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장
2013.10.18 22:58

<단편 쓰기 대회!> 이브(Eve)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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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그는 나를 시선이 보이는 데 항상 두고 싶어했고, 나는 이 곳을 벗어나도 딱히 갈 곳이 없었다.

 

그가 칼을 등 뒤에 두고, 내가 잃어버린 별과 가족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니 우리 사이에는 평화가 감돌았다.

 

"먹어."

 

그는 이미 다 조리되어 있는 냉동음식을 내 앞에 던져주었다. 냉장고를 한참 뒤지더니 고작 찾아온 것이 이 냉동도시락인가 보다.

전자레인지의 사용법도 모르는 외계인이 지구를 통째로 빼앗을 정도의 약탈경제를 이룩했다는 사실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벌떡 일어나서 전자레인지에 도시락을 두 개 덥혀 그의 앞에도 하나를 내밀었다.

 

"먹어요."

"나는 굳이 먹지 않아도 죽지 않아."

 

그는 내 손을 보더니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고 보니 그가 음식을 먹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저 말이 정말일까? 황된 망상일까? 평범한 과대망상증 환자인걸까? 나와는 다른 부류의.

 

"아무것도 먹을 필요가 없다는 것도 조금 허전하겠네요."

 

그가 뭐라고 하든, 그의 앞에 도시락을 밀어 주고 젓가락까지 척 올려 주었다.

그의 별에서는 평소에 어떤 도구를 썼는지 모르겠지만, 이 도시락에 붙어있는 식기는 젓가락 뿐이었다.

 

내가 도시락을 해치우는 모습을 한참 보더니, 그는 원수를 대하듯 비장하게 도시락 비닐을 벗기고 하나하나 쿡쿡 찔러 미트볼을 입으로 옮겼다. 아무래도 남의 성의를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인 듯 싶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내키지 않는 얼굴로 나를 뚫어져라 보면서 씹어 삼킬리가.

 

"지금 자 두지 않으면 곤란해질 거야. 그래도 충전은 필요한 몸이거든. 그러니 조금 뒤에 깨워. 무슨 일이 있어도 깨우고."

 

그는 배가 부른지, 도시락의 1/4도 채 비우지 않고 내려놓더니 내가 정리한 이불 위에 쓰러졌다.

옆에서 내가 미트볼을 우물거리고 있는데도, 그는 순식간에 쌕쌕거리는 숨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거지?

어질러 놓은 도시락을 주워 들고 쓰레기통을 찾아 갔다.

빵 껍데기, 포장지 껍질, 끊어진 머리끈, 구멍난 양말. 쓰레기 통 안에 있는 것들을 보고는 또 다시 못 박힌 듯 멈춰 설 수 밖에 없었다.

음식조차 먹기 힘겨운 저 키퍼가 남긴 쓰레기가 아니라는 것은 한 눈에 알았다. 이 집 또한, 그의 보금자리 또한, 지구에서는 누군가의 소중한 공간이었으리라.

 

"젠장."

 

눈시울이 떨리며 속에서부터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이 있었다.

 

"젠장, 젠장, 젠장."

 

누굴 향해서라고 할 것도 없이 욕설을 퍼붓고 싶었다. 제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었다.

 

 

 

 

 

#. 8

 

그는 점점 나를 자유롭게 풀어주었다.

이제는 집 밖에 나갈 때는 습관적으로 총을 쥐어줄 뿐, 다른 것에 대해서는 일체 입을 다물었다.

키퍼가 나간 뒤 한참 동안 문 근처를 서성거렸다. 여기에 있으면 안전하다는 그의 말은 진실일지도 모른다. 믿어도 좋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의 일상이 뒤집힌 뒤로 최초로 내게 손을 내밀어 준 사람이니까.

 

창문 밖만 힐끔거리다가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문에는 잠금장치 같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나가볼까?

 

키퍼가 집에 돌아올 때마다 비린 내음을 확 뒤집어 쓰고 스쳐 지나가긴 했지만, 그건 그가 일부러 찾아다니기 때문이다.

잠깐 집 밖을 둘러보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인터넷도 TV도 뭐 하나 되는 게 없으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 알 길이 없었다.

 

"키퍼 지금 집에 있나?"

 

막 문을 여는데, 머리가 벗겨진 할아버지가 빼꼼 고개를 들이밀었다.

 

화들짝 놀라 문에서 비켜 섰다.

 

"이런, 이브 혼자 집을 지키고 있는 건가? 내가 그렇게 당부를 했는데도."

 

들어오라는 말도 안 했는데, 그는 성큼성큼 내 옆을 지나가 쇼파에 털썩 앉았다. 그 앞 자리를 내게 권하며 탁자를 탁탁 두드렸다.

 

"키퍼는 아마 자네에게 말해 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을 거야."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주섬주섬 작은 케이스를 꺼냈다. 그 안에서 꺼낸 작은 두루마리 같은 것을 펼치자, 디스플레이에 빛이 들어오더니 지도가 표시되었다.
난생 처음 보는 기이한 대륙의 지도였다. 남극과 북극 사이에 종으로 길게 이어져, 허리가 반으로 뚝 잘린 거대한 대륙이 있고, 남반구 위주로 자잘한 섬들이 밀집되어 있었다.
그 지도에는 바다 속 대륙의 지형도까지 빼곡하게 표시되어 있었고, 처음 보는 언어가 사방에 뺴곡히 묘사되어 있었다.


거대한 대륙과 좌측 하단의 섬에 밀집된 빨간 점이 반짝 거리고 있었다.


 

"이게 다 뭐죠?"


노인은 썩 좋지 않은 표정이었다.


 

"발병한 인간, 아니 이제 뭐라고 불러야 할 지 모르겠군.."


발병? 새로운 대륙에 갑자기 많은 자가 상륙했으니, 새로운 풍토병이 돌 것은 당연하다. 전염병이라도 퍼지고 있는 걸까?


 

"이걸 병이라고 해도 좋을지, 어떤지. 우리도 잘 모르겠네. 우리 전문가들이 일주일동안 아무리 연구해 봐도 답이 나오지 않네. 혹시 이브, 자네라면 뭐라도 알고 있지 않을까 싶어서 이렇게 염치 불구하고 찾아왔다네."


 

그 지도는 아마 구대륙의 것일 것이다. 전 행성의.


"저는 의학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어요. 잘못 찾아오신 것 같네요."


 

처음 보는 지도에 당황스러운 기분이 들 뿐, 거기서 무언가를 알아낼 수는 없었다.


"그렇게 속단하지 말고, 조금만 더 생각해 보게. 오죽하면 내가 이까지 찾아왔겠나? 이대로라면 우리 인류는 전멸일세. 조금만 더 생각해 봐 주게."


 

망할 유교 사상이 기본 의식에 탑재되어 있지만 않았다면, 약탈자의 뻔뻔스러운 부탁을 듣자마자 디스플레이를 확 집어던져 버리고 싶었다.
내가 대답없이 그를 노려보자, 노인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갑자기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자들이 더미가 되어가고 있어. 손 쓸 길이 없단 말이야. 이대로라면 키퍼가 전 국민을 학살해야 할 판이야."


저렇게 축 늘어져서 설명한다 한들 동정심은 조금도 생기지 않았지만, 호기심이 고개를 들었다. 더미? 날 공격했던 그,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얼굴을 하고 있던 그 자들 말인가?


 

"뭔가 다른 특징은 없나요?"


어색한 표정으로 그는 고개를 저었다.


 

"발병하기 전에 아무런 징조가 없어. 주위 사람들의 증언을 들어 봐도... 방금 전까지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갑자기 더미가 되어버린다고 하니 미칠 노릇이지."


나는 디스플레이의 이곳저곳을 꾹꾹 눌러보았다. 정말 내가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서 찾아온 것도 아닐 테고, 생각하는 시늉이나 할 참이었다.


 

"원래 그 더미라는 게 어떻게 생기는 거죠?"

그는 어디까지 말해야 좋을지 망설이는 듯 보였다.

"그게, 지구를 카피할 때... 그러니까... 카피가 뭔지는 알지, 아가씨? 다른 별을 카피할 때 부수적인 지식도 받아 들여. 가능하면 언어라던가? 지금 이브와 내가 자연스럽게 말이 통하는 것도 그런 이유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남아 있는 자원들이며 건물들을 활용할 때 아주 조금이지만 불편함이 따르니까. 각 행성에 남아 있는 기술을 살피는 재미도 쏠쏠하고. 모든 것의 기본은 언어니까 말일세. 그런 갖은 지식을 담기 위한 그릇이 필요한 데, 아무리 좋은 컴퓨터... 지구에서 말하는 컴퓨터에 가장 가까울 거라고 생각해. 그런 시스템이 있더라도 불가능하더군. 그래서 이용하기 시작한 게 인간의 뇌지."

 

비인간적인 논리에 입이 떡 벌어졌다.

살아있는 인간을 플로피 디스크 마냥 사용하고 있다는 소리잖아?

 

"젠장, 그 인간들이 그렇게 미친 사람처럼 돌아다니는 것도 이해가 가는 군요."

"뭐, 그렇지. 아무래도 인간 한 명이 담을 수 있는 뇌용량을 최대한 활용하는 거니까. 잠재능력까지 모두. 그러니 나중에 그 지식을 모두 쏟아내고 난 후에는 저런 껍데기가 되어 버리더군. 우린 더미라고 부르지."

 

기분이 나빠 소름이 오싹 돋았다.

 

"원래 더미들은 아무 것도 인식하지도 못하고, 기껏해야 걷거나 침을 흘리면서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지. 그런데 이번에는 달라. 지구라는 행성이 특별한 게 뭔지 나는 잘 모르겠군. 이번에는 뭔가 목적을 가진 것처럼 행동한단 말이야. 뭔가 인식하거나 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아. 뭔가를 찾는 것처럼 굴더라고. 그게 뭔지는 나는 모르지만."

"뭔가 다른 특징은 없나요? 평소와는 다른."

 

아, 맞다.

노인은 안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숫자를 읽었다.

 

"18591122"

"네?"

"이게 이번에 그 더미들이 공통적으로 중얼거리는 소리야. 아마 정보를 옮겨 담으면서 오류가 있어서 그렇게 된 것 같기는 한데, 인간의 뇌가 오류코드가 설정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똑같은 소리를 중얼거리는 더미들을 보니 내가 다 오싹하더군."

 

나는 그의 수첩에서 그 페이지를 찢어내었다.

18591122? 무슨 숫자일까?

 

"그럼, 조금 더 생각해보게. 뭐라도 좋으니 생각나는 게 있으면 키퍼에게 말하면 될 걸세. 아니면 내게 전화하거나. 지구의 문명 중에서는 전화라는 게 참..."


노인은 말하다 말고 내 눈치가 보이는지, 전화기를 슬쩍 내 손에 쥐어주면서 자신의 번호를 가르쳐 주더니 나가버렸다.

 

삑!
디스플레이에서 경고음같은 소리가 나더니 빨간 점이 하나 더 늘어났다.


"아, 정말 이 외계인이나, 저 외계인이나 염치라는 걸 몰라. 미쳐버리겠네."


냉장고에 몇 개 남지 않은 과일 중 하나를 꺼내 와작 깨물면서 디스플레이의 이곳저곳을 눌러보고 있는데, 때마침 키퍼가 돌아왔다.


 

"잘 있었나?"


그는 나를 본 척도 않고 씻으러 욕실로 향했다.


 

"잠깐만요, 이것 좀 어떻게 해 봐요."
"뭘 말이지?"


그는 장검을 풀어 바닥에 내려놓고, 피곤한 얼굴로 저벅저벅 다가왔다.


 

피 냄새.
온통 까만 옷이라 순간 눈치 채지 못했지만, 저 옷에는 수많은 더미들의 피가 묻어 있을 거다.


그는 순간 확 찌푸려진 내 얼굴을 보더니, 알아듣지 못할 언어로 한숨 섞인 말을 지껄이며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와삭.
사과를 한 입 더 베어 물었다. 내가 잘못한 것은 없는데도, 왜 이렇게 짜증이 날까?


머리에 수건을 뒤집어쓰고 나온 그는 그는 내 요청대로 뭔가를 업데이트 하더니, 디스플레이에 표시되는 언어가 한국어가 되도록 설정해 주었다. 아까 욕실에 들어갔다 나올 때부터 내가 묻는 말에도 시선을 잠깐 던질 뿐 아무 말이 없었다.
딴엔 열심히 일을 하고 온 건데, 내가 벌레 보듯 했으니 기분 나쁜 심정도 이해한다. 하지만 나는 총기 반입도 안 되는 나라에서 상식적인 수준의 윤리의식을 가지고 살아왔다. 살인을 보면 혐오감이 들 수 밖에 없다.


 

그런 이야기를 일일이 해주어야 할 까닭은 또 뭔가 싶어 나도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거실에는 불편한 정적만이 가득했다.


삑, 삑! 빨간점이 늘어날 때 나는 경고음만 이따금씩 울려 퍼졌다.

 

 

 

 

 


#.9

 


쿵.
순간 땅이 울리는 기분이 들었다.

 

 

머리의 물기를 털어내던 키퍼가 칼자루를 쥐고 현관으로 날 듯이 다가갔다.

 


“여기는 안전하다면서요?”

 


그 근거 없는 말을 철썩같이 믿고, 별 다른 잠금쇠도 없는 이 건물에서 며칠을 경계없이 홀로 잠들었었는데. 나쁜 인간. 거짓말쟁이. 사기꾼.

 


“역시, 이번에는 뭔가 달라.”

 


그는 나무문 앞에 서서 으르렁거릴 듯이 목울대를 울렸다.

 


쿵! 쿵!

왼쪽? 아니, 전부.

소리의 발원지가 사방에서 다가오는 느낌이 들었다. 지축이 울렸다.

 

 

“남아 있는 더미들이 한 200마리 정도 되는데, 전부 이 곳에 있나 보군.”

 


삑!

또 새로운 경고음이 울렸다. 반사적으로 지도를 돌아보았다.

 

 

“갈라파고스 제도?”

 


지도가 지구의 그것으로 바뀐 뒤, 랜덤하게 발생한다고 생각했던 빨간점들은 일정한 지점 부근에서 자주 출몰하고 있었다.

 


“여기가 갈라파고스 제도에요?”

나는 한 번도 가 본적 없는 해외에 내가 있다는 사실에 어이가 없어 지도를 흔들며 따졌다.

 


“여기? 아마 그럴 거다. 대충 비슷한 이름이었던 것 같군.”

 


그는 여전히 문짝과 싸우기라도 하듯, 나무문을 빤히 노려보고 서 있었다.

 


쿵! 쿵!

건물이 흔들렸다.

 


“젠장, 여기에 들어올 수 없으니, 통째로 부술 셈인가. 단순하니 더 무섭군. 제길.”

 


키퍼는 내 근처에 놓여 있던 총을 가리켰다.

 


“저걸 들고 있어. 어떻게 쏘는지 알지? 때가 되면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겨. 네 그 같잖은 윤리관을 주장하려 들다간, 3초 만에 저 세상에서 후회하게 될 거야.”

 


그는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총을 쥐기를 주저하는 나를 노려보고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3초

2초

1초

 


문이 열렸다 닫히는 아주 짧은 시간. 3초 동안 보인 그 곳의 모습은 지옥도와 같았다. 그는 뛰쳐나가면서 칼을 휘둘러 한 마리의 더미를 정수리에서부터 두 쪽으로 갈라놓았다. 또 하나의 머리를 베어내는 모습은 문이 닫힘과 함께 곧 보이지 않게 되었다. 선명한 피의 이미지가 망막에 남았다. 붉음.

붉지 않다면 좋았을 텐데. 저런 자아를 잃어버린 괴물들의 피가.

 


“...122!”

 


한 입인 것 처럼, 목청 높여 더미들이 다 함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인간의 목소리보다는 차라리 기린이나 코끼리의 높은 울음소리 같았다.

 


“18591122! 18591122!”

새로 태어난 더미들이 외친다고 했던 바로 그 말이었다.

 


“젠장! 마치 살아 있는 녀석들처럼 굴지 말라고! 어차피 되돌아오지 않을 거잖아!”

문 밖에서 키퍼의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그가 느끼고 있을 괴로움이 고스란히 그의 외침에 담겨져 왔다.

 


계속해서 마치 건물이 무너질 듯이 울렸다.

 


“1859...11...22?”

 


계속되는 그들의 외침을 가만히 듣다가 문득, 아주 낯이 익은 숫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구성이 마치 날짜 같았다.

 


“1859년, 11월, 22일...?”

 


설마...

나무로 덧대어져 밖을 내다볼 수 없게 단단히 못질된 창문을 힐끗 바라보았다.

 


온 몸에 다리가 많은 벌레가 달려 올라가는 느낌이었다.

 


이것이 “지구”가 나를 데려온 이유인가.

 


나는 문을 벌컥 열어 젖혔다.

 


“18591122! 18591122!”

 


기이한 합창 소리가 귀를 때렸다. 고작 얇은 나무문 하나가 이렇게 커다란 공명을 가로막고 있었단 말인가? 문을 통하지 않고 들리는 소리의 크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뭐야? 썩 안 들어가?”

 


살육을 멈춘 살인마가 얼굴에 새빨간 피를 뒤집어쓰고 나를 노려보았다. 분명 분노에 가득 찬 얼굴인데도, 어쩐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지금도 진화하고 있다는 이런 생명관에는 장엄함이 있다.”

나는 시끄러운 합창 속에서 그에게 말했다.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땅을 두드리는 더미들은 나를 보자 더욱 흥분한 듯 했다. 키퍼는 그 자리에서 버티기도 힘들어 점점 내 쪽으로 물러났다.

 


“뭐라고 중얼거리는 거야?”

 


나는 잔뜩 가까워진 그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원래 극소수 또는 하나의 형상에 몇 가지 능력과 함께 숨결이 불어 넣어졌고, 그 뒤 이 행성이 정해진 중력 법칙에 따라 계속 도는 동안에, 처음에 그토록 단순했던 것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경이로운 무수한 형상들이 진화해 왔고 지금도 진화하고 있다는 이런 생명관에는 장엄함이 있다.”

 


그는 내 말을 알아들은 듯했다.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그는 나를 노려보았다.

 


“종의 기원을 말하는 건가?”

 


나도 그를 마주 쏘아보았다.

 


“18591122, 종의 기원이 출간된 날이에요. 달리 생각할 수가 없어요. 이건 지구의 경고에요.”

 


그는 섯불리 덤벼들려는 두 개의 팔을 허공으로 날려버리고 잽싸게 뒷걸음질 쳐 문 안으로 들어왔다.

 


탁.

아주 힘 없이, 가볍게 문이 닫혔다.

 


그 뿐인데도 놈들은 쉽게 접근하지 못했다.

 


쿵! 쿵! 쿵!

더미들은 이제 본격적으로 건물에 몸을 부딪혀오기 시작했다. 천정이 마구 흔들렸다.

 


“좀 더 자세히 말해봐.”

 


키퍼는 가뜩이나 주름이 여럿 생긴 이마에 깊은 굴곡을 더했다.

 


“뭐,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요.”

 


사족을 더 달았다간 눈빛에 쏘여 죽을 것 같아 당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계속, 왜 내가 여기에 왔는지를 생각해 봤어요. 만약 내가 지구의 입장이라면, 점점 더 내가 미쳐가는 것 같지만, 왜 무기물의 입장을 생각하는지는 제쳐두고.... 좀 더 제대로 된, 아는 게 많거나 지위가 높거나 힘이 센 사람을 데려왔을 것 같았거든요. 만약에 제가 최초의 선례이고, 정말 지구가 데려온 이브라면 말이에요.”

아마 우연히 일어난 사고인 게 아닐까, 하는 게 좀 더 가능성이 높겠지만. 하는 사족은 속으로만 덧붙였다.

 


“그렇다면 그건 지구의 의사를... 대변이라고 할까 번역이라고 할까? 의사를 전달해주는 웅변인이 필요했던 것뿐인 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봤어요.”

“그래서?”

 


성급하게 칼자루를 두들기는 그의 모습에서 초조함이 드러났다.

 


아마 그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겠지.

 


“이건 경고라고 봐요.”

“무슨?”

 


이제 그는 거의 분노와 당혹감으로 질려 있었다.

 


“종의 기원. 적자생존의 법칙. 강한 자가 살아남는 거죠. 그리고, 지구는 말하고 싶은 거죠.”

 


파르르 떨리는 그의 입술을 피해 눈을 돌렸다. 삑! 또 하나의 더미가 갈라파고스 제도, 다윈이 종의 기원을 연구했던 그 곳에서 생겨나고 있었다.

 


“당신들, 당신의 종족보다 더 강한 자는 지구라고.”

 


그리고 당신들은 살아남지 못할 거라고.

뒷 말은 속으로 삼켰다.

 

"왜 그런 눈으로 봐요? 자유 경쟁. 좋은 유전자를 가진 자가 살아 남는 거라면서요?"

그가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자, 그는 삼키지 못할 돌을 삼킨 양 불편하게 목울대를 움직였다.


쿵! 쿵!

끼이이이이익.

 

건물이 비명을 내지르는 삐걱거리는 소리와 더미들이 건물에 몸을 부딪쳐 만들어 내는 소음이 뒤섞였다.

 

"일이 어렵게 됐군."

 

키퍼는 손이 근질거리는지 칼자루를 쥐었다가도, 내가 떨리는 두 손으로 리볼버를 꽉 쥐고 사방을 둘러보는 모습을 보더니 칼을 놓고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쿵!

오른쪽 천장의 갈빗대가 떨어져 내렸다.

 

집 밖에 있는 것들을 경계하는 데 온 신경이 다 쏠려 있었던 탓에, 바로 옆에서 떨어진 것에 찻잔이 박살나자 온 몸의 털이 다 일어났다.

 

"으악, 엄마! 엄마! 으아악!"

 

이미 떨어지고 난 뒤에야 뒷걸음 치다가, 떨어진 통나무에 걸려 자빠졌다.

틀림없이 아주 한심한 몰골이겠지.

부끄러워서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얼른 일어나. 여기서 나가자."

"어떻게 나가게요?"

 

자빠질 때 부딪힌 무르팍을 문지르며 슬금슬금 일어나는데, 발에 수화기가 채였다.

아, 맞다! 전화!

 

"전화! 전화해야 되요!"

 

그는 내가 높이 들어올린 까만 것을 흘끗 돌아보았다.

 

"그게 당장 네 목숨을 살려줄 게 아니라면 나중에 해. 이 목조 건물은 1분도 더 버틸 수 없어 보이니까."

"그래도!"

 

쿵! 쿵! 쿵! 쿵!

 

더미들이 몸을 날려 건물을 부수려는 시도가 점점 잦아지고 있었다. 온 건물이 같은 박자에 흔들렸고, 그 소리 사이로 숫자를 외치는 소리가 아스라하게 들려왔다.

 

"별 수 없지. 총질도 못하는 걸 데리고, 이런 고립된 위치에 있었던 내가 미친 놈이지. 이제 와서 다른 뾰족한 수가 없어. 지원을 요청한들 지구에서 만든 물품들로는 너와 나까지 같이 날려버리는 게 최선일 거다."

 

지구에서 만든 물품밖에 가진 게 없는 주제에, 말 끝마다 지구를 비하하는 건 또 뭔가.

 

"업혀."

 

그는 장검집을 앞으로 돌려매더니 잘 고정시키고, 내게 척척 다가오더니 내 앞에서 등을 보이며 허리를 숙였다.

 

"싫어요."

"죽고 싶어?"

"업힌다고 살 거라는 보장 있어요?"

 

이게 억지라는 건 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목숨을 빚지기는 싫었다.

 

내가 아니라면 그는 홀로 이 많은 더미들을 혼자 능히 상대하고도 상처 하나 없을텐데.

다른 사람을 등에 업고 저 긴 칼을 과연 휘두를 수 있을까? 저번에 여섯 번의 살인을 저지르고도 평온했던 첫만남처럼, 지금도 그렇게 사지 멀쩡한 모습으로 살아나갈 수 있을까?

 

그가 앞만 바라보고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어도, 이제 그의 표정을 상상할 수 있었다.

틀림없이 나를 죽여버리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겠지. 도끼눈을 뜨고, 곧 울부짖을 짐승처럼 윗니와 아랫니를 앙다물고서.

 

"한 번 뿐이다."

그는 의외로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게 닿는 게 거북스럽다는 건 알고 있다. 이 일이 지나서 무사히 살아나가면 더 이상 그런 불유쾌한 일을 강요하는 일은 없을 거다."

아.

 

분명 그를 꺼려했던 것도 나고, 살인마에게 갖는 생리적 거부감으로 그를 혐오했던 것도 나다.

나는 그는 뚜렷하게 기어하고 있는 그 사실을 나는 미처 생각도 못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런 게 아니라고 말을 해 주고 싶은데, 내가 이전에 했던 모든 행동을 부정하는 말이 될까 두려워 입을 다물고 말을 아꼈다.

 

"응. 알았어요."

 

지도가 표시되어 있던 화면을 접어 원래 있던 케이스에 넣고, 수화기와 함께 가방에 넣었다. 애초에 내가 가진 건 통조림과 수화기 네 개가 든 가방이 고작이었으니 더 이상 챙길 것도 없었고, 미련도 없었다. 가벼운 가방을 메고 리볼버를 손에 쥐었다.

 

그의 등은 꽤 넓었고, 따뜻했다.

 

"생각보다 무겁군."

 

진심인지 농담인지, 끙- 하는 소리를 내며 등을 펴는 그가 얄미워 목을 꽉 조르며 매달렸다.

 

"더미들에게 죽느냐, 이브에게 목이 졸려 죽느냐의 시간다툼이라면... 나는 후자에 걸겠어."

"정말 죽고 싶어요?"

이런 와중에 그가 농담할 여유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사지로 가는데 남의 등에 업혀야 하는 내 처지가 한심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다.

내 가치는 지구의 뜻을 전달하는 데서 이미 없어졌을 지도 모르는데.

 

"가자."

 

쿵! 하는 더미들의 지축을 뒤흔드는 부딪힘과 함께 그는 땅을 박찼다.

문을 열자마자 더미들이 개미떼처럼 몰려왔다.

 

"18591122! 18591122!"

 

이제 그 뜻을 알고나니, 저 말을 듣는 것은 그 자체로 공포였다.

 

지구는 이제 그 지식을 전파받은 모든 자들의 뇌에 간섭할 수 있는 모양이었고, 종의 선택을 받지 못한 환경에 '부적합한' 종들은 모두 도태되고 죽게 될 것이다. 더미의 형태로.

간단하지만, 그 현상을 막을 기재가 없으니만큼 가히 엄청난 공포였다.

 

그는 나를 업고도 가벼이 몸을 놀렸다. 달려가던 힘을 실어 가장 앞에 있던 더미 두엇에 몸을 세게 부딪히자, 도미노마냥 더미들이 우르르 무너졌다.

 

쿵!

 

건물의 반대편에서 큰 소음이 들렸다.

 

쿵!

 

끼이이이익!

 

그의 등에 매달려 뒤를 돌아보니, 산장은 가히 폭풍 앞의 조각배나 다름없었다.

 

마치 포크레인으로 한 움큼씩 파 낸 것 마냥 여기저기 덧댄 나무조각이 한움큼씩 떨어져나가고 없었고, 천장은 우리가 빠져나온 뒤 무너진 모양인지 뚜껑도 없는 앙상한 울타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지체했더라면.

가슴이 섬칫했다.

 

차가운 것이 손과 볼에 튀었다.

붉은 것.

 

이제는 그를 비난할 수가 없다. 마음의 여유가 없으니 울 수도 없었지만, 내가 믿었던 세계가 부숴져 나가는 아픔이 가슴을 찔러왔다.

아무리 살인자라 한들 인간이 다른 인간을 처벌할 권리는 없다. 사형이라는 제도는 없어져야 한다. 낙태라는 제도는 없어져야 한다. 인간은 존엄을 가진다.

 

그 모든 나의 가치관은 더미들이 나를 향해 눈을 부릅뜨고 덤벼드는 모습 앞에 부서져 내렸다.

 

나는 감았던 눈을 똑바로 떴다.

언제까지나 과거의 가치관에 의존할 수는 없잖은가.

사람은 변한다. 변하지 않는 기저는 있어 마땅하지만, 모든 것이 변하지 않는 인간은 그저 도태된 것일 뿐이다.

 

그가 휘두르는 장검과, 그에 부딪쳐 사정없이 찢겨져 나가는 살점을 노려보았다.

 

탕!

 

손톱을 세우고 빈틈을 노리는 더미를 향해 리볼버를 쏘았다. 머리가 으깨져 "18591122"를 중얼거리는 입만 움직이는 모습이 가히 비현실적이었다.

 

"미친 여자야! 뭐 하는 짓거리야?"

 

키퍼가 비명처럼 고함을 질렀다.

 

총의 격발 순간, 손목이 끊어지는 줄 알았다. 이렇게 반동이 심하면 미리 얘기라도 해줄 것이지.

 

"귀청 찢어지는 줄 알았잖아! 젠장, 미리 예고라도 할 순 없냐?"

 

나는 그의 고함 소리에 귀가 뜯겨 나갈 것 같으니 쌤쌤이다.

 

그가 한 마리를 다시 베어 넘기는 동안 뒤를 슬쩍 돌아보았다.

 

겨우 2,3미터? 그 동안 고작 그만큼 움직였다.

쓰러져 나간 더미는 겨우 10마리 남짓. 남아있는 더미는 200마리 남짓.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먼저 가요."

 

"뭐?"

그는 또 다른 더미의 배를 갈라놓으며 고함쳤다.

 

"먼저 가라고요!"

 

이 상황 속에서 내가 확신한 것이 하나 있다면, 더미들이 노리는 건 애초에 나라는 것이다.

처음부터 그랬다.

 

지금 이 더미들 손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내가 집에 머물러 있을 때는 도끼며 방망이를 쥐고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원래는 목적도 없이 배회하는 생물일 뿐이었다던 더미들이 나를 노리는 것이라면,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거다.

 

나는 함께 죽느니 거기에 가능성을 걸기로 했다.

 

그의 앞섶에 수화기를 찔러 넣어 주고 그의 등에서 뛰어 내렸다.

 

"미쳤어?"

 

키퍼는 칼을 휘두르는 것도 잊고 뜨악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순식간에 나는 더미에게 팔을 붙들렸다.

 

"야! 야! 해원! 이브! 야!"

 

더미들은 키퍼에게는 관심이 없는 듯 그를 스쳐 나에게 달려들었다. 그와 나의 거리는 순식간에 벌어졌다. 그는 더미들이 그리는 원 안에서 파도에 쓸리듯 사라져갔다.

 

이렇게 쉬운 것을. 처음부터 그들의 목적은 나였는데.

 

더미들이 내 몸에 이를 박아 넣는 것이 느껴졌다.

목, 무릎, 손목, 팔, 배.

 

그 와중에 총은 어디에 떨어뜨렸는지 주먹을 움켜쥐었을 때는 이미 허전한 빈손이었다. 혀를 찼지만, 이미 선택지는 물건너 갔다.

 

"배팅을 잘못 했나 보네. 종의 기원 좋아하시네."

 

점점 의식이 희미해져 가는 와중에 마지막으로 한 생각은,

내가 맨 가방에서 나는 삑, 삑 하는 경고음이 아주 익숙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마치, 평생을 걸쳐 들어온 소리처럼.

 


#.10


여기는?

 

"크음."

 

고통에 못 이겨 눈을 떠 보긴 난생 처음이었다. 팔, 다리, 복부, 머리, 목. 아프지 않은 곳이라곤 없었다. 두통이나 복통이 생겼을 때의 아리아리한 통증이 아니라, 문이 닫힐 때 실수로 발가락을 끼워 넣었을 때 얻게 되는 그 딴 류의 고통이었다.

 

그래, 고통이라는 말이 정말 적합하다.

 

"정신이 들어?"

 

초점이 안 맞아 시야가 희뿌옇게만 보였다. 시력을 잃어버린 건가, 덜컥 겁이 나 눈에 잔뜩 힘을 주고 노려보았다.

 

"누구?"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시야가 트였다. 오른쪽 저 끝에 있던 사물과 왼쪽 저 끝의 시계에 잡히던 사물이 사실은 하나였던 모양으로, 점점 퍼져있던 물건들이 점차 윤곽이 뚜렷해졌다.

 

"나다."

 

머리가 다 벗겨진 노인과, 산장에 찾아왔던 그 동료 노인이었다.

 

시야가 트이자, 가장 먼저 찾아온 것은 실망감.

누구? 누굴 기대했던 거지?

 

기가 막혀서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어떻게... 된 거죠?"

 

노인은 나를 일으키더니 등받이를 수직으로 세워주었다.

하얀 붕대로 빈틈없이 동여매져 있는 내 팔다리가 보였다. 발가락과 손가락을 까닥거려 보았다.

 

"신경이 손상된 곳은 없으니까 안심해."

 

그러고 보니 노인의 손에는 다윈의 책이 들려 있었다.

'자연 선택 혹은 생존투쟁에서 유리한 품종의 보존에 의한 종의 기원에 대하여(Natural Selection 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 or the Preservation of Favoured Races in the Struggle for Life)'.

 

흔히 '종의 기원'이라고 줄여 부르는 그 책이다.

 

"들었군요. 키퍼에게서."

 

그 책이 손에 들려 있다는 건, 무슨 말이든 들었다는 거겠지.

 

"그래. 그 자가 얼마나 온갖 호들갑을 다 떨며 전화하던지, 우리는 정말 큰 일이라도 난 줄 알고 온갖 타격대에 군용 헬리콥터를 긁어 모아서 갔단 말이야. 그런데 가고 보니 벌써 상황은 다 끝나 있더군. 뭐, 하긴 덕분에 네 역할을 알아내긴 했지만."

 

내 역할? 나는 더미들의 말을 전해주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었나? 지구의 인간이 아니고서야 다윈에 대해서 그리 잘 아는 자는 없을 테니까.

머리가 다 벗겨진 노인의 말을 받아 다른 노인이 입을 열었다.

 

"너는 아마 그 지구라는 고약한 행성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시험일 거다. 아마 틀림없을 테지. 정말, 미치광이 같은 행성이야."

 

행성은 무생물이다. 미치광이 같다는 수식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이제 와서는 무엇도 확신할 수 없게 되었지만.

 

"그게 무슨 말이죠?"

"어디까지 기억하지?"

 

아마 우리나라 말과는 다른 화법이 이 외계인들의 세계에 있는 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자꾸 질문에 질문으로 응할 리가 없질 않나.

 

"더미들에게 물어뜯길 때 말인가요? 아니면 물어뜯길 때의 기분이 궁금해요?"

 

나는 내게 질문한 정장 입은 신사를 노려보았다. 악의적인 놈.

더미들의 숫자가 일정 수치를 넘어가는 순간에도 보초 하나 붙여주지 않은 이놈들의 의도가 알만했다. 궁금했던 거겠지. 나와 더미가 접촉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파렴치한 노인네들.

 

그는 내 눈빛이 우스운지 피식 웃을 뿐이었다. 눈을 피하는 상식적인 행동도 없었다.

 

"그래. 더미들이 이브 양을 뜯어먹고 난 뒤의 반응이 인상적이었어. 피를 한 방울 목으로 흘려 보내자, 그들은 더 이상 덤비지 않았어. 마치 온순한 양처럼 굴었지. 모두가 말이야. 결과적으로 말하면 200명에게 물어 뜯긴 셈이니 몹시 아프긴 할테지."

 

내 피?

피가 무슨 해독제의 역할을 하기라도 한 건가?

 

"아까도 말했지? 지구라는 행성이 참 교활해 빠졌다고 말야. 왜 이제야 눈치챈 건지 모르겠어. 갈라파고스 제도에서 그렇게 기형적인 더미 발생이 있었는데도 말이야."

 

그는 이제 내 눈에도 익숙한 케이스를 꺼내 흔들어 보였다.

 

"이 소리 들려?"

 

삑. 삑. 삑.

 

그제야 내가 깨어난 순간부터 계속해서 경고음이 울려퍼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인식했다.

 

"인간들이 예고도 없이 더미로 변하기 시작하자 대피소에는 대공황이 찾아왔어. 지금 사람들은 거기서 꺼내달라고 난리도 아니야. 벽을 다 집어 뜯을 기세지. 하지만 그 밖에 있는 더미들을 본다면 내 오체를 분시해 놓을 게 틀림 없으니 당분간은 그대로 두기로 했어."

 

그의 손에서 케이스를 받아 들고 뚜껑을 열었다.

삑. 삑.

 

그 사이에도 계속 생겨난 붉은 점들은, 이제 이탈리아의 한 지방에 몰려 있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왜? 왜 내가 이런 역할인 거지?

 

깨달음은 금방 찾아왔다.

 

"여기는 이탈리아죠?"

 

두 노인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병실의 한 구석에 놓인 내 심장 박동을 나타내는 기계를 가리켰다.

 

"이 경고음과 저 기계가 내는 소리는 같을 테고요. 내 심장이 뛰는 순간마다 하나의 인간이 하나의 더미로 변하는 거겠죠."

 

나는 내 주위에 더미를 만들고, 키퍼는 그 더미를 죽였다는 건가.

하. 하. 하.

 

"정말 재미없는 농담이네요."

 

삑. 삑.

나는 침대 아래로 디스플레이를 확 집어던졌다.

 

유연하게 접히던 디스플레이도, 그 충격에는 별 수 없는지 와장창!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팔에 붙은 박동을 측정하는 것 따위, 링겔 바늘 따위를 모두 집어 뜯어 버렸다.

 

"그래서 어쩌자는 거죠? 절 죽일 건가요? 내가 살아있는 한 계속 생겨날 테니까?"

 

버럭 솟아오른 짜증을 그대로 뱉었다.

 

고함과 함께 눈물이 자꾸 치솟았다. 이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약자가 되고 싶지 않았는데. 외부 상황이 모두 내 손을 벗어나면, 적어도 내 몸을 컨트롤하는 것만이라도 온전히 내 소관이었으면 좋겠다. 팔과 다리는 굽히기도 힘들고, 내 눈물샘 또한 그렇다.

 

"아냐. 자네를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 보내기로 했네."

 

지금, 뭐라고 했지?

 

"그 말, 진심인가요?"

 

썩어 빠져 새카만 색으로 썩어가던 그네들의 행성 사진이 아직도 눈 앞에 생생한데? 왜 그냥 날 죽여버리지 않는 거지?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이게 지구가 주는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이 자꾸 든단 말이야. 지금도 이런데, 만약 소중한 자식을 하나라도 잘못 죽였다가 어떤 일이 생길지 상상하면 섬뜩해서 말이야."

 

그는 정말 소름끼친다는 듯 허공에 손사레를 쳐 보였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지. 전 국민이 더미로 변해버리면 왕을 해먹는 재미도 없을 테니까."

 

이제 와서 그들이 왕이 아니라 신이라 해도 별로 달라질 것은 없었지만, 조금 신기하긴 했다.

왕이라는 존재가 이렇게 치졸하다는 것이. 키퍼에게 모든 걸 맡길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그럼 내가 떠나면..."

 

왜 이런 순간에 가장 먼저 생각나는 질문이 이런 것일까.

 

"내가 떠나면 더미는 더 이상 생겨나지 않잖아요. 키퍼는 뭘 하죠?"

 

그들은 이상한 질문이라도 들은 것처럼 서로를 마주 보았다.

 

"다른 별을 카피하면 새로운 더미가 생겨나잖아. 그들을 처리해야지."

 

아.

이자들이 그런 짓을 계속해나가지 않으리라고 한순간이라도 생각한 내가 어리석었지.

 

"그래요. 알았어요."

 

뭘 기대했는지 모르겠다.

병실 문을 곁눈질로 쳐다보았다. 굳게 닫혀 있었다.

 

"갈게요. 지구로."


#.11


번잡한 꿈을 꿨다.

꿈에 지독히 쫓긴 것 같았다.


“개 꿈.”

꿈을 털어 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침 6시 반이었다.

 

문을 열자마자 시끄러운 아침 뉴스 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잘 잤어?"

 

아빠는 TV에 나오는 방화 기사에 정신이 팔려 건성으로 인사를 건넸다.

 

"엄마는?"

"아침 차리고 다시 잔다."

 

오빠는 이미 밥을 다 먹었는지, 마지막 한 숟가락을 입에 우겨넣고는 서둘러 가방을 메고 현관을 나섰다.

 

"잘 다녀와."

"으우웁!"

 

당최 뭐라는 건지 모르겠어서 대충 손을 흔들어 주고 따끈따끈한 미역국 앞에 앉아 밥 숟가락을 들었다.

어쩐지 이 밥상이 너무 낯이 설었다.

 

현관을 나서 아파트 단지를 지나, 마을버스 정류장에 멈춰섰다. 드문드문 서고 앉은 사람들이 일제히 시선을 돌려 내게 다가오는 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아마 험상궂은 인상 때문이겠지. 또는...

 

"이브! 너 잘 만났다! 지구에 오고 난 뒤로 이렇게 날 피해다니면 못 만날 줄 알았나? 그 미친 왕과 장로들을 무슨 수로 구워 삶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감히 이딴 행성으로 데려와? 무슨 짓거리야!"

 

이크. 생각보다 꽤 오랫동안 잘 피해다녔다고 생각했는데.

 

뚜벅뚜벅 내게 다가온 그 남자는 훤칠한 키에 늘씬한 정장을 빼 입고, 손에는... 장검을 들고 있었다. 그러니 가는 곳마다 시선이 집중되지...

 

"미안. 대신에 선물이 있으니까 화 풀어요."

 

나는 억지로 착해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그의 손에 억지로 종이 쪽지를 쥐어 주었다.

 

"김... 빙신?"

 

그가 쪽지를 펴들고는 인상을 있는대로 구겼다.

 

"그거, 얼음의 신이라는 뜻이에요. 내가 지어주는 이름이야. 당신, 이름도 없잖아요."

 

"빙신... 얼음의 신이라..."

 

그는 이름이 만족스러운 듯 되뇌어 보았다.

피를 일정량 제공해 주는 조건으로 키퍼를 이쪽으로 데려온 건 잘한 결정이었던 것 같다.

아버지의 죗값을 치르며 평생을 살기에는 너무 순수한 인물이다.

 

"그러니까, 꼭 다른 사람을 만나면 이름을 소개해야 되요. 그게 지구에서의 예법이거든요. 저는 빙신입니다. 하고 말이에요."

 

그는 무뚝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는 나도 알아."

 

아, 당분간은 질리지 않을 것 같다.

 

-Fin-

  • ?
     손님 2013.10.21 21:37
    충격의 공포의 첫번째 참가자에게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__)
    줄여서 충공콰 센세에게 아리가또 큭큭 (야레야레)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며, 또 다른 감사하는 사람에게 듣기로는,
    글이란 얼싸얼싸 하는것도 좋지만, 보고 느낀 것을 솔직하게 감상을 들려주는게 정말 좋다고 들엇습니다.
    개인적으로 그 부분은 동의하지만, 사실상 나는 매몰찬 인간인가... 싶어서 그런 의견을 쓰기는 쉽지 않지요
    그건 몹시 우유부단한 저에게도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느낀 것을 최대한 말해보고 싶습니다.
    콰선이라면 그 편을 더 좋아할 거라고 생가합니다 데헷


    일단 이번 방어전은 승리할거라고 믿었던 이유는
    제 이야기가 재미있을거라는 생각 + 여유롭게 다듬어서 올려야지 = 방어전 성공이었는데, 후자가 완전 실패했고,
    그 부분을 콕 찝어 주셔서 많이 반성 중임다 ㅠㅠ
    여튼 이게 중요한건 아니고,

    승리할거라 믿은 이유중 하나는,
    글의 시작이 불순한 의도가 섞여있기 때문에 콰선의 글이 안 나올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임다
    하지만 중간에 글을 갈아엎고 완결까지 낸 것은 역시... 대단하다고 생각함다

    음...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종의 기원.
    사실 다윈의 종의 기원을 보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크게 글에는 상관이 없지요

    종의 기원은 분명 글에서 가장 큰 하나의 키였을테고, 그 키를 지니고, 풀어줘야하는 역활은 주인공 해원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18591122 라는 부분은 너무 약했던게 아닐까 합니다.
    네, 저는 떡밥을 무척이나 사랑하는데, 18591122는 뭐랄까...
    18591122가 뭔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18591122의 떡밥을 푸는 순간은 그렇게까지 시원한 느낌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종의 기원의 출판년도를 기억하는 고등학생은 분명 있고, 그것에 대한 트릭은 충분히 괜찮았지만...
    제가 그 책을 보진 못했지만, 그것이 아니라도 좀 더 떡밥으로 쓸 요소가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18591122 보다는 갈라파고스 쪽이 좀 더 와닿고 좋았슴다
    갈라파고스라는 부분이 행성 B-254와 잘 어울렸기 때문인거 같슴다
    ...무엇보다 맨처음 나타날때부터 18591122를 외쳐주었으면 좋았을텐데...

    에... 그리고 스토리에 꼬투리를 잡는건 아니지만...
    피의 일정량을 제공으로 키퍼를 데려왔다는 부분도 여러 부분에서 봤을때 큰 해소감을 주진 않지만,

    키퍼가 지구로 같이 오는 엔딩 자체가 기분좋기 때문에 그 부분은 타협을 함니다.

    에... 솔직히 문장은...
    나보다 잘 쓰기 때문에 여러부분에서 이부분은 이렇구나 느끼는 것만 있지...
    뭐라 깔 부분이 마땅치가 않슴다

    그리고 자꾸 꼬투리만 잡는 감상이라서 미안한 느낌만 들지만 ㅠㅠ
    주인공이 이브라는 점도 와닿는 부분이 없는거 같슴다...


    그래도 역시 문장은... 아는 만큼 보이고, 그만큼 쓸수 있다는 것이 느껴짐니다
    저는 국어부터해서 책도 너무 안읽다보니... 문장의 폭이 너무 좁은데 비해서, 확실히 풍부한 묘사가 느껴집니다.

    행성의 카피 부분은 정말 좋습니당
    솔직히.. 소설의 시작이 그렇고 그랬어서...
    이걸 어떻게 결말은 커녕, 이정표도 없는 소설을 어떻게 요리할까가 궁금했는데,

    소재를 잘 짜서 미션도 성공하고 단편도 완성한 당신은 창의력 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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