림과 갑작스러운 심장 박동, 낯설지 않은 한 남자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어지러이 얽혔다.

 "……이어서 다음 소식입니다."

 그 남자가 누구길래? 내가 알고 지내던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그 눈. 섬뜩하리만큼 생생한 두 눈이 자꾸만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어제 저녁 오후 9시경에 서울에 있는 모 아파트에서 40대 남자가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어디서 봤지? 지인? 이웃? 아니면 스쳐 지나가다 만난 사람인가?

 "……살해 방법이 앞서 4월부터 발생한 세 건의 사건과 동일하다는 점에서 경찰은 동일범의 소행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습니다."

 나는 고개를 홱 쳐들었다. 목소리와 똑 닮게 생긴 여자 아나운서가 중앙에 앉아 있었고, 화면 오른쪽 구석에 장소를 분간하기 힘든 흐린 사진과 '어젯밤 40대 남성 숨져'라는 글이 있었다. 흐릿했지만 주택가는 아닌 것 같았고, 꼭…….
 몸의 떨림이 멈췄다. 머리 위로 비가 쏟아지는 기분이었다.
 그것은 비 내리던 어젯밤의 일이었다. 나는 쓰레기를 버리기 위해 쓰레기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비옷을 입고 양손에 쓰레기 봉투를 하나씩 든 채였다. 내가 쓰레기장 근처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두 사람이 서 있었다. 둘 다 나에게서 등을 돌리고 서 있었다. 한 명은 비옷을 입었지만 다른 한 명은 그대로 비를 맞고 있었다. 아마 우산을 쓰고 온 듯, 그의 발치에서 우산이 나뒹굴었다. 나는 그가 왜 우산을 줍지 않고 그대로 비를 맞고 서 있는지 의아했지만 나와 관계없는 일이었기에 그냥 지나치려고 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들의 앞에는 귀퉁이가 깨진 전신 거울이 하나 있었다. 그 말인즉슨, 내가 거울 속의 그들과 눈이 마주쳤다는 말이다. 그들이 나를 봤는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나는 그들을 똑똑히 봤다. 비옷을 입은 남자가 다른 남자를……찌르고 있었다. 피였는지 비였는지 남자의 이마에서 한 줄기 액체가 흘러내렸다. 거울 속에서 비옷을 입은 남자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는 쓰레기고 뭐고 다 내팽개치고는 미친 듯이 집으로 뛰쳐 들어왔다. 그리고 나서의 일은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아마 극도의 불안 상태에서 어렵게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오른쪽 구석의 흐린 사진은 쓰레기장을 찍은 사진일 것이다. 어젯밤에 비옷의 사내가 한 남자를 찔러 죽인 곳. 그러니까……내가 살인마의 얼굴을 본 것이다.
 더 이상은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더는 떨리지 않는 손으로 수화기를 들고 1-1-2번을 눌렀다.

 "네, 서울경찰서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경찰서에 전화해 본 것은 난생처음이었는데, 예상외로 싱거웠다. 살인 사건의 목격자라고 밝히니 담당 형사와 몇 마디를 나눌 수 있었다. 언제 봤느냐, 어디서 봤느냐 그런 것들을 묻더니 서로 와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대단한 반응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수화기를 내려놓은 순간 맥이 빠지는 기분을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거리에서 아무 택시나 잡아타고 경찰서까지 가달라고 부탁했다. 택시 기사가 나를 이상한 눈으로 보지 않을까 했지만 그런 일조차 없어서 더욱 맥이 빠졌다. 목격자가 있으면 살인범이 얼마나 빨리 잡힐까. 하루? 이틀? 아니면 일주일? 적어도 한 달이나 그 이상의 시간이 필요할까? 싱겁기 그지없는 일이다.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이 제법 많았다. 휴일이라서 그런지 거리에 나와 있는 사람의 수가 평소보다 많은 것 같았다. 저 사람들은 이 근처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는 것도 모를 것이다. 신호등에 걸려 택시가 멈춰 섰다. 이제 이 택시는 경찰서로 갈 것이고 내 평범한 일상에 끼어든 작은 모험은 곧 끝날 것이다. 정말 이대로 끝일까? 뭔가 석연찮은 점이 있었다.
 이를테면 그 얼굴. 그 얼굴이 마음에 걸린다. 낯익은 얼굴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4,500원이요."

 택시 기사가 다소 퉁명스럽게 말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5,000원을 쥐여주고는 택시에서 내렸다. 기사가 거스름돈을 내어주기도 전에 문을 닫았다. 나를 이상한 사람 보듯 바라볼 기사의 얼굴을 상상하니 절로 웃음이 났다. 택시 기사가 살인범인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우스운 일이다. 사람들은 왜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택시 기사를 믿고 기꺼이 밀폐된 좁은 차 안으로 들어가는 걸까? 실없는 생각이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경찰서에 들어선다.
 담당 경찰이라는 사람을 만나서 어젯밤에 봤다고 생각한 것을 전부 이야기했다. 그는 내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더니 몽타주를 그리는 사람에게 나를 안내했다. 경찰관은 나에게 범인의 인상착의를 물어봤고 나는 기쁜 마음으로 알려줬다.

 "젊은 남자인듯했습니다. 20대 정도?
  머리는 검은색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두워서 잘 기억은 안 납니다만.
  얼굴은 동그란 편이었어요.
  키는 한 176cm 정도 되어 보였습니다. 자세히는 알 수 없었지만 대충 그 정도일 겁니다.
  체구는 보통 수준이었습니다. 오히려 좀 말랐다는 느낌입니다.
  겉에는 투명한 비옷을 입고 있었고, 속에는 흰색 반팔티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습니다.
  아뇨, 코는 이렇게 생겼습니다. 좀 더 눌린 느낌입니다.
  네, 눈이 약간. 눈 사이의 간격이 더 좁습니다.
  머리 모양은 무난한 편이었습니다. 아뇨, 좀 더 차분하게, 예.
  귀는 약간 작은 느낌이었습니다. 귀걸이는 안 했습니다.
  입은 작은 편입니다. 그보다는 더 둥글 겁니다.
  감사합니다."

 경찰관이 미심쩍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러니까……저렇게 생겼단 말씀입니까?"

 경찰관이 가리킨 것은 거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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