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장
2013.10.10 21:15

<단편 쓰기 대회!> 이브(Eve).

조회 수 2911 추천 수 0 댓글 1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도저히 수정을 못하겠으니 우선 공지.

이 소설 상에서는 인터넷(3g+LTE)와 전화용 전파는 별개이며, 둘 중 하나가 작동하지 않더라도 나머지 것에는 영향을 안줍니다:)

내맘임:)

 

=================================================================

 

#.1

번잡한 꿈을 꿨다.

꿈에 지독히 쫓긴 것 같았다.


“개 꿈.”

짧은 단정으로 꿈을 털어버리려고 해도 잡힐 듯이 기억나지 않는 묘한 꿈에 신경이 쓰였다.

다나베세이코의 에세이를 인용한 어떤 책에서. 이런 감각을 두고 고양이를 쓰다듬는 감각, 이라 말했다. 그 곳에 내 꿈에 대한 기억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섣불리 손을 뻗으면 도망가 버리고 만다. 마치 전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굴면서 슬그머니 다가가야 한다.

 

“아, 신경 쓰여!”
 
머리를 한 차례 털어버리고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제야 기묘한 정적에 신경이 미쳤다.
 
흘끗 본 시계는 아침 6시 반.
 
아빠가 곁에 있으면 굳이 시계를 보지 않아도 시간을 알 수 있다고 해서, 우리 아빠의 별명은 “칼시간”이다. 하루 24시간을 매일 매일 칼처럼 딱딱 지켜 본인이 계획하신 시간표대로 생활한다.
 
지금은 아빠의 위대한 시간표대로라면 모닝 뉴스를 봐야 할 시간이다. 나는 아빠와 함께 살아온 19년 동안 아빠가 단 한 번도 늦잠 자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벌컥.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하는 조마조마한 마음은 문을 열면서 날아갔다.
방금 차린 밥상에서 나는 따뜻한 국 냄새, 참기름 냄새가 고소하게 식욕을 자극했다. 아빠의 칼 같은 시간표에는 엄마를 깨워 밥상을 조르는 스케쥴도 포함되어 있는 까닭에, 엄마도 이제 군말없이 6시 반이 되면 눈을 뜨신다.
너무나 평화로운 거실은 가을의 따사로운 햇살이 가득 빛나고 있었다. 장판의 먼지까지 뽀얗게 사랑스러워 보였다.
 
“뭐야, 아빠 오늘은 TV 안보신데?”
 
벌컥.
예의도 없이 아무렇게나 열어 젖힌 안방문 안에는 깔끔히 정돈 된 침대 뿐이었다. 굳이 뭐가 더 있다면 뱀이 허물 벗듯 뭉텅이로 바닥에 놓여 있는 옷가지 두 개 정도. 머리카락 한 올 떨어지면 기겁하는 엄마가 원피스와 앞치마, 양말에 슬리퍼까지 한 자리에 집어던져 놓았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어제 엄마가 다리던 아빠의 와이셔츠도 아빠의 양말, 벨트, 양복 바지와 함께 그 옆에 스러지듯 놓여 있었다. 그 옆에는 시계와 안경까지 굴러다니고 있었다. 아빠가 어제 골라놓았던 넥타이가 그 위에 곱게 매듭이 묶인 채로 놓여 있었다.
마치,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차려입은 사람 하나가, 옷만 그대로 두고 증발한 것 같다는, 그런 기묘한 상상이 머리를 스쳤다.
 
툭.
다시 문을 닫고 나오려는데, 문에 무언가 걸리는 소리가 들려 문 뒤쪽을 돌아 보았다.
평생 엄마의 손에서 빠져 본 일 없는 소박한 금가락지가 거기에 떨어져 있었다.  결혼반지다.
피부 위를 무언가 손가락을 세워 훑는 듯한 소름이 끼쳐오기 시작했다.  입 밖으로 질문을 꺼내도 대답할 이가 없으리라는 이상한 예감이 들어 괜히 입을 더 꾹 다물고 온 집을 크게 발을 울리며 돌아다녔다.
 
오빠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화장실에도 아무도 없었다.
붙박이장에도, 베란다에도, 창고에도, 보일러실에도 아무도 없었다.
 
"하, 하하하."
 
괜히 스스로의 긴장을 비웃으려 웃음을 흘렸다.
틀림없이 지금의 내 모습을 누구라도 본다면 비웃을 게 틀림 없으니까.
비록 새벽 6시 반, 칼같이 시간을 지키는 가족들이 집을 나서기에 이른 시각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나의 이 과도한 경계는 어딘가 히스테릭한 구석이 있었다.
 
방으로 재빨리 돌아가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일 분, 일 초라도 빨리 스스로에게 이 구름에 붕 뜬 듯한 불안함은 네 착각일 뿐이라고 쏘아붙여주고 싶었다.
급하게 번호를 눌렀다. 공, 일, 공, 구, 오,,,, 하지만 벨 소리는 안방의 앞치마 주머니에서 울려퍼졌다.
아빠의 옷 더미를 더듬자, 양복 안주머니에서 아빠의 핸드폰이 나왔다.
오빠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발에 밟히는 옷가지를 뒤지자 오빠의 핸드폰도 곧 찾을 수 있었다.
 
계속해서 풍겨오는 따뜻한 밥상의 고소한 향이 점점 거짓말같았다.
멍하니 식탁 앞에 앉아 아직 따뜻한 밥그릇을 양 손으로 감싸 쥐고, 더 이상 진전되지 않는 생각을 억지로 비틀어 짜내었다.
 
가까운 곳에 장을 보러 갔을 수도 있잖아?
아직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온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최대한 설득력 있는 답변을 찾아내려고 했지만 불안감이 점점 커지더니 가슴이 쿵쾅쿵쾅 울렸다.
 
힘없이 일어나 다시 한 번 온 집을 둘러 보았다. 없어진 물건이 있나 아무리 살펴보아도 딱히 눈에 띄는 건 없었다.
엄마의 패물, 아빠가 가장 좋아하는 대형 벽걸이 TV, 거실에 떡하니 놓여있는 커다란 동전저금통까지.
 
반지하의 집에서 창을 내다 보아도 어차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잽싸게 옷을 차려 입었다. 망설이다 핸드폰 네 개를 모두 주머니에 넣고, 지갑만을 들고서 밖으로 나왔다.
동네를 한 바퀴 둘러보기만 할 생각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익숙한 거리에는 주인 없이 버려진 자동차가 차도를 꽉 매우고 있었다.
 
항상 친구들과 부모님, 그리고 오빠는 내게 과대망상증이 있는 편이니 사물이나 사건을 대할 때 사건을 축소해서 생각하라고 말하곤 했다. 연예인 스캔들이 터질 때마다 음모론을 주장했던 덕분이었지만, 실제로 나는 할 필요없는 걱정을 많이 하는 편이긴 하다.
 
하지만, 이건 과연 나의 과대망상에 지나지 않을 뿐인 것일까?
 
내 눈 앞에 있는 이 광경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무심코 들여다 본 차창 안에서, 운전자석에 굴러다니는 옷가지 더미와 신발 한 켤레를 본 나는, 저도 모르게 차도의 과속방지턱 위에 주저앉고 말았다. 엉덩이에 불편하게 깔린 물건을 주워 들고 보니, 메르세데스 벤츠의 엠블럼이 박힌 차키였다.
 

 

 


 
#.2
 
깊은 가을에 구름 없는 하늘이 햇빛을 사납게 쏘아 대기 시작해도, 차도를 메우고 서 있는 차들은 주인 없이 내버려진 채로 멍청히 서있을 뿐이었다.
출근길에 사람이 미어 터지는 지하철 입구에도, 이른 시간부터 부지런히 운동하는 아주머니들로 가득한 중학교 운동장에도 사람 코빼기 하나 비치지 않았다.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내가 모르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나만 모른다는 생각.
 
인도 여기저기에 놓인 옷더미들이 자꾸 시선을 끌어당겼다.
옷 아래 깔린 하이힐, 스니커즈 따위의 신발들이 제일 나를 겁박했다.
폼페이 최후의 날이 이랬을까? 한 순간에 저가 죽는 지도 모르고 죽어버린, 베수비오 화산이 남긴 미이라들의 사진을 본 일이 있었다. 앉은 자세로, 혹은 복중에 태아가 있는 채로. 전혀 관련이 없는 줄 아는데도 자꾸 그 앙상한 뼈대와 목줄기가 떠올랐다.
 
"젠장. 돌아버리겠네."
 
핸드폰을 다시 들여 보았다.
전파가 안 잡혀 인터넷은 터질 생각을 안했다. 폰이 4개나 있었지만.

신발을 벗어던지고 집으로 들어가 TV를 켰다. 경직된 얼굴의 아나운서가 이상현상이나 전쟁이나 자연재해에 대해 떠들고 있기를 바랬지만, TV는 지직거리는 소음만 뱉어냈다. 회색빛에 하얗거나 까만 반점이 섞인 화면이 온 채널에 가득했다.


방송국에서 방송을 내보내지 않는, 아주 늦은 새벽시간에 으레 볼 수 있었던 그런 화면이.

애써 서랍 귀퉁이에서 찾아 온 라디오도 먹통이었다. 전파가 수신되는 주파수는 없었다.

나를 제외하면 이 집과, 거리에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고요한 공기가 엄청난 존재감을 가지고 내 귀를 파고들었다.

 

“굿-모-닝! 빠빠빠빠빠빠빠빠 굿-모-닝!”

 

소스라치게 놀라 핸드폰을 보니 알람이었다.

 

“학교를 가야 하나?”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 피식, 실소가 나왔다.


주섬주섬 가방을 챙겼다. 핸드폰 4개, 물통, 엄마가 식탁 위에 올려 둔 점심 도시락통.

 
이상할 정도로 머리 한 구석에서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있었다. 전시상황이건 재난 상황이건 비상식량과 옷가지를 몇 가지 챙기는 게 중요할 거다.

마른 음식을 넣어두는 찬장을 열었다. 참치캔과 장조림캔, 깻잎조림캔 같은 것들을 마구잡이로 집어 가방에 쑤셔 넣었다. 옥수수캔 하나가 떨어져 발을 찧을 뻔 했다.

 

바닥에 떨어진 옥수수캔을 노려보는데, 그 옆에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코가 시큰했다. 아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 상황을 웃어 넘겨 볼 여유가 있었는데, 점점 억울함이 치밀었다.

왜? 도대체 내가 왜 이런 상황에 처해야 하지?

 

부스럭.

 

소리.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자세 그대로 굳었다.

 

타박, 탁. 타박, 탁.

틀림없이 사람의 발소리였다.

 

무턱대고 기쁨과 환희가 치밀어 올랐다. 눈가에 가득 맺힌 눈물이 무색할 정도로.

 

“거기 누구세요?”

 

쿵쿵!

 

반색을 한 내 목소리를 들었던 건지, 갑자기 현관문을 두드려댔다.

 

“누구세요?”

 

한 손에는 가방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바닥에 굴러다니던 옥수수캔을 쥐고 현관으로 달려 나갔다.
뭔가 잘못된 거다! 그래, 가족들이 나를 데리러 온 거야! 가족들이 나를 버리고 이렇게 어디론가 사라져 버릴 수는 없지.

 
전쟁인가? 기상이변? 내가 잠들어 있는 사이에 큰 화재가 났거나?

 

현관문의 아주 조그마한 유리로 밖을 넘겨 보았다.

 

유럽인?

햇빛이 부족해, 그리스로 일광욕을 하러 간다고까지 하는 그 북유럽인들의 눈매가 저럴까? 희뿌옇게 안개 낀 잿빛 눈동자들이 일제히 내 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하나, 둘, 셋... 총 여섯.

얼핏 보아도 나를 데리고 가기 위해 엄마가 보낸 사람들은 아니었다.

 

입에서 침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어디서 났는지 양키즈라고 적힌 야구 배트나 도끼, 도리깨 같은 것을 하나씩 손에 쥐고 있었다.

남자가 다섯, 여자가 하나였다. 눈 뿐 아니라 피부도 햇빛 구경도 못 한 사람처럼 창백하게 질려 있었고, 머리카락도 지쳐보이는 색 바랜 갈색이었다.

 

반지하의 우리집은 문이 아니면 나갈 구멍도 없다.

 

쿵! 쿵! 쿵!

튼튼한 철문이 우그러질 듯, 크게 흔들렸다.

 

멍청히 그 자리에 서서 유리를 내다보는 것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쿵! 쿵!

철문이 삐거덕거리기 시작할 때 쯤,

 

“꺄아아아악!”

 

비명소리와 함께 거품이 끓는듯한 그르륵-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지?

 

유리에 눈을 바싹 들이미는데 여섯 놈 중 가장 뒤의 놈이 양 손을 허우적거리며 쓰러지는 모양이 보였다. 쓰러지는 그 놈의 머리 위로 질펀하게 피가 솟아 올랐다. 머릿 거죽만 남아 목 앞으로 덜렁거리며 머리통이 떨어져 매달려 있었다.  거꾸로 매달린 뒤통수에 구토감이 일었다. 양 손에 든 것을 떨구고 입을 가렸다.

 

새까만 옷을 입고 긴 칼을 휘두르는 건 길쭉한 몸을 한 한 남자였다. 다른 이들보다는 더 건강해 보이는 갈색피부가 그 사이에서 도드라져 보였다. 그는 서슴지 않고 방망이나 도끼 따위를 휘둘러 대는 초점 잃은 자들을 상대했다. 두 쪽다 상대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에 조금도 망설임이 없었다. 인간보다는 짐승에 가까운 싸움이었다.

 

슥, 하고 휘두른 검은 야구배트와 허공에서 깡! 소리와 함께 맞물렸다. 힘에 부치는지 혀를 차며 검을 떨구더니, 망설이지 않고 두 놈의 발목을 날려버렸다.

검의 길이만큼 동선이 긴데도 체술로 그 공백을 메우니, 화려하면서도 우월한 체술이 된다.

서슴없이 다른 한 놈의 목에 검을 가로로 찔러 넣는 모습에 눈을 질끈 감았다.

 

길게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눈을 떴을 뿐인데, 작고 둥근 유리 너머로 서 있는 사람은 피를 뒤집어 쓴 그 살인마 자식 하나 뿐이었다. 

두 팔을 뻗어야 겨우 길이를 가늠할 수 있을 만한 기다란 장검을 허공에 몇 번 털더니, 아직 핏기가 가시지 않은 검을 제 옷에 슥 닦아 칼집에 넣었다. 칼집은 또 어찌나 긴지, 등에 매고 있는 집에 칼을 넣는 폼이 우습기도 했다. 북유럽인을 닮았다고 생각했던 그 자들은 모두 사지나 머리 중 어느 하나가 몸에서 분리된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질펀한 핏물이 철문틈을 파고 아래로 흘러 들어왔다.

 

주춤.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우웩.

아침부터 먹은 것도 없는데 위액이 올라왔다. 쓴 맛에 만상을 찌푸리며 억지로 삼켰다.

 

“문 열어.”

피를 잔뜩 뒤집어 쓴 놈은 다짜고짜 쉰 목소리로 내게 명령했다.

 

쾅쾅쾅!

 

“문 열어! 이딴 곳에 쳐박혀서 죽고 싶은 거야?”

 

놈은 입을 꾹 다물고 대답하지 않는 나를 조용히 겁박했다.

 

"이 봐. 나도 바쁜 몸이야. 썩 나와! 왜 놈들이 널 노리는지 내 알바는 아니지만, 이 놈들을 미처 미리 처리하지 못한 건 내 잘못이니까 이번 한 번만 도와주는 거야! 알아? 길길이 날뛰는 놈들을 거리에 풀어준 건 내 탓이니까, 이런 데서 죽는 꼴을 보면 내 마음이 편치 않단 말이야! 젠장, 남의 꿈자리 사납게 하지 말고 썩 나와!” 

 

철컥철컥!

 

문 고리를 신경질나게 돌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되나요?"

잿빛에 가까운 하늘색으로 칠해진 현관문이 이런 미치광이 살인마에게서 나를 지켜줄지는 모를 노릇이었다. 말도 섞지 않는 게 상책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 안타깝게도 오늘 이 기묘한 날에, 내가 아는 한 살아있다고 확신되는 인간은 이 한 싸이코패스가 전부였다.

 
"안 돼."
 
놈은 허무하게 내 말을 잘랐다.

그래서 나도 놈의 목소리에 묻어나는 다급함을 무시했다.

내겐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질문을 하나로 줄이는 게 한계였다. 내게 일생에는 다시 없을 기묘한 아침이었고, 길거리에 널브러진 옷가기 수만큼 입에 차오른 질문을 모두 삼키기엔 너무 힘에 부쳤다.

 
"우리 집에, 이 거리에 있던 사람들은 다 어디갔죠??"
 
한참 동안 대답이 없었다. 

설마 가버린 건가?

 

유리를 흘끗 들여다보니 내 쪽의 철문을 노려보는 자세 그대로였다.

"우리 집?"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려 그가 한 대답은, 그저 되물음이었다.

 

"여기가 우리 집인데요."

 

그는 가뜩이나 험악한 얼굴에 몇 가닥의 주름을 더 만들며 인상을 썼다.

 

"젠장.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그러니까 니가 지금 지구인이라는 거냐?"

 

지구과학, 기껏해봐야 세계지리 시간에나 몇 번 들어 볼 법한 단어가 생뚱맞게 튀어나오자, 억울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 내가 얼마나 다급하고 심각한데, 질문할 만한 인간이 이런 미친놈밖에 없다니.

지구인? 하, 그럼 댁은 외계인이세요?

 
"너는 누구지? 여기는 B-254행성이다. 분명 지구라는 별을 복사해 오기로 했던 계획서에는 너 같은 놈은 없었는데."
 
내가 어이가 없어 대꾸를 않자, 놈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툭 던졌다.

 

"계획서? 행성? 지금 아저씨, 나랑 장난해요?"

 

방금 막 6명을 난자해 죽인 살인마에게 이런 소리를 하다니.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나서야 아차,했다.

 

그 남자는 고민하는 듯 하더니, 한쪽 손을 칼자루에 턱 가져갔다. 그리곤 내가 있는 쪽을 노려보며 몸을 숙이고 한참을 노려봤다. 화가 나서 돌아버린건가, 하는 생각이 들 때쯤 그 자가 말을 던졌다.

 

"비켜."

 

비키라고? 무엇에서?

 

챙! 카드드득!

 

하얀색 또는 주황색의 불꽃이 순간 옆에서 날리는 잔상을 본 것 같았다. 고개를 돌리고 보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고요하기만 했다.

 

끼이이이이익.

 

분명히 잠겨 있을 터인 현관문이 쇠끼리 긁히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벽과 문의 연결부에 잠금장치 두 개의 절단면이 고스란이 드러나 있었다.

 

"젠장, 싸이코패스는 저런 것도 할 줄 아는데. 진짜 신이 너무하네."

 

바닥에서 가방을 주워들고 나를 기다리고 서 있는 핏덩어리를 쳐다봤다.

굳이 그 칼을 내 목에 들이대지 않아도 내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빨리 움직이지 않으면 아까 왔던 껍데기들이 수백은 족히 몰아닥칠 거다. 그렇게 되면 나도 손쓰기가 힘들어. 얼른 움직여."

 

여기서 이 놈을 따라가는 게 옳은 선택지일까? 발 아래에 여섯 구의 따끈따끈한 시체가 있는데도 그는 눈도 깜짝 않는데? 그것도 방금 그가 죽인?

바닥을 한 번 슥 보고 눈을 질끈 감았다가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미친 사람치고는 맑아 보이는 눈동자가 나를 죽일 것 같이 보더니, 내 손목을 대뜸 잡아 끌었다.

 

하지만 그가 내 목숨을 구해 주었다는 사실보다는, 본능적인 꺼림칙함과 불쾌감이 더 컸다. 살인마라니!

나는 징그러운 무엇이 닿은 양, 질색하며 그 손을 뿌리쳤다.

 

그는 상처받은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썩 유쾌해 보이지는 않았다.

 

"우리 가족은 어디 있죠?"

 

그는 가타부타 않고 칼손잡이를 먼저 찾았다. 수십, 수백은 족히 죽여본 사람의 손짓일테다.

 

"알았어요. 갈게요! 지금 간다고요."

 

비굴하다고 하지 말 것. 나는 그저 조력자를 원했을 뿐이다. 그게 미치광이에 살인마라고 할지라도.

 

 

 

 

 

 

#.3

 

"여기가 내 구역이다. 여기서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말고 있어라."

 

그가 나를 안내한 곳은 산 중턱에 걸린 오두막집이었다. 이층짜리 나무집이었는데, 향나무로 지었는지 문을 열자마자 온 집의 상큼한 나무냄새가 코를 찔렀다. 가정집은 아닌 듯 했고, 깔끔하게 치워져 있는데 비해 가구가 없는 것으로 보아 산장이나 팬션으로 사용되었던 건물 같았다.

 

"구역이라고요? 이봐요, 날 이런 데 팽개쳐 두고 어딜 가려고요?"

그는 이상한 눈으로 나를 흘끗 쳐다봤다.

 

"칼을 쓸 줄 아나?"

"아뇨."

"좋아, 신문물인 총은 어떻지?"

"써 본 적 없어요."

 

그는 더 물을 것도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나는 얼른 가방을 팽개치고 쿵쿵 발소리를 내며 그의 뒤를 따라 붙었다.

 

"저기요, 설명은 해주셔야죠!"

 

끈질기게 그가 돌아볼 때까지 바짝 따라가자, 그는 신경질 난 얼굴로 나를 노려봤다.

 

"따라오지 마. 죽여버리기 전에."

 

정말 죽여버리겠다는 듯 이를 앙다물고 눈을 부릅뜨니 야차가 따로 없었다. 몸 속 어딘가 남아있었을 지 모를 용기라는 게 있다면 이미 다 써버린 지 오래인 듯, 아무리 끌어모아 본 들 두려움에 입도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오기를 부린 건, 우리 가족이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지는 알아야 겠다는 마음이 낳은 불씨였다.

 

"죽, 죽여요!"

 

그는 황당한 듯 인상을 썼다.

 

"죽이라고요. 무슨 일인지,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하나도 모르는데, 어떻게 앉아서 기다리기만 하란 말이에요? 나도 피해자에요. 엄연히 알 권리가 있다고요!"

 

한참을 더 같잖다는 눈으로 내 이마 언저리를 노려 보더니, 결국 한숨을 푹 쉬었다.

항복의 의사 표시라고 생각한 나는 냉큼 그의 옆에 놓인 큰 장식돌에 걸터 앉았다.

 

"자, 빨리 설명해 주세요."

 

인상을 푸니 훨씬 상냥해 보이는 얼굴이 되었다. 그는 서너번 더 한숨을 쉬고서야 말문을 열었다.

 

"젠장, 지구인이라니. 도대체 뭐 부터 설명해야 할 지 모르겠군. 어쩌다 이따위로 일이 꼬인거야?"

 

그는 한참을 투덜거리고서야 말문을 텄다.

 

"좋아. 아주 처음의 처음부터 얘기하지. 어차피 아무것도 아는 게 없을테니까."

"그러세요."

"이 행성은 죽어가고 있었어. 이렇게 말하니 무슨 큰 자연재해나 외부 행성에서 공격이라도 받은 것 같지만, 실상은 그런 건 아냐. 그냥 아주 기술 우위에 서 있는 선진국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겠지."

 

행성, 이라는 단어가 나왔을 때부터 내 인상도 그 못지 않게 구겨져 가고 있었다.

어디에서 어디까지가 불쾌한 농담의 영역이고,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하지만 그는 내 눈빛과 표정에는 아랑곳않고 하던 말을 이어나갔다.

 

"행성의 표면이나 내부에 있는 자원, 태양열, 기껏해야 아주 가까운 별에서 채취한 광석들을 가지고 어떻게 그렇게 빠른 시간에 행성을 악조건으로 만들 수 있을까 싶어. 우리는 소비자야. 철저한 일회성 소비자지. 우리에게 있어서 별은 일회용품에 지나지 않거든."

 

우리?

 

"원래 그런거잖아. 자유 경쟁. 좋은 유전자를 가진 자가 살아 남는 거지."

 

점점 인상이 더러워진 내가 끼어들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죠? 알아듣게 좀 설명해 봐요."

 

그는 어쩐지 죄 지은 사람처럼 땅만 쳐다보며 다음 이야기을 꺼냈다.

 

"좋아. 쉽게 말하자면, 우리는 환경을 조금도 돌볼 생각을 안한다는 얘기야. 말 그대로 행성을 100년 남짓 쓰고 나면 새 걸로 교체하면 되니까."

 

내 눈치를 보는 걸까?

내 눈을 흘끔 쳐다보더니, 몇 번 째일지 모를 한숨을 쉬었다.

 

"우리 행성의 역사에 길이 남을 과학자가 있었어. 모두가 그를 카피맨이라 불러. 우리 행성의 지적 발달 수준이 너희 행성에 비하면 몇 배나 우월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카피맨 만한 사람은 다시는 나오지 않을 거야. 그는 바꿔치기를 할 수 있게 했어. 이 쪽과 저 쪽을. 몇 번이고."

 

허물처럼 내버려진 옷들. 길거리에 멈춘 자동차. 바닥에 떨어진 결혼반지.

섬뜩한 예감이 스쳤다.

 

"설마, 지금... 지구랑 그 B다시 어쩌고 하는 행성을 바꿔치기 했다는 거에요? 그게 말이 되요?"

 

"하, 나도 정확히 그게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잘 몰라. 카피맨이 남긴 기술은 아직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거든.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설명하지.

  살아 숨쉬는 것에는 에너지가 있어. 아마 지구에서 말하는 '혼'에 가깝겠지. 그건 옮겨오지 못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채는 아주 큰 그물이라서, 작고 단단한 그런 물질은 옮겨오지 못한다고 보는 편이 이해하기 쉬울거야. 그래서 유기체 중에서도 혼이 있는 건 옮겨오지 못해. 그 외의 것은 뭐든 카피하지. 뭐라도 말이야."

 

그의 말이 계속 될수록, 그가 차분하게 설명하고 있음에도 이 자가 사람 여섯을 한 자리에서 베어 넘긴 자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이 딴 허황된 얘기를 나더러 믿으란 소린가?

 

"좋아요. 엄청난 기술우위에 서 있고, 행성을 통째로 카피할 수 있다고 쳐. 뭘로 하는데?"

 

나는 드디어 그의 엄청난 상상력에 제동을 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더욱 낯이 어두워지더니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

"뭘로 하냐고! 대답 해!"

 

흥분하면 반말이 툭툭 튀어나오는 것은 내 나쁜 습관이었다.

그는 화내는 기색 없이 고요히 나를 바라보더니, 어렵게 입을 열었다.

 

"사실, 말은 카피라고 하지만, 카피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아. 모든 무기물을 서로 바꿔치기 한다고 하면 이해할 수 있나? 또는 모든 인간을 서로 바꿔치기 한다고 생각해도 좋겠지. 그런 거야."

 

농담. 또는 악의적인 거짓말일 거라고 생각하려 노력해봐도 자꾸 치미는 화를 견딜 수가 없었다.

 

"다 쓰고 버린 쓰레기 별을 던져줘? 어디에 쓰라고?"

 

목소리가 떨렸다.

 

"쓰라고 주는 건 아니지. 그냥 쓰레기를 버리듯이, 그냥 그렇게 버리는 거야. 어떻게 되는지는 우리가 알 바 아니라는 거지."

 

그러더니 그는 아까와 같이 자리에서 일어나 초연한 태도로 사라져 버렸다.

 

헝클어진 타래 같은 생각을 정리해 보려고 아주 느긋한 걸음으로 다시 산장까지 걸어 들어갔다.

하지만 현실이라는 느낌조차 제대로 들지 않는 생각들은 엉키고 설킨 상태여서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도 알 수가 없었다.

 

 

 

 

 

#.4

 

"네, 제가 데리고 있습니다."

 

그 사이 익숙해진 목소리에 눈을 떴다.

제일 먼저 내 눈에 들어온 건 원목이 고래등처럼 덧대어 진 나무 천장이었다.

 

산장의 2층은 절반만 바닥이 있고, 나머지는 트여 있었다. 그래서 2층에서 아래를 슬쩍 염탐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더미(Dummy)들은 다 처리했나?"

"..."

"처리했나?"

"...아니요."

 

위에서는 그의 정수리밖에 보이지 않아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피가 통하지 않도록 꽉 쥔 주먹을 보니 그의 속이 편치 않다는 것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그의 앞에는 웬 늙은 할아버지 셋이 나란히 앉아 있었는데, 몹시 우스꽝스러운 모양의 모자를 쓰고 있었다.

 

"왜 그렇게 날뛰고 다니도록 내버려 두는 거지?"

"죄송합니다."

"이번에도 저번에도 놈들이 온 도시를 침범벅으로 만들게끔 하는 건 자네야. 왜, 동정심이라도 생기던가?"

 

그는 한참 침묵을 지켰다.

그래도 높은 지위에 오른 할아버지들 같은데, 그 앞에서 저렇게 개겨도 되는 걸까 싶다.

 

"이번에는... 다를 줄 알았습니다."

 

할아버지 셋이 미리 각본이라도 읽은 양 한꺼번에 웃음을 터뜨렸다.

 

"자네, 키퍼(keeper)로서 자격이 부족해. 큭큭큭."

"하하하하, 내 살다 살다 더미들을 동정하는 자는 처음 봄세."

"킥, 그게, 킥, 껍데기들이 불쌍하다는 그 말, 진심인가?"

 

그는 웃음이 멎기를 기다려 조용히 말을 꺼냈다.

 

"카피맨이 남긴 기술이 소중한 줄은 압니다. 하지만 그 자가 남긴 공식대로 행성을 카피할 때마다, 제정신인 200명 남짓한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아야 한다니... 전 아무래도 이 일이 거북합니다."

 

"그런가? 하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정신을 잃고 침을 흘리며 길거리에서 날뛰는 저 자들은, 감옥에서 평생을 썩어야 할 중한 죄를 저지른 자들이 아닌가? 평생 그런 곳에 갖혀 지내는 것보다야 저렇게 제정신을 놓고 하고 싶은데로 즐기다 가는 게 낫지. 그래도 단 하나의 키퍼, 자네의 손에 죽는다면 범죄자들에게는 큰 영광이 아니겠느냔 말일세, 아하하하하."

제일 머리가 많이 벗겨진 할아버지가 모자를 벗어 부채질을 하며 말하자, 다른 두 할아버지도 동조하듯 웃음을 흘렸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은 없습니까? 자아를 잃고 날뛰는 데도요? 오늘은 의식이 끝내고 한참동안 제정신이더니, 갑자기 날뛰기 시작하더군요."

 

살인마 녀석은 눈가를 꾹꾹 누르며 고개를 뒤로 졎혔다. 많이 피곤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인간인데, 직접 죽이지 않는다고 쉽게 말하지 마시죠. 제 손에 피를 묻히는 것도 이제 지칩니다."

 

"하하, 자네 덕분에 우리가 많이 편하네 그려."

그제야 마른 웃음으로 달래려 들었다.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어도 저 노인네들이 간사해 빠졌다는 것쯤은 알겠다.

 

"아, 그러고 보니 데리고 왔다는 그 지구인 여자아이는 어떻게 됐지?"

 

내 얘기가 나오자 귀가 절로 쫑긋 섰다.

 

"그 여자아이 말입니다만... 별 다른 특징은 없었습니다. 지극히 평범했습니다. 크게 신경 안쓰셔도 될 것 같습니다."

 

"쯧쯔, 그러니 아직 어리다는 소리를 듣지."

"지금껏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질 않나? 세상에 살아있는 인간이 '이 쪽'으로 넘어오다니 말일세."

 

머리가 제일 많이 벗겨진 할아버지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지구가 선택한 아이야. 자기가 낳은 대지의 자식들을 모두 버리고 오려니, 마음이 적적해 하나라도 데려온 게 아니겠는가? 말하자면 이브(Eve)같은 존재겠지."

 

이브? 아담과 이브에 나오는 그 이브?

 

"만만하게 볼 게 아냐. 이건 행성이 자신의 의지를 표출한 첫 사례라고 봐도 좋겠지. 고작 꼬마 하나로 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조심해 두는 게 좋을 거야."

"그 말이 맞다. 여자아이는 네 눈 닿는 곳에 항상 두고 감시하도록!"

 

"그 말씀 받들겠습니다."

 

뒤로 젖혔던 고개를 똑바로 세우던 그 순간, 그의 눈이 내 쪽을 스쳐 지나간 것 같았다.

내가 아래를 구경하고 있는 모습을 봤을까? 아니면 내 착각이었을까?

 

"더미들은 빨리 처리하도록. 부동산 배정부터 시작해서 일정이 빠듯하거든. 자네가 좀 더 힘 써주지 않으면 곤란하네."

 

"...알겠습니다. 들어가시지요."

 

엉덩이를 딱 붙이고 앉아있던 노인들은 그 말에 서로 얼굴을 살피며 엉거주춤 무릎을 폈다.

 

"흠, 그럼 가 보겠네."

"시간이 이렇게나 됐었군."

"잘 있으시게나. 키퍼 양반."

 

탁.

 

셋이 자리를 뜨고서야 겨우 정적이 찾아왔다.

 

내가 알아들은 거라곤 나는 이제 죽기 전까지 내 부모님을 보기 어려울 거라는 사실 뿐이다.

 

언젠가 싸이코패스가 먼저 나에게 말을 걸 거라는 생각에 천장을 보고 넋을 빼고 있다가, 한참 동안 말 한마디 없는 그 덕분에 다시 까무룩 잠이 들었다.

 

 

 

 

 

 

#.5

 

나는 대지에서 나무처럼 자라나 하늘에서 과실을 따 먹었다.

그리고 나의 기침에서 습기가 태어났고, 내 발 닿는 곳에서 물길이 생겨났다.

나는 자유롭고 행복했으며, 지극히 만족스러운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여기다. 이번에는 이 행성을 카피하도록 하지."

 

나는 이미 온 몸이 땅과 하늘에 뿌리내리고 있었다.

무도한 자들이 내 몸을 함부로 유린하도록 내버려 둘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내 자식들을 다시 내 품에 돌려달라고 비명을 질렀으나 그들의 귀에는 닿지 않았다.

 

돌려 줘. 내 아이들을 돌려 줘.

 

 

 

 

 

 

 

#.6

 

또 쫓기는 꿈을 꾼 모양이다. 온 몸이 흠뻑 젖어 잠에서 깼다.

꿈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얼굴도 그 내용도 잘 떠오르지가 않았다.

 

"잘 잤나?"

 

나 혼자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했던 2층의 반쪽짜리 다락방에는 장검을 지팡이처럼 치켜세워 기대고 있는 놈이 있었다.

 

너무 깜짝 놀라면 비명도 안 나오는 법이다. 덜컹, 심장이 저 아래까지 추락했다가 겨우 제 자리로 돌아왔다.

 

"계속, 계속 여기 있었던 거에요?"

 

어이가 없다는 내 제스처를 못 본건지, 못 본 척 하는 건지 그는 무던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변태! 색마! 자는 모습이나 훔쳐보고!

눈 앞에 사람을 썰어대던 칼이 있는데 대놓고 욕을 퍼부을 용기는 없어, 속으로만 온갖 불명예를 다 가져다 안겼다.

 

"잘 자더군. 나라 잃은, 아니, 행성 잃은 여자애 치고는."

 

키퍼는 사람의 속을 박박 긁는 데 소질이 탁월했다.

 

"하, 누가 그 행성을 약탈해 갔는데 그러죠?"

 

그는 피식 웃었다.

 

"그러는 너희들의 국경도, 옛날에 전쟁으로 약탈한 땅과 국민들로 이루어져 있지 않나? 모든 나라의 경계가 그렇지. 이제 와서 발뺌하지 마. 동물의 생리란 그런 거잖아? 너희 세계에서는 찰스 다윈이라는 자가 발표했던가? 적자 생존이라는 이론 말야."

"이쯤 되면 범죄도 스케일이 너무 커서 헛웃음밖에 안나오네요. 대국민이 모두 동의한 범죄라는 건가요? 약탈경제? 농업에 적합하지 않은 땅을 지배하고 있던 강대국이 중세에나 흔히 행하던 그 것 말인가요?"

"중세? 그건 뭔지 모르겠군. 어쨋든 그 때와 지금 사이에 고작 200년? 300년 차이나 나면 다행이겠지. 너희들이 정한 규율에 따라 바뀌는 논리를 가지고 다른 사회를 재단하려 들지 마."

 

분명 그도 떳떳하지는 않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천하의 나쁜 놈이었다. 어쩜 저렇게 뻔뻔하고 당당할까?

 

그는 사진을 한 장 들이밀었다.

멀리서 보아도 알 수 있었다. 푸르고 녹빛이 도는 별. 지구였다.

 

"정치를 하시는 분들이 이 별을 발견하기 위해서 오랜 심사를 거쳤어. 사실 조건에 맞는 별이 그렇게 많지는 않거든."

 

그리고 또 한 장의 사진을 내밀었다.

멀리서 찍었지만 정체모를 까만 구름 같은 것에 가려 그 윤곽선조차 잘 구별되지 않는 어설픈 원형을 하고 있는 까만 별이었다. 녹빛은 찾아보기 힘들었고, 태양의 반대편은 대낮만큼 밝게 빛나고 있었다.

 

"국민들은 몰라. 공습경보라도 발령하면, 대피소안에 모두 몰아 넣는 건 어렵지 않지. 환경상태 그러기 위해서 카피맨의 위대한 업적을 이용한다고 하지. 그들은 절대 눈치챌 수 없어. 두 개의 행성을 바꿔치기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거야. 완벽하게 그 모습을 우리 행성 위에 재현해 두었다고 믿지."

 

대국민 사기도 이만한 게 없다. 바닥을 주먹으로 퍽, 내리쳤다.

 

"당신, 이게 좋은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잖아요."

 

키퍼는 또 딴청을 피우며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도 이 일을 돕는 이유가 뭐죠?"

 

키퍼는 이제 아예 드러누워 잠을 청하는 시늉을 했다.

"내가 왜 그런 걸 네게 알려줘야 하는 지 모르겠군."

 

너무 답답해서 입으로 심장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고릴라계 동물들이 그러는 것처럼 양 손으로 내 가슴을 쾅쾅 두들겼다.

 

"행성 잃은 사람이잖아요? 당신 말대로."

 

그가 벌떡 일어나 앉더니, 신경질 나는 눈초리로 나를 노려보았다.

 

"도대체 그러니까 나도 왜 너 같은 덤이 딸려왔는 지 모르겠다고. 혹시 그 지구에서 특별한 존재였나? 왕이나 황후나, 아니면 시민단체의 장이었다거나, 민주주의 사회를 수호하는 자였다거나. 뭐 그런 거 있잖아?"

 

내가 고개를 가로저으니 그는 더욱 질렸다는 표정이 되었다.

 

"당최 이해할 수도 없는데, 이런 버릇없는 꼬마를 하루종일 상대해야 한다니. 미칠 노릇이군."

 

어쩜 이렇게 사람이 코 앞에 있는데 예의 없이 굴 수가 있을까?

 

"키퍼씨, 친구 없죠? 대인관계 나쁘죠?"

 

그는 콧방귀를 꼈다.

"친구?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자들은 모두 오래 전에 죽었다."

 

죽었다는 말이 죽여버렸다는 말처럼 들렸다. 아까부터 그가 죽부인마냥 품에 안고 있는 장검에서 시뻘건 핏방울이 떨어지는 환상이 보였다.

 

"미, 미안해요. 그런 줄은 몰랐어요."

"됐어. 이쯤 살다보면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게 뭔지, 왜 그래야 하는지조차 이따금 잘 생각나지 않을 때가 있어. 내 성격이 더러운 걸 두고 나무라는 거니, 틀린 말은 아니지."

 

그는 벌떡 일어나 이층 다락의 구석진 곳에 다닥다닥 놓인 철제 상자가 있는 곳으로 나를 데려갔다. 이층은 천장이 낮은 편이라, 키가 그리 크지 않은 나도 엉거주춤한 자세로 걸어야 했다.

 

"내가 이 일을 하게 된 건 내 아버지의 죗값을 치르기 위해서야."

아버지?

 

그는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철제상자의 잠금쇠를 이리 저리 만졌다.

 

"아,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그는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 말을 툭 툭 던졌다.

 

"카피맨, 그 자가 내 아버지다."

 

아직 이 상황을 완전히 이해한 것도 아니었고, 여기가 몇 백, 몇 천 광년 떨어진 다른 행성이라는 것도 잘 납득이 가지 않았지만, 카피맨이라는 단어는 귀에 쏙 들어왔다.

하지만 아까 60년에서 100년 정도에 한 번씩 행성을 바꾼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실은 이 행성을 교체하는 악습은 그리 오래 되지 않은 걸까?

 

나는 말끔하게 생긴 그의 얼굴을 보았다. 수염이 지저분하게 자라 있어 조금 더 나이들어 보이긴 했지만, 고작해야 30대 중반으로 보였다.

 

"카피맨,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얼마 안되나 보죠?"

 

그는 상자 안에서 총을 하나씩 꺼내었다. 손으로 무게를 가늠해 보기도 하고, 장전된 총알이 있는지 확인해 보기도 하고 실린더를 이리저리 만져보기도 했다.

 

"내가 그 자가 죽었다고 했던가?"

 

마치 아주 오래 전에 있었던 신화적인 인물을 설명하듯 이야기 한 주제에.

 

"그, 카피맨이 행성을 카피하는 기술을 남긴 게 언제죠?"

"만으로 800년이 다 되어가지."

 

오늘 아침에 눈을 뜬 순간부터 무엇 하나 제대로 현실같이 느껴지는 게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점점 허무맹랑해 지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럼 800살 먹은 아버지가 살아있단 말이에요?"

내가 소리를 빽 지르자, 그는 어린애에게 사탕을 쥐어 달래주듯, 내 손에 작은 6연발 리볼버를 꼭 쥐어주었다.

 

"나도 그 양반이 죽었으면 좋겠다고 매일 매일 빌고 있어. 어느 구역의 어느 행성에서 살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만나면 언제라도 당장 죽여버릴 거라고 다짐하고 있지. 아무리 괴물같은 인간이지만, 설마 목이 날아갔는데 살아있지는 않을 거야. 어디까지나 이것도 희망사항이지만."

 

차가운 쇠의 느낌에 질겁해서 다시 총을 돌려주려 하자, 그는 내 손에 똑바로 총을 쥐어주었다.

 

"그 자가 살아있으니, 나도 죽지 못해. 그 자가 자신의 죗값을 치르라고 내게 불로불사의 거지같은 시스템을 주입한 모양이니까."

 

그는 제 머리를 툭툭 털더니 총을 쥐고 있는 나를 만족스럽게 돌아보았다.

 

"나는 이제 더미들을 사냥하러 가야 해. 백 마리 정도 남았거든. 그 동안 제 몸은 제가 지키도록 해. 여기가 키퍼의 보금자리라는 걸 모두 아니까, 함부로 접근할 만한 놈은 없을 거야."

 

그의 말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나를 조롱하기 위한 농담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여기는 아주 아늑하고 평온한 산장이고, 모든 일이 자고 일어나면 없던 농담으로 잊혀질 일인 것처럼 느껴졌다.

어느 순간에고 서프라이즈! 를 외치며 엄마와 아빠, 오빠가 튀어나온다 한들 놀라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기다렸던 순간이니까.

 

그가 막 나가려다 말고 나를 돌아보았다.

 

"이름이 뭐지?"

 

"해원, 정해원이요."

"난 키퍼다."

 

풉.

설마 정말 이름과 직함이 같지는 않을테지만, 순간적으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는 또 인상을 찌푸렸다. 미간에 이미 깊게 파인 굴곡이 있었다. 건성건성 여럿을 베어 죽이는 살인마 주제에 고민할 일은 또 많은 모양이다.

 

"방금 말했지만, 오갈 데 없는 처지치고는 해맑군. 나로서는 이해가 안 돼."

"그게 정말 이름이에요?"

"정말 이름? 그런 건 없다. 필요도 없고."

 

괜히 웃은 게 미안해져서 슬그머니 몸을 일으키고 그가 내어주었던 이부자리를 정리했다.

 

"이름이 있으면 편해요."

 

그가 다시 또 눈알을 오른쪽 위로 굴리더니 물었다.

 

"뭐가 편하지?"

"키퍼...씨는 별로 편하지 않더라도 주위에서 키퍼씨를 부를 때 편하죠."

"지금도 키퍼라고 불리고 있으니 문제는 없다."

"그건 직함이잖아요? 헷갈리지 않나요?"

 

그는 우울하게 대답했다.

 

"키퍼는 온 우주를 다 통틀어도 나 하나 뿐이거든."

 

그 때, 이 우울한 살인마를 혐오하고 미워하는 것이 쉽지 않을 거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40 백일장 <단편쓰기대회!-5회> 천국의 문 3  손님 2014.02.09 2385
39 백일장 <단편쓰기대회!-5회> 우리형 5 용아 2014.02.05 1917
38 백일장 <단편쓰기대회!-5회> 거울 속의 남자 6 가유 2014.01.29 1973
37 백일장 <단편쓰기대회!-5회> 거울 속의 남자 가유 2014.01.29 31
36 백일장 <단편쓰기대회!-4회> 초월동맹 2  손님 2013.12.29 2111
35 백일장 <단편쓰기대회!-4회> Fraud Freud (사기꾼 프로이트) 2 Josh。 2013.12.26 2214
34 (단편쓰기대회) 눈의 이야기(가제) 용아 2013.12.06 42
33 백일장 <단편쓰기대회!-3회> 얘가 용사고, 쟤는 마왕이야. 1  손님 2013.11.15 2160
32 백일장 <단편쓰기대회!-3회> 달. 1 Josh。 2013.10.31 2690
31 백일장 <단편 쓰기 대회!> 내일은 안녕하십...니까? 1  손님 2013.10.18 2191
30 백일장 <단편 쓰기 대회!> 이브(Eve) -2- 1 Josh。 2013.10.18 2111
» 백일장 <단편 쓰기 대회!> 이브(Eve). 1 Josh。 2013.10.10 2911
28 백일장 <단편 쓰기 대회!> 플라네타륨 1  손님 2013.09.30 2465
27 릴레이소설 리메이크 개요 1 Coline 2011.03.06 4458
26 [백일장][소설] 혼자서 1 file 김낙지 2011.02.18 4123
25 [백일장][사진] 유등 1 하얀괭이이노 2011.02.06 4245
24 [백일장][소설] 엇갈린 사랑 1 테임 2011.02.06 3672
23 [백일장][소설] 혹시 마술을 믿으시나요? 2  손님 2011.02.06 3750
22 [백일장][소설] 클릭. 3  손님 2011.02.01 4045
21 [백일장][소설]산이 높다고만 하지마. 3 오라하콘 2011.01.31 4260
Board Pagination Prev 1 2 Next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