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장
2013.10.31 21:06

<단편쓰기대회!-3회>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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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ㅅ'-3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날이었다. 민재는 턱을 괴고 잘 닦여진 창 밖을 내다보았다. 


타닥. 타닥. 비오는 소리가 창문을 때렸다. 


민재는 항상 같은 시각에 같은 자리에 앉아, 늘 마시던 차를 마신다. 


민재가 이 거리로 이사 온 지도 벌써 3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났다. 한 자리에 앉으면 몇 년이고 그 곳에만 앉는 습성 때문에, 민재는 이 새로운 거리에서 마음에 쏙 드는 자리를 찾아 한 달 가까이 갖은 카페를 전전하며 다녔다. 몇 년 단골이 될 손님이라는 걸 알아보지 못한 사장님들이 내놓은 로스팅한지 오래된 원두향이 풍기는 커피, 지저분한 방석, 오래 앉아있는 손님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시선. 그 모든 것들을 피해 고르고 골라 겨우 찾아온 자리가 바로 이 '카페같은다방'이었다. 


드라마 대본을 쓰지만, 언제 작가라는 타이틀을 달 수 있을지는 모를 노릇이다. 단편은 <이웃집 김치찜>과 <죽지마>로 수상을 하고, 실제로 작품으로 만들어진 적도 있지만, 아직 장편은 차선에도 들어본 적이 없다. 대학 문턱도 못 밟아본 네가 무엇을 하겠느냐며 비웃는 부모님의 말에, 단호히 짐을 싸 집을 나왔다. 


민재가 노리고 있는 것은 이번 년도 마지막 분기의 가장 큰 드라마상인 KBS드라마 각본상. 그 상에 대상으로 입상한다면, 입상한 작품이 즉각 미니시리즈로 계약되는 것은 물론이고, 차기작의 계약도 손쉽게 노려볼 수 있게 된다. 


대부분의 드라마 각본가들의 출세가도는 KBS드라마 각본상의 입상에서 시작된 것이다.


"민재씨, 전화왔어요."


멍하니 빗방울에 정신이 팔린 민재의 등을 스누피를 닮은 후덕한 사장님이 툭툭 건드렸다. 


"아, 네! 매번 감사합니다."

"뭘요, 저야말로 이렇게 파리 날리는 가게에 매일같이 와주시는 VVIP고객님께 절이라도 해야죠."

둘은 주거니 받거니 서로를 치켜세웠다.


3년 동안 추석 당일과 설날 당일을 빼놓고는 매일같이 만난 사이다. 마누라와 함께 있는 시간보다 민재와 함께 있는 시간이 더 많다며 김사장은 농을 하곤 했다.


민재는 핸드폰을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자신이 어디에 있든 아랑곳하지 않고, 상대방의 의사에 따라 울려대는 전화벨이 그렇게 불편할 수가 없었다. 보이지 않는 쇠고랑이라도 하나 차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 덕분에 민재에게 연락하고 싶은 이들은 꼬박꼬박 이 까페로 연락을 해 민재를 찾는다. 처음엔 낯설어하던 사람들도, 이제는 당연히 정해진 시각에 그 곳에 민재가 있으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고 전화하게 되었다.


"여보세요."

"그래, 엄마다. 또 까페에 틀어박혀 있는 거냐? 멀쩡한 집은 뭐에 쓰려고?"

엄마의 목소리. 


도리를 다 하지 못하고 있다는 죄책감. 내 길을 내가 가겠다는데 왜 내가 죄책감을 가져야 하지? 하는 반발심. 그리고 끝내 입에 올리지도 못할 미안함.

민재는 숨기지 못할 감정들 때문에 되려 퉁명스러워졌다.


"무슨 일이세요?"

"이번에 SBS에서 서바이벌 단편 작가 프로그램 같은 걸 만든다더라. 작품만 내면 되고, 작가는 10인이 결정되기 전까지는 방송에 얼굴을 안내밀어도 된다니 괜찮지 않니?"


민재는 허탈한 웃음을 속으로 삼켰다. 그런 이야기 쯤은 신문에서 한 달 전에 들었다. 마음이 내키지 않았을 뿐이지.


"엄청 크게 홍보한데다, 거기에 등장하는 배우들까지 같이 콘테스트해서 뽑는다더라고. 마감까지 한 달 남았다고 영주 엄마가 말해주더라고. 이거 해보면 어떠니? TV에도 나오고? 응?"


"엄마, 저 장편 쓰고 있다고 했잖아요. 그런 콘테스트에 참가하면 얼마나 스트레스가 큰 줄 아세요? 거기다 1등이 아니면 어차피 상금도 없잖아요. 그런 곳에 쟁쟁한 작가는 죄다 참가할 텐데, 어떻게 일등을 해요? 그런 시간이 있으면 쓰던 글 한 자라도 더 쓰는 편이 나을 거에요."


"됐어요."


그냥 네, 알았어요. 한 번 해볼게요, 하고 입에 발린 말 한 마디면 그냥 조용히 넘어갈 줄 알면서도.


"엄마, 올해까지만. 올해까지만 내 마음대로 하겠다고 했잖아요. 올해도 안되면, 정말 이게 내 길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접을게요. 그러니까..."


수화기 너머로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알았다. 꿈으로 먹고 살 나이는 한참 전에 지났는데도 그렇게 고집을 피우는구나. 내가 널 몰라? 매일 다섯 장 쓰고 집어치우고, 다섯 장 쓰고 찢어발기고. 진득하게 장편을 써 본 적도 없으면서. 너 그렇게 집 나가고 네 방의 정신없는 책꽃이를 싹 다 정리했다. 몇 개 집어 읽어봤는데, 모조리 앞페이지 몇 장 쓰고 말았더구나. 그런 것만 책꽃이 하나 가득! 그러면서 자꾸 우길래?"


민재는 얼굴이 다 붉어졌다. 엄마가 제 글을 읽었다고 생각하니, 짜증과 부끄러움이 뒤섞여 속이 부글거렸다. 


"그것들은 다 내다버리세요."


홧김에 속에도 없는 말을 했다.


"버려?"


하지만 아들의 속도 모르고, 엄마의 목소리에는 화색이 돌았다. 늘 책꽃이를 차지하고 있는 쓸모없는 습작들이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네, 이제와서 새로 들춰보지도 않을 것 같은걸요. 버리세요."

"정말 버린다?"

"네."


엄마는 수화기 밖에다 뭐라고 외쳤다. 집 일을 도와주시는 아주머니께 내다버리라는 말을 당장 하고 싶으신 모양이었다.


"결혼 생각은 아직도 없고?"

"알아서 할게요. 말씀드렸잖아요, 올해까지는..."

"그래, 아휴, 내가 말을 말아야지. 누굴 닮아가지고 저리 고집이 세?"


민재는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대꾸할 말이 없어 하지 않는 게 아니었다. 


"네, 엄마. 들어가세요."

"그래."


기껏 생각해서 전화했는데, 기대하지 않은 반응에 마음이 상한 모양이다. 엄마는 시큰둥하게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다시 노트와 볼펜 하나를 단촐하게 올려놓은 전용석으로 돌아왔다.


집에서 나오기만 하면 어떻게든 억지로라도 글을 쓸 수 있게 되는 버릇은 여전해서, 갖가지 구상으로 스토리도 여럿 짜 두었다. 하지만 그 중 하나를 골라 대본을 쓰기 시작하면, 엄마가 말한 것처럼 다섯 장 쯤 쓰다보면, 이 이야기가 과연 매력적인 이야기일지. 심사위원이 보아도 민재 자신이 보는 것 만큼 잘 짜여진 이야기일지, 그런 의심이 가득 차 펜을 더는 놀릴 수 없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엄마와 전화를 하고 나면 늘 그렇듯, 민재는 마음이 착 가라앉았다.


한창 쓰고 있던 원고를 내려보았다.


200지 원고지의 오른쪽 위 모서리에 p.5라는 숫자가 박혀있었다. 민재가 생각하는 분기점이다. 여기부터 더 쓸 거라면, 정말 이 작품은 의미 있고, 누구의 눈에 띄여도 훌륭한 것이어야만 한다는 갈래길.


"이것도 아닌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민재는 원고지를 반으로 접어버렸다. 


이번 스토리는 자신있다고 생각했었는데, 돌덩이라도 삼킨 심정이 되어 다시 보니 이것을 쓰려고 몇 일을 앉아있었나 싶은 생각이 비죽이 들었다.

탁.


오늘은 더 이상 글을 쓸 기분이 아니었지만, 민재는 처음 이 까페의 이 좌석에 앉기로 결심한날부터 스스로에게 약속한 바 있었다. 아침 열시부터 오후 여섯시까지는, 이분이 좋건 나쁘건, 글이 잘 풀리건 한 글자도 쓸 수 없건 간에 원고지와 씨름해보기로.


그 날은 내내 허탕이었다. 




 


 


'ㅅ')~


 

 


꿈을 꿨다.

기억나는 부분은 얼마 되지 않는다.

퍽 시끄럽고 장황한데다 등장인물도 많은 정신없는 꿈이었다. 

딱 하나 기억에 안는 건, 엉덩이에 닿도록 길게 머리를 기른 여자의 이미지였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가, 새삼 그 여자의 얼굴을 살펴보자 달걀귀신마냥 눈코입의 윤곽이라곤 없는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ㅅ'





"아줌마, 여기 이것들 다 정리해주세요. 그 일만 끝나면 오늘은 퇴근하시구요."


아주머니는 앞치마에 양 손을 닦으며 수북히 쌓인 노트와 원고지들을 바라보았다.


"하이구, 이것들 다 아드님이 쓰신 것들 아닙니꺼? 이렇게 막 버려도 되는감요?"


민재 엄마는 허공에 손사레를 쳤다.


"아들이 제 입으로 버리라고 했을 때 얼른 버려야 되요. 정말 제 아빠를 닮아서 물건을 못 버리는 건 똑같다니까. 민재 아빠도 젊을 때 공부하던 손사전이며 뭐며 이것저것을 버리지도 않고 쌓아두고 있다니까요. 어이가 없어. 요즘 누가 손사전을 써요?"


아주머니는 어설픈 웃음으로 맞장구를 치고 노트며 원고지를 박스에 차곡차곡 정리해 담았다. 마침 폐지를 수집하는 날이었다.

 


 


`('ㅅ')~ ~('^')`


 



 


민재가 악몽 끝에 겨우 눈을 뜬 건 이불이 움직이는 기척 때문이었다. 

쥐? 강아지? 세상 모르게 잘 때는 몰랐던 체온을 가진 무언가가 제 가슴 위에 놓여 있다는 사실에 소름이 쫙 끼쳤다. 


아직 사방이 어두운 새벽이었다. 질겁하며 미지근한 그것을 떨쳐내고 일어나 형광등을 밝혔다.


사람이었다.

그것도 여자.

아주 아름다운 나신의 여자.


어라, 어라, 어라. 어떻게 된 거지? 


민재는 벽에 등이 닿을 때까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차가운 벽은 생각을 진정시켜주지 않았다. 태연하게 잠들어 있는 여자에게서 눈을 땔 수도 없지만, 빤히 바라보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얼굴이 불이라도 붙은 양 화끈거렸다.


저기요, 하고 말을 걸어 볼까?


이런 상황이라면 백이면 백, 천이면 천 범죄자가 되는 건 민재의 쪽일 터.


민재는 제 가슴에 턱 하니 올려져있던 가는 손목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머리카락에 반쯤 파묻힌 얼굴도.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기억에 없는 얼굴이었다. 이렇게 눈에 띄게 긴 머리칼을 나부끼는 여자라면 인상이 깊을 터인데도. 


정황상 밤새 사고를 친 건가 고민을 해 보아도, 그럴 리가 없었다. 분명 민재는 어제 세상에서 가장 우울한 드라마 작가 지망생이었고, 어제 죈종일 말을 섞은 사람이라곤 쌍둥이를 벤 여자보다 배가 튀어나온 카페 사장님이 다였다.


귀신이 곡할 노릇인 것은 현관문도 꼭 잠겨있었고, 슬쩍 바라본 원룸 현관에는 신발의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는 거다. 민재는 숨도 크게 못 쉬고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그러고 보니 저 여자의 것이리라고 짐작되는 옷가지는 어디에도 없었다.


깨워볼까?


아.

아아.


고민끝에 민재는 도리질치며 눈알을 굴렸다. 민재는 이불을 덮어 그 몸을 가려줄 용기도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그 여자를 깨워 말을 걸 용기도 없었다. 여자라는 건 옷을 입고 있을 땐 그리 의식하지 않게 되는데도, 이렇게 옷가지를 걸치지 않고 있다는 것만으로 어디를 어떻게 건드려야 좋을지도 모를 존재가 되버리는구나. 


나가자.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민재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였다. 문제로부터의 회피. 엄마와 분쟁이 있었을 때도 그랬지만, 민재가 가장 먼저 선택하는 문제해결법은 늘 이것이었다.

원룸의 가운데 떡하니 자리잡고 있는 침대를 크게 빙돌아 현관을 향했다.


계절에도 아랑곳 않고 겉옷도 없이 잽싸게 신발을 구겨신고 비현실적인 풍경에 마지막으로 눈길을 주던 민재는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 섰다.


그 여자, 긴 머리칼의 여자가 두 눈을 말똥말똥 뜨고 민재를 바라보고 있었다. 현관문 손잡이를 잡고 선 채로 민재는 잽싸게 뒤로 돌았다.


"오, 옷 입어요!"


바스락. 바스락. 슥.


킥, 하는 작은 웃음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꾸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현관에 이마를 박고 서 있다가, 그 여자의 옷가지가 없었다는 데 겨우 생각이 미쳤다. 민재는 충분히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되자 뒤를 슬쩍 돌아보았다.


여자는 어설프게 이불로 몸을 감싸고 침대 구석에 앉아 눈알을 굴리고 있었다. 이 방의 모습을 살피는 듯했다. 

민재는 그 이불 아래에 맨 몸이 들어 있다는 걸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며 현관문을 등지고 돌아섰다. 얼굴이 새빨갛게 물든 것을 들키지 않기를 바라는 건 무리겠지만, 적어도 의심스러운 모습은 보이지 말아야 겠다고 생각하며 침착하게 말을 꺼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혹시 알아요? 맹세컨데 제가 그 쪽을 데려온 건 아닙니다! 정말입니다."


제가 데리고 온 게 아니라면, 그 여자가 제 발로 걸어 들어와 여기에 이렇게 누워있다는 것 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하지만 민재는 아주 강력한 심증이 가는 용의자 앞에서도 제가 범인이 아니라고 주장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여자는 민재가 뭐라고 하건 꼼짝도 않고 앉아 입을 다물고 있었다. 


"몰라요?"


여자는 여전히 새초롬한 표정으로 민재를 멍하니 바라보더니 제 입을 가리켜 보였다.


"입?"


여자는 인상을 확 찌푸리더니, 사이드테이블 위에 놓인 펜과 원고지를 집었다. 꿈에 나온 단서가 언젠가 도움이 될 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배갯머리에 늘 놓아둘 뿐, 쓴 적은 없는 깨끗한 원고지였다. 

슥슥 빠르게 몇 자를 적더니 민재 쪽으로 돌려 보여주었다.


[돌아갈 수 없게 됐어요. 원고지가 물에 젖어버렸어. 글자가 지워져버렸어요.]


민재는 주춤주춤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다가가 그 작은 글자를 겨우 읽었다.


뭐야, 정신병자인가? 


"뭐라고요?"


여자는 제 가슴을 퍽퍽 치더니, 다시 몇 자를 더 적었다.


[당신이 썼잖아요. 강한솔이에요. <달의공주>의 주인공.]


<달의공주>? 그건 민재가 거의 오 년 전에 쓴 글이었다. 한창 비현실적 요소가 섞인 글을 좋아하던 때라 지금 생각하면 참 낯부끄러운 시놉시스에 손발이 오그라드는 사랑 표현도 서슴지 않고 대사에 마구잡이로 넣었던 글이었다. 제일 처음 쓴 대본이라, 구성이며 문장이며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욕심이 앞서서 막무가내로 써 내려 갔던 기억이 난다. 지금 쓰는 글에 비해 형편없이 난잡하지만, 그래도 정말 애정을 듬뿍 담아 쓴 대본이었다.


"그걸 어떻게?"


[강한솔이라고요. 내가.]


피식.


이게 뭐야. 이건 무슨 농담이지? 


"지금 나랑 장난해요? 새벽에 이건 무슨 질 나쁜 농담이지? 당장 내 집에서 나가요. 당장!"


여자는 시퍼렇게 날이 산 민재의 면박에 잔뜩 풀이 죽어서 이불을 몸에 두른 채로 침대 아래에 발을 디뎠다.


"그러고 나가려는 거에요? 옷은 어쨌어요?"


여자는 고개를 푹 숙인채로 머리를 가로로 흔들었다. 웨이브진 긴 머리가 그 바람에 물결치며 흔들렸다. 

아주 긴 새까만 흑발. 웨이브진 머리칼. 가는 몸.


민재는 혹시나, 하는 생각을 꾹꾹 억눌렀다. 그럴 리가 없잖아.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야단맞은 사람처럼 구석에 몸을 붙이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 모습을 보니 더 나무랄 수도 없었다. 정말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휴."


민재는 계속 쥐고 있던 손잡이를 다시 힘주어 잡았다. 미지근한 감촉이 기분 나빴다.


달칵.


"당신이 안 나가면 내가 나갈게요. 알았어요? 내가 다시 들어오기 전에, 이 집에서 썩 나가요. 옷이나 신발을 어쩐건지 모르겠지만, 이건 무슨 장난이야?  한 시간. 딱 한 시간 줄 테니까."


쾅!


닫히는 문 새로 여전히 미동도 않고 바닥만 쳐다보고 서 있는 정수리가 눈에 들어왔지만, 민재는 편의점이 있는 방향을 향해 얼른 발을 옮겼다. 끊은지도 꽤 됐는데, 열이 뻗치자 담배 생각부터 났다.


틀림없이 윤호 그 녀석 짓이겠지. 저 여자는 돈으로 샀을 테지.


틀림없을 거야.


나를 상대로 이런 공들인 장난을 칠 놈은 그 놈 밖에 없지. 미친 놈.


후-.


3년, 이 거리로 이사온 뒤에 처음 입에 문 담배는 지독하게 텁텁한 맛이 났다.







'ㅅ')~





민재 엄마 댁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는 속으로 한숨을 몰아 쉬었다. 


돈을 벌면서 하는 일이라는 게 다 그렇지, 누가 일을 하면서 늘 알차게 행복하겠느냐만. 민재 엄마 아래에서 일을 한 지도 십 년이 넘었지만, 이 식구의 죽 끓듯 하는 변덕에는 가끔 지칠 때가 있었다. 


어제는 제 아들의 책꽃이에 종이 한 장도 남기지 말라고 몇 번이고 강조하며 일을 시켜 놓고는, 오늘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다시 그 노트며 종이조각들을 찾아오라고 성화였다. 마침 어제가 분리수거 하는 날이라, 이제 와서 찾으려 해도 소용없다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다 찾아올 필요는 없고, 그 중에 녹색띠가 둘러진 하얀색 표지의 노트가 있단 말이에요. 그 노트가 꼭 필요하다지 뭐에요. 아주머니도 아다시피 제 아들이 워낙 뭐 하나를 진득하게 하는 법이 없잖아요. 어제 한 말도 오늘 뒤집네요. 정말 못 살겠다니까. 달의공주라나 뭐라나. 옛날에 쓴 습작이 있어야 된다네요."


못 살겠는 건 아주머니 쪽이었다. 아주머니는 절로 치미는 분을 삭이며 쥐어주는 만원짜리 몇 장을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아주머니가 괜한 수고를 하네요. 이 지역의 분리수거 종이는 모두 영포 지점에 모이니까. 거기에 가보면 아직 있지 않을까? 거기까지 가도 못 찾으면 어쩔 수 없지만, 좀 부탁할게요."


아주머니는 잘 다듬어진 민재 엄마의 손톱을 흘끗 바라보고는 고개를 숙이고 분리수거장으로 향했다.





'ㅅ')/~(@ㅅ@)





민재는 새벽 4시에도 잠들지 않았을 게 뻔한 윤호를 근처 포장마차로 불러냈다. 이 시간에 영업하는 가게 중 민재의 주머니 사정에 어울리는 곳은 그런 곳 뿐이었다.


"요즘 어떻게 지내?"


윤호는 잿빛 양복 차림으로 포장마차 문을 밀고 들어왔다.

민재와 한 때 함께 시나리오 작가를 꿈꾸던 윤호는, 지금은 SBS에 공채로 합격한 어엿한 작가였다. 신인 딱지를 때자, 지금은 꽤 주머니 사정도 넉넉해진 모양이었다. 


"뭐, 그냥 그렇지. 장편 하나 준비하고 있어."

"글은 잘 풀리고?"

"뭐."


윤호는 민재의 어색한 미소를 받아 넘겼다. 굳이 그런 이야기로 서로가 불편할 필요는 없었다.

민재는 윤호가 자리에 앉자마자 잔에 소주부터 따르고 급한 질문을 던졌다.


"너 나한테 할 말 없냐?"


윤호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뭐? 무슨 얘기? 내가 뭐 잘못한 거 있냐? 새벽에 불러내더니 왜이렇게 사람을 잡아?"

"정말 없어?"

"크게 짐작가는 일은 없는데?"


윤호는 빈 민재의 술잔을 채워주었다.


"왜 그래, 요즘 일이 많이 힘드냐?"


민재는 그 영문을 모르는 얼굴을 봐도 대뜸 의혹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윤호가 아니라면 그런 악질스러운 장난을 칠 이가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너 혹시 내 방에 여자 하나 보냈냐?"


윤호는 모르는 일이라며, 오히려 무슨 일인지 흥미진진해 했다. 여자와는 인연이라곤 없던 친구가 여자가 어쩌니 하니 흥미가 동할 수 밖에.


"너라면 알 거 아냐. 내가 옛날에 쓴 습작. <달의공주>말이야. 너 말곤 그딴 쪽글을 알 사람도 없다고."

"달의..? 그게 뭔데?"

"달의공주! 내가 썼던 쪽글 중에 왜 남자 주인공 집에 벌거벗은 여자가 떨어지는 글 있잖아!"

"아, 그거? 그 때 진짜 웃겼었는데, 킥킥킥! 그 때 너나 나나 완전 중이병에 빠져가지곤, 되지도 않는 판타지 소설 패러디 한다고 말이야. 킬킬킬! 남성향 일본 소설이나 애니메이션 중에는 그런 소재가 많으니까, 그 땐 다들 그런 거 한 번 씩 썼었지. 그게 왜?"

"아니, 거기 나온... 하."


민재는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그런 말을 했다간 미친 놈 취급 당하거나, 평생 놀림당하기 쉽상이었다.


민재는 이 놈이 저지른 일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 때까지 그 뒤로도 한참을 추궁했지만, 성과도 없이 포장마차를 나서야 했다. 만약 이 놈이 범인이라면 그 뒤에 어찌 되었을지가 궁금해서라도 민재에게 한 두 마디쯤 찔러 보았을 텐데, 그런 기색도 없었다.

되려 아침 동이 틀 때까지 윤호가 새로 맡았다는 작가와 배우 오디션 프로그램에 대한 고민을 들어주느라 이 쪽이 진을 빼야 했다.




'ㅅ')!





"정말이에요, 엄마?"


김사장은 큰 소리를 내는 민재를 놀라서 쳐다보았다. 저 조용한 양반이 오늘은 뭔 일인가, 싶어서.


"정말? 공책이 너덜너덜해져서 물에 다 젖어 있었다고? 글자를 하나도 못 알아 보겠다고?"


민재는 기가 막혔다. 이건 또 무슨 우연의 일치인가.


"그래, 어제 새벽에 소나기가 내렸잖니. 그게 하필 또 펼쳐져 있었나 보더라고. 박스들 틈에 끼여 있었다고 하던데. 아줌마가 3시간 동안 그 커다란 분리수거장을 뒤져서 몽땅 젖은 공책을 집에 가져왔는데, 어찌나 미안하던지. 쉬라고 이틀 유급 휴가를 줬지 뭐니. 다음에 아주머니 보면 인사 좀 잘 드려. 알았니?"

"응, 알았어."


"뭐야, 그거 그렇게 중요한 거였니?"

"아냐. 됐어, 엄마. 들어가."


민재엄마는 떨떠름하게 전화를 끊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오픈하자 마자 반팔 입은 선생님이 오셔서 얼마나 놀랐는데, 왜 이렇게 귀신 본 사람처럼 구세요?"


정말이다. 귀신 본 사람.


"정말인가봐요."

"뭐가요?"

"귀신말이에요."


민재는 한 시간 뒤에 다시 오겠다고 말하고 멍하니 전송하는 김사장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왔다. 기가 막히게도 그 여자는 이불을 둘둘 감고 집 문 바로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저기요, 아가씨, 괜찮아요?'

'집에서 쫓겨난 거여? 왜 이불을 말고 여기서 이러고 있누? 처자, 일단 이 할미 집에 잠깐 들어와 있어. 이 추운 날씨에 이게 무슨 짓이야? 남편이 쫓아낸 거여?'


민재는 어이가 없어 멍하니 제 집 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소동을 바라보았다.




('ㅅ')~! (`^`)/




여자 속옷이 있을리 없었다. 그 여자에게 대충 옷을 찾아 주었지만 영 민망한 꼴이라 제대로 쳐다볼 수도 없었다. 다시 이불을 몸에 돌돌 만 채로 그 여자는 새파랗게 질린 입술로 민재를 노려보았다. 왜 집에서 나가라 들어가라 하느냐는 항의의 시선이었다.


민재는 스스로가 한심해지는 걸 느끼며 마지못해 물어보았다.


"정말 강한솔입니까?"


작가적 상상력의 한계였다. 민재는 두 발 두 손을 다 들었다. 공들인 장난이 아니라면 남은 가능성은 하나다. 정말 이 여자가 강한솔이라는 것. <달의공주>에서 뛰쳐나왔다는 것.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달의공주>를 쓸 때 상상했던 분위기가 그대로 녹아 있는 것 같은 생각마저 들기 시작했다.


민재는 이런 이해하기 힘든 현상을 일단 지켜보기로 마음먹었다. 혹시 무언가를 노리고 접근한 사기꾼이라고 생각하기엔 자신이 너무 가진 것이 없었다. 될 대로 되라지. 

어릴 때부터 좋던 싫던 어떤 특이한 상황에 처하면 떠오르는 민재의 습관이었다. 어떤 감정의 변화든 나중에 글에 써 먹을 수 있다면 좋은 경험이 아닌가. 슬프거나 지치거나 고독한 것들의 마이너스 감정도 늘 그렇게 생각해왔다.


그렇다면 이 여자를 시험해 보자, 민재는 그렇게 생각했다.


"말은 왜 못하는 겁니까?"


분명 달의공주의 여주인공이 말을 못하는 설정은 아니었는데.


강한솔은 민재를 쏘아보며 글자를 갈겨 적었다.


[대사가 한 마디도 없었잖아요.]


대사가 없었나?

민재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 때나 지금이나 설정을 짜는 것만 거창하지 길게 쓸 버릇하지 못해서 대사가 나오기도 전에 집어치워버린 글이 여럿인 것이다.


"좋아, 그럼 내가 대사를 넣어주면 말도 할 수 있게 된다는 거죠?"


이쯤되면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몰라도 퍽 재미있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거기까진 모르겠어요. 새로 쓴 글에서 새로운 강한솔이 태어나면 안되요. 완벽히 내가 주인공인 글이어야 해요.]


민재는 그 말을 이해할 것 같았다. 하나의 글을 길게 쓰면 쓸 수록 그 캐릭터는 입체적인 성격을 가진다. 때로는 성격이 180도 변하기도 하고, 약점과 강점이 뒤집어지기도 하고, 비합리적인 행동에 쉽게 빠져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합쳐 그 하나의 캐릭터가 완성되는 것이다.

그에 비해 단편을 여럿 쓰면, 비슷한 캐릭터가 여러번 탄생하지만 모두 단편적이고 평면적인 성격을 가질 뿐이다. 둘을 바꿔 놓아도 스토리에 큰 지장이 없을 만큼.


"네, 알겠습니다. 좋아요. 당신이 강한솔이라고 치죠."


민재는 또렷하게 자신을 응시하는 갈색 눈망울을 마주 바라보았다. 꼼짝도 않고 앉은 폼이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


"진짜 강한솔이라고 쳐요. 그럼 어떻게 하면 되죠? 그 공책은 벌써 죄 젖어서 너덜너덜하다고. 별 도리가 없잖아. 그럼 평생 여기서 이렇게 내 집에 눌러앉아 있는 거요?"


[달의공주, 다시 써 주세요.]


민재는 달의공주의 부끄러운 스토리를 떠올렸다. 그걸 이 나이먹고 다시 쓸 수야 없질 않나.


"똑같이 쓰면 되는 거요?"


하지만 민재가 이를 꽉 깨물고 각오를 다져 던진 물음에 그 여자는 대뜸 도리질했다.


[아냐, 그렇게 말고요. 제대로 다시 써주세요. 그래서 연기하게 해주세요.]


연기해?


민재가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자 그 여자는, 강한솔은 이미 공간이 없어진 원고지를 뒤집어 사납게 갈겨 썼다.


[달의공주, 제대로 써서, 배우가 연기하게 해달라고요. 그럼 난 없어져요.]


민재는 숨이 턱 막혔다.


"배우가 연기하게 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인줄 알아요? 달의공주는 단편으로 끝날 스토리도 아닙니다. 그건 내가 작가니 잘 알아요. 지금 그 어이없는 이야기로 장편을 써서 극본상이라도 받으라는 겁니까?"


강한솔은 나타난 뒤 처음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아주 순진하고 밝은 미소를 그리며.


"지금 나랑..."


또 소리치려다 민재는 그만 한숨과 함께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그것 말고 다른 방법은 없어요? 잘 기억은 안나지만 그 때 그 이야기를 그대로 타이핑해 줄게요. 원래 거기서 나왔다며? 똑같은 글이 있으면 되잖아요."


강한솔은 고개부터 가로젓고 펜을 놀렸다.


[안 돼. 원래 있던 그 글자가 없잖아요. 잠깐만 글자에서 나왔다 돌아가려고 했는데. 미안, 이제 그 방법이 아니면 안되요.]


민재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 ㅅ')!!!





반신반의라고는 해도 신(信)보다는 의(疑)에 가까웠다. 하지만 민재는 어차피 잃을 것도 없는데, 하는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었다. 3주 째 침대를 점령하고 있는 밥도 먹지 않는 귀신같은 여자를 피하느라 집에도 제대로 들어가지 못했고, 가끔 들어달 때도 노크를 하고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민재는 그 날 부터 죽기 살기로 <달의공주>에 매달렸다. 캐릭터만 동일하면 된다는 거지 얼개는 달라도 된다는 것. 어차피 이 기세로 쓸 작품을 고르고 있다간 장편공모전 마감일에 맞출 수 없다는 것. 그것도 한 몫 했던 것 같다.


거기다 더해서 그 날 원고에 덧붙여 쓴 분량이 어땟느냐에 따라 실제로 그녀는 때로 옷을 바꿔 입고 있기도 했고, 집 안에서 하이힐을 신고 딩굴고 있기도 했다. 공들인 장난이겠지, 하고 있었지만 점점 믿음과 의심의 경계가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민재는 이제 침대를 내어주고 바닥 구석의 자리에서 자는 것도 익숙해졌고, 눈을 뜨자마자 허겁지겁 세수하고 까페로 달려오는 일상에도 적응했다. 실제로 아주 기묘한 일이었고, 가택침입을 당하고 있었음에도 이 상황에 대한 흥미가 불편함에 우선했다. 민재는 더 이상 굳이 불평하지도 않았다. 이따금 이야기를 나누긴 했지만 그녀는 늘 실 끊어진 인형처럼 자고 있었다.


민재는 이 글이 실제로 수상을 하거나 극화가 되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빨리 머릿속의 마지막 장면을 쓰고 마침표를 찍고 싶었다. 해방되고 싶을 뿐이었다. 어찌될 지는 모르겠지만 엔딩에 작가로서 할 수 있는 장치는 모조리 해 볼 생각이었다. 귀신에 씌인 듯한 이 반동거생활이 그걸로 끝내질 지 궁금했다. 아마 생각대로 된다면 굳이 배우들이 이 대본을 연기해주지 않아도 그녀는 사라질 것이다.


엄마에게는 올해까지만, 이라고 단언했지만. 사실 대상 수상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 아냐.


"민재씨, 전화왔어요."


김사장이 원고지에 얼굴을 묻고 침을 흘리며 자는 민재의 어깨를 흔들었다. 


"아, 흡. 네, 감사합니다."


민재는 급히 일어나려다 볼에 붙은 원고지가 딸려 올라오자, 민망함에 얼굴을 붉히며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정민재씨 되십니까?"


상대는 사무적인 목소리의 남자였다. 


"네, 맞습니다만?"

"아, 네 안녕하세요. 저는 SBS 작가오디션 담당 작가 정현모라고 합니다."

"네? 아 윤호와 같이 일하시는 분이세요?"

"윤호 작가님을 아세요?"


남자는 수화기를 막고 뭔가 이야기를 하는 듯 했다.


"저기요, 여보세요?"

"기다리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네, 윤호 작가님께서 내일 정민재 작가님을 좀 스튜디오로 초대하고 싶다고 하십니다."

"네? 저를 왜요?"

"이번 오디션 프로그램의 첫번째 스튜디오 촬영일이거든요."


새벽 4시에 불러내도 달려와 준 친구의 초대를 대뜸 거절할 수도 없었다. 마침 지금 쓰고 있는 달의공주도 오늘 바짝 쓰면 마무리 지을 수 있을 터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주 월요일에 찾아뵙겠습니다.


정현모 작가는 드레스 코드까지 지정해주고는 전화를 끊었다.





8ㅅ8





똑똑똑.

문을 열기 전에 습관적으로 문을 두드렸다.

방 안은 텅 비어 있었다.

그냥 이 앞 어딘가 산책을 간 걸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먹혀든 모양이군. 그 실험."


민재는 허탈하게 빈 방에 앉았다. 아주 오랜만에 침대에 대자로 드러누웠다.

원고지가 들어 있는 가방을 꺼냈다.







'^'/




열심히 하는 것보다 좋아하는 것이 낫다 했던가. 찬미는 연기가 미치도록 좋았다.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내고, 다른 사람의 심장이 제 가슴에서 두근거리는 것은 찬미를 살아있게 했다.


고등학교 중퇴. 다시 말하면 중졸. 연기하는 앞에서 학력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한국 사회는 너무 각박했다. 

찬미는 연기에 목이 말라 허덕였다. 누구를 보든 사소한 습관마저 '훔치려'드는 욕심 많은 찬미의 행동을 다른 아이들은 아직 이해해 주지 못했다. 고등학교 1학년 아이들은 천재적인 찬미의 열정을 이해하기에는 아직 세상을 너무 모르는 철부지들이었다. 그저 다른 것은 배척하기에 바빴다.


찬미는 겨우 들어간 소극단에서 온 몸을 바쳐 연기했다. 

운이 좋아 그 극단은 전문 연출가를 따로 두고 있었는데, 연출가는 찬미의 재능을 알아보고 더 큰 극단에 여러 번 줄을 대주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큰 극단은 그 나름의 간판배우, 스타 배우가 있기 마련이고, 재능있는 객원배우는 대우받지 못했다.


연출가는 찬미의 재능을 살려주려고 다방면으로 오디션 소식도 알아봐 주었다. 허나 대학교를 다니는 학생, 또는 대졸을 상대로 한 오디션이 많았던 탓에, 찬미는 도전하기도 전에 많은 기회를 잃었다. 


"찬미야, 이건 꽤 괜찮은 기회 아냐?"

"뭔데요?"

"SBS에서 배우 공모를 한다는데, 이것 좀 봐."


찬미는 전단지를 받자마자 탄성을 질렀다.SBS라는 이름 앞에서도 조금도 기죽지 않았다. 

찬미는 간결하게 명시된 자격란을 보고 가슴이 뛰었다. 자격제한없음. 단 여섯글자에 막았던 둑이 터지듯 울음이 흘러 나왔다.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에 보여주고 싶었다. 이 사회가 인재를 걸러내는 채가 얼마나 촘촘한지, 쭉정이 뿐만 아니라 잘 익고 단단한 곡식까지 죄다 걸러버리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무슨 연기라도 막힘없이 해낼 자신이 있었다.


"찬미야. 이건 큰 무대야... 지금처럼 잘 연기하는 것만으로는 안 될 거야."


예선 오디션장에 가기 전 날, 마지막으로 인사하러 찾아간 연출가는 찬미의 어깨를 두드리며 충고해주었다.

기술적으로 뿐만 아니라 심정적으로 공감할 자신도 있었다. 찬미는 항상 칭찬 일색이던 연출가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잘 하는 것 말고 뭐가 더 필요하죠?"


연출가는 찬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직 네가 어리니까, 지금은 잘 드러나지 않고 네 천재적인 면모만 부각되니 다행이지만... 이게 언제까지 갈 거라고 생각하면 안 돼, 찬미야. 좋아하는 것은 물론 중요하지만, 다른 색을 잘 흡수하는 백지의 모습만으로는 안 돼. '네'가 있어야 해."


찬미는 어리둥절했다.


"제가요?"


연출가는 쓰게 웃었다.


"언젠가 이해하게 될 거야. 넌 네가 만족스럽지 않다고 생각해서 널 계속 죽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러니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게 기쁜거야. 다른 사람이 되고 싶겠지. 하지만, 순서가 틀려.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좋을 지 모르겠다."


그 말을 끝으로 연출자는 더 이상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찬미는 밤새도록 그 말을 곱씹었지만, 잘 연기하는 게 왜 문제가 되는지 알 수는 없었다.




'^')~





예선 오디션장.

천 명이 넘는 사람이 바글거리는 운동장에 지어진 콘테이너 박스에서 열 명씩 조를 지어 심사위원이 시키는 간단한 연기 메뉴를 해 보였다. 심사위원 앞에 들어가기 5분 전에 지문이 주어졌고, 괄호로 표현된 지시문을 재주껏 나타내 보일 것과 행간을 읽는 능력 등을 평가 받았다.


찬미가 받은 대본은 현진건의 <그리운 흘긴 눈>이었다.

표독스러운 여자, 저밖에 아는 게 없는 여자. 하지만 가슴에 한을 묻고 살아야 하는 여자. 

찬미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온 몸으로 오열했다. 


"388번 합격."


당연하다고 여겼던지, 그리 큰 기쁨은 없었다.


찬미는 여러 단계를 척척 클리어하고 마지막 5인에 남았다.


그리고 마지막 과제는, 찬미가 단 한번도 상상해 본 적도 없는 것이었다. 손발이 저릿저릿했다. 어서 연기할 수 있게 해주세요. 어서! 


"이런 걸 어떻게 해요? 이건 다른 사람을 기만하는 거잖아요?"

다른 출연자가 PD와 작가진에게 따지는 것을 찬미는 가만히 방관했다. 왜? 연기할 수 있는데? 뭐가 문제라는 거지?


"하겠습니다."


쏟아지는 항의와 비난에 기획을 엎으려던 PD는 찬미의 선언에 오히려 당황했다. 시청률을 고려한 지나친 연출이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이런 기획이라면 노이즈마케팅을 할 필요도 없겠다며 웃으며 통과시킨 사장님 덕분에, PD도 억지로 진행하고 있던 참이었다.


"정말 하겠다고요?"


PD는 곱게 자란 아가씨처럼 보이는 아직 젖살도 채 빠지지 않은 찬미를 못마땅하게 바라보았다.


"네. 저는... 전 종이여자를 하겠습니다."


PD는 머리를 짚었다. 정말 할 생각이다, 저 여자.

이렇게 된 이상 하겠다는 사람만이라도 시킬 수 밖에 없었다.






@`ㅅ`@)=3






민재와 윤호는 스튜디오의 카메라 아래 쭉 줄지어 앉아있는 작가들 틈에 섞여 앉았다.


"야, 너는 뭐 거의 츄리닝 차림을 간신히 면했다 정도구만 나보고는 정장을 입고 오라고 하냐? 미친 놈."

"마, 내가 아니면 니가 정장 입을 일은 또 뭐 있냐? 감사한 줄은 모르고. 짜식이."

"그래도 나만 이러고 있잖아. 내가 창피해서 정말."

"너야 말로, 내가 리허설 하는 시간에 맞춰 오랬더니 이제 오면 어떻게 하냐? 친구로서 진정한 충고였는데."


윤호는 고개를 반대로 돌리며 중얼거렸다.


"뭐? 왜 그러는데?"

"몰라 짜샤. 이젠 나도 말 못해 임마."


민재가 말을 더 해보려고 했지만, 사회자가 단상에 나와 서자 스튜디오 안이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다섯, 넷"


셋, 둘, 하나는 피디의 수신호로 이어지고, 이내 사회자의 멘트로 녹화가 시작되었다. 생방송이라고 하는 만큼 작가진과 피디들이 잔뜩 긴장한 것이 등 뒤에서 전해져왔다.


거대한 크레인카메라가 위에서 내려오며 박수치는 관객석과 스튜디오의 정면을 점점 줌인하며 잡았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저는 작가와 배우를 모두 선발하는 드라마 오디션의 사회를 맡은 백창중이라고 합니다. 지금부터 치열한 선발 과정을 거쳐 선발된 작가분들을 만나 뵙겠습니다! 또, 지금까지의 방송을 통해 많은 인기를 얻었던 배우오디션의 최후의 삼인도 이 자리에 모시겠습니다!"






' ^')=3





두 명은 그 자리에서 작가진에게 욕을 던지며 기권했고, 남은 두 명은 망설이다가 각자 유령과 늑대인간을 골랐다. 주제는 '존재할 리 없는 사람을 연기하기'였다. 누군가 미리 지정된 사람이 그 존재를 믿도록 얼마나 완벽하게 속이는가가 관건이었다. 서프라이즈쇼를 넘어 트루먼쇼에 가까웠다. 


하지만 찬미는 기꺼이 PD가 지정한 세 사람 중 하나를 골랐다. 그 사람이 썼던 글 중 '종이여자'를 연기하기에 적합한 습작이 있다는 것이 찬미가 민재를 선택한 이유였다.


나는 김찬미가 아니다. 나는 종이여자. 나는 글자로, 잉크로 만들어진 사람. 대본에 지문이 없으니 말을 할 수 없어. 대본에 지시문이 없으니 재량껏 연기할 수 있어. 나는 종이여자. 글에서 걸어나온 사람.


찬미는 눈을 감았다 떴다. 무엇도 할 수 있었다. 종이여자였으니까.



' ㅅ')=3





그 여자다.


민재는 징징거리는 울림이 귀에 가득해 다른 소리가 퍼진 듯이 들렸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저번 3주 동안 진행된 배우 오디션의 주제는 '존재할 리 없는 사람을 연기하기'였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선 세 명의 배우는 모두 그 일을 훌륭하게 해내고 이 자리에 섰는데요, 각각 입센의 '유령'을, 후안감독 영화의 '늑대인간'를, 알랭드 보통의 '종이여자'를 모티프로 하여 연기했습니다."


하. 하하하하. 골치가 아파왔다. 


"미안하게 됐다."


뭐? 영호에게 무슨 말이냐고 되묻기도 전에 민재는 거대한 스크린에 비친 얼빵한 제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이 상황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알만도 했다.


"이 방송 시작 전에 사전 동의를 받지 못해 이 자리에서 여쭤보도록 하겠습니다."


사회자는 방긋 웃으며 민재에게 다가와 마이크를 내밀었다.


"지금까지 연기를 가까이 지켜본 사람으로서 감상을 들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집어 치우시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민재는 장단을 맞춰 줄 기분이 아니었다.

사회자의 웃는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 눈동자가 황급히 PD를 향했다. PD도 목 근처에서 손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자르라는 거다. 


"하하하, 우리 배우 여러분들의 연기가 그만큼 완벽했다는 뜻이겠죠. 이 분 께서는 아직도 존재할 리 없는 종이여자를 믿고 계신 모양입니다."


웃으며 등을 돌리는 사회자의 등을 노려보던 민재는 곤란한 미소를 띠고 이쪽을 바라보고 선 익숙한 사람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동그란 종이 명찰을 달고 있었는데 아래에는 작게 '강한솔'이 위에는 크게 '김찬미'가 달려있었다.


하하하.


얼마나 어수룩하게 보였을까, 얼마나 바보같이 보였을까. 반신반의하는 모습을 보며 얼마나 웃겼을까. 설마 전국에 방송된걸까. 내 집에 CCTV라도 달았나?


민재는 그 자리에서 카메라를 비집고 방청석을 뛰어올라 문을 박찼다. 걸음보다 앞서 생각이 저만치 달아났다. 분을 삭히려 노력해봐도 경사로에서 공을 떠받치고 있는 @@가 된 기분이었다. 점점 불어나는 눈덩어리처럼 초라하, 비참함이, 무엇보다도 가장 큰 부끄러움과 분노가 밀려와 어지러움증마저 생겼다.


"잠깐만 기다려봐!"


윤호였다.


"미친 새끼. 몇 주 전에만 해도 눈 동그랗게 뜨고 모른 척 했던 주제에."

"아냐, 민재야. 내 말 좀 들어 봐! 나도 어제 되서야 알았다고. 어? 말할 기회가 없었어."

"뭘 몰라? 니가 아니면 날 방송에 팔아 넘길 놈이 누가 있어?"


윤호가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민재가 팔을 뿌리치려 하자 그제야 주저하며 말을 꺼냈다.

"사실 너희 어머니가... 그 영주 어머님을 통해서... 그렇게 됐다고..."


민재는 그제야 윤호를 돌아보았다.


"뭐? 엄마가?"


기가 막혔다.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다더니.


"이거라면 신선한 충격이 될거라고. 자네에게도 좋은 경험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고 하시더군. 자네 항상 버릇처럼 말해왔지 않은가. 자네는 너무 모든 감정을 이용할 수 있으면 괜찮다는 듯이 취급해왔잖아. 어머니도 그 점을 걱정하셨던 거야. 틀림없이. 김사장님도 그래서 도와주신거라고 했어."


"맞아. 나는 늘상 그래왔지. 스스로도 그런 내가 비인적이라고 느낄 때가 많았어. 아마 강도가 들어와서 내게 칼을 들이민다 해도, 나는 그것을 새로운 이벤트 정도로 받아들일거야. 언젠가 그 경험이 내 글에 녹아날 거라고 생각하면 뿌듯해 할 지도 모르지. 하지만..."


민재는 의외로 차분한 제 목소리에 놀랐다.


"이번은 괜찮지 않았어."


민재는 윤호의 만류를 뿌리치고 나가버렸다.

윤호는 단호한 등을 보자 더 이상 잡을 수가 없었다.




'^'




PD는 허공에 손을 자꾸 둥글게 저어댔다. 사회자에게 빨리 진행하라는 재촉이었다.


"네, 그럼 서프라이즈의 감상을 들려주실 분이 한 분 줄어들었네요. 하하하, 너무 감쪽같이 속아 넘어가신 모양입니다. 하지만 이래서는 심사를 할 수 없겠네요."


심사위원 한 분이 손을 들어 발언권을 요청했다.


"물론 이 오디션은 연기를 잘 하는 사람을 뽑은 테스트입니다. 하지만, 그 정도가 있죠. 다른 사람의 일상을 파고들어 정체를 밝혔을 때 분노를 살 정도의 연기를 요구한 건 아닙니다. 서프라이즈라는 말을 들었을 때 기분이 좋을 정도로 해야죠. 김찬미씨는 물론 연기실력은 아주 탁월합니다. 어쩌면 세 분 중에 가장 뛰어난 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그 옆의 독설가로 유명한 다른 남자 심사위원이 말을 받았다.


"하지만 상식이 없는 것 같네요."


찬미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무슨 말이야? 왜? 연기를 잘 하는 사람을 뽑는 오디션이잖아? 기획은 당신들이 한거잖아?


"하하하, 독설가 선생님 오늘도 납셨군요."


사회자가 분위기를 부드럽게 몰아가며 신호를 보내자 방청객에서도 그에 맞춰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생방송은 그 뒤로 큰 문제 없이 진행되었지만, 늑대인간을 연기했던 남자가 우승, 유령을 연기한 여자가 준우승을 차지하고 찬미는 심사대상 제외라는 굴욕을 안고 물러나야 했다.






' ㅅ')-3   ' ^')-3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으레 시상식이 흔히 열리는 연말이 되었다.

민재가 그 동안 숱하게 확신을 가지고 고르고 골라 썼던 장편들과는 달리, <달의 공주>는 한 번에 민재에게 명예와 돈을 안겨주었다. 머리가 좀 차갑게 식고 나서 돌아본 <달의 공주>는 부끄러울 정도로 자신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자신의 심정. 말.


아직 마음속에 응어리진 단단한 것은 그대로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상대가 거리를 둘 줄 몰랐음을 비난할 수도 없다. 그런 상황을 즐기자고 생각했던 것도, 나중에 이용해 먹을 소재가 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자신이니까. 

언제까지나 화를 내고 있을 수도 없으니까.


민재는 그렇게 스스로를 납득시키고서야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단상에 올랐다. 


여기저기서 플래시가 터졌다.

"기성작가들을 모두 제치고 신인 작가의 작품 <달의공주>가 KBS장편상을 따냈습니다. 무엇이 동력이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민재는 그토록 바래왔던 자리에 서있어도 기쁘지 않았다. 쓰면서, 매일이 즐거웠다. 이것을 이렇게 쓰면 어떻게 반응할까, 저렇게 쓰면 어떤 식으로 나올까. 


"아마 신선한 작품이라 뽑아주신 것 같습니다. 과분한 상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민재는 불편한 양복에서 몸을 들척였다.


"수상자의 작품은 미니시리즈로 제작됩니다. 혹시 제작 과정에서 꼭 넣었으면 하는 요소가 있습니까?"

"원하는 배우가 있습니다."


민재는 담담히 대답했다.


"오, 아마 주인공역으로 이미 생각해두신 분이 있는 모양입니다. 그게 누굽니까?"

"강한솔입니다."


강한솔이 누구야? 그게 누구지? 웅성거림이 사람들 사이로 퍼져나갔다.


"강한솔은 작중 인물 이름으로 알고 있는데... 실존 인물을 바탕으로 쓰신 겁니까?"


민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 가능하다면 제가 지금 하는 말을 그대로 기사로 내주십시오."


기자들이 키보드에 손을 얹은 채, 민재의 입에 눈을 모았다.


"이 대본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습니다. 강한솔, 체념한 듯 눈을 감고, 다시 원고지 안으로 걸어들어간다. 원고지 안의 세상에서 행복을 찾기로 한다. 원고지 밖의 세상은 너무 시끄럽고 가슴이 아팠다. 제가 원하는 데로 살 수 없었다. 원고지 안에서 살아가기로 했다."


민재는 잠깐 말을 끊고 숨을 몰아쉬었다. 후-. 어렵게 결심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제 수상을 하면서 확신을 가졌습니다. 남에게 보여지기 위한 글이 아니라 제가 쓰고 싶은데로 소신을 가지고 써야만 다른 사람이 보아도 즐겁다는 것을요. 그래서 제가 원하는 데로 결말을 바꾸겠습니다."


타닥타닥. 키보드 소리가 마치 비오는 소리처럼 울렸다.


"강한솔, 눈을 부릅뜨며 소리를 지른다. 원고지를 두 손에 쥐고 찢어 버린다. 원고지 안의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기로 한다. 이렇게 시끄럽고 가슴이 아프기에 비로소 살아갈 이유도 있는 거라 생각하게 되었다. 자신을 사랑할 이유를 찾아 원고지 밖으로 걸어 나왔지만, 자신을 왜 아끼고 자기 자신을 확고히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강한솔, 달은 스스로 빛을 낼 수 없을 뿐이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이 저지른 과오조차 존경하고 사랑한다는 것을 알자 그녀는 원고지 안으로 차마 다시 들어가지 않기로 했다. 이미 사랑받고 있구나.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구나. 거기에서부터 자기 자신이 생겨났다. 강한솔이 힘차게 걸어가는 발자국마다 잉크가 굵은 무늬를 그리며 흔적을 남긴다."


타닥타닥. 민재의 말이 끊어짐과 동시에 키보드 소리도 끊겼다.


"이건 무슨 뜻입니까?"

"그래서 강한솔이 누구라는 거야?"

"캐스팅하고 싶은 배우가 누구라는 거야? 그냥 아무 소리나 하는 거야?"


사회자도 기자들도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민재는 더 할 말이 없다는 제스처를 하며 단상에서 내려갔다.


아까부터 느껴지던 따가운 하나의 시선이 자꾸 민재를 따라갔다. 





Fin.




가장  휼륭한 시는 아직 씌여지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 지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 되지 않았고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불멸의 춤은 아직 추어지지 않았으며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 되지 않은 별

무엇을 해야 할지 더이상 알수 없을 때
그때 비로소 진정한 무엇인가를 할수있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더이상 알수 없을때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

            -나짐 히크메트-
  • ?
     손님 2013.11.19 00:18
    에...음...아...다 봤음
    에... 음... 경사로에 공을 떠받치고 있는 @@의 정체가 뭠까

    일단 등장 인물의 이름은 넘어가도록 합시닼ㅋㅋㅋ

    일단 그냥 느껴지는 솔직한 감상을 써보도록 합시다

    개인적으로 초반부터 서술이 맘에 듬니다.
    원래 남이 가진 사탕이란 탐나기 나름인것이고, 그걸 얼마나 절제하느냐와는 별개로 탐나는건 탐나는 거니까..

    제목은 달인데... 제목에 집착하는건 좀 비루하고 치졸한 느낌이지만...
    생각해보면 초반에 꿈에 나왔던 그 윤곽은 달을 암시한 것 같은데, 일단 끝부분에 원고지 부분에서야 아, 제목이 달이었지 라고 느껴짐다.
    물론 찬미라는 존재가 달이었다는 것에 의미가 있지만,

    음... 구조라고 해야할까... 서술에 찬미가 등장해서 찬미의 이야기가 시작되었을 무렵부터
    새로운 등장인문의 추가 라는 것이 너무 뻔해져서...
    물론 단편이라는 구조에서 이렇게 결말을 내기위해서 찬미라는 존재를 미리 언급하거나, 후에 자연스럽게 밝히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지만...
    미리 밝히는 것도 단편이라는 짧은 글안에서 짜임새를 자연스럽게 인식시키기는 힘들고.. 역시 후자쪽으로 하는 편이 더 자연스럽지 않았을까 생각이 듬다
    물론 후자쪽도 어려운건 매한가지지만...

    초콜릿 코스모스는 정말 컬쳐 쇼크! 라는 느낌으로 읽었습니당

    음... 예전에 고등학생때 짧게 짧게 단편을 쓴 적이 있는데, 심지어 아무한테도 안 보여준 그런 단편들도 있고
    게다가 아무한테도 안 보여준 단편들은 전 전 핸드폰을 택시에 두고 내리면서 잃어버림으로 다시는 찾을 수 없게 되었지만,
    그 당시 내가 정말 쉽게 꺼냈던 단편에서는 자신의 이야기를 꺼냇던것들이 대부분이었슴당
    어쩌면 내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했을지 모르는 자신의 이야기는... 사실 다른 누군가가 본다면... 정말로 자신의 이야기가 되어버려서
    이 단편은 너무 경험으로 낸 거라 그 특유의 느낌을 전달할 수 없는 공감대가 없는 글이 되어버렸지용

    이번 글은 뭐랄까... 생각 심정 느낌 같은부분이 많이 담긴거 같은데, 그 부분에서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을 찾은게 좋았습니당
    그 미묘한 경계의 교집합이 특유의 안도감을 준다고 해야 하나...
    누구나 글로 고민하면 그런 교집합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좋습니다

    최근에는 정말 글을 폭넓게 쓰려면 자신을 버리거나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번에 쓴것도 어떤 의미로 자신을 조금 버리는 연습이었슴다 데헷)
    직접적인건 좋았으나, 너무 확 드러난 건 아닐까 하는 아쉬움이라고 해야 할까 음... 이게 무슨 소리지 @@
    음!

    확실히 스토리가 전개되고 끝나기까지 딱 필요한 부분은 전부 있는 느낌인데
    역시 빠르거나 모자르다 라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슴당

    시는 역시 좋은 시였슴다.
    끝은 민재와 찬미의 희망예찬으로 끝나는데
    이 시가 안 어울릴 것은 없는데... 그래도 역시 기묘한 감각이 드는 건 어쩔수 없었슴다.

    우리존재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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