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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타지풍 서간체 단편형식입니다.

황제가 되고 싶었던 황자와 여인의 몸으로 그를 보필했던 남장 여자 책사의 사랑 이야기.

 

*BGM-달빛

-

 

 

-어머니께 바칩니다.

 

어머니, 전 이기적인 자식입니다.
당신 스스로를 원망하고 가슴 아파할 가치도 없어요.
이 불효자식을 부디 용서하지 마세요.


어머니, 당신의 품에 안겨 동화를 들었던 어린 시절, 그 평화로운 한 때가 생각나세요?
지금도 눈을 감으면 선선히 떠오릅니다.
작은 시골마을의 고운 흙냄새, 뛰노는 또래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
시장에 걸음하실 때마다 꼭 사오시던 막대사탕의 단내음이-.
간혹 잠 못 들고 제가 울 때 마다 어머니께서 말씀하셨죠.
뚝 그치지 않으면 금빛의 사자가 물어갈 거라고.
처음 그 사람을 보았을 때, 저는 알았습니다.
무서운 눈을 한 금빛의 사자가 저를 잡으러 왔다는 것을요.
두려웠습니다.
그 자가 저를 주시할 때 느꼈던 공포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금빛의 사자에 대한 이끌림이, 못내 두려웠습니다.
통제되지 않은 감정들이 그 남자를 향했습니다.
우리의 따뜻했던 작은 마을에 당도했을 때, 애초에 그는 저를 죽일 생각이었습니다.
차례차례 형제자매들을 죽이고, 반쪽짜리 남매인 저도 죽이려고 했지요.
어머니는 일찍이 파란을 예견하고 계셨습니다.
과거, 숙청을 염려한 어머니가 핏덩이인 저를 안고
변방의 작은 마을로 도피하신 덕에 저는 휩쓸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남자가 분란의 씨앗이 될 모든 것을 치워버리겠다고 선언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하셨지요.
그가 이 곳까지 찾아와 끝내 저까지 죽이려 할 때, 어머니가 절규하며 외치셨지요.
이 아이의 머리가 당신의 힘이 될 것이라고.
그 남자의 날카로운 칼날이 제 목 바로 위에서 멈추었고, 저는 죽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보낸 마지막날 밤,

어머니가 저를 끌어안고 소리없는 눈물에 몸을 가늘게 떨고 계실때도,

위선적인 전 어머니를 위하는 척하며 금빛 사자를 향한 기대에 몸을 떨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한걸음씩 빛 한 줄기 없는 어둠을 향해 걸어가 버렸습니다.


어머니, 황성에 입궁한 첫 날- 모든 것이 격동했습니다.
대신들이 들고 일어나기 시작했고, 또다른 세력들이 요동치기 시작했습니다.
전 그 남자의 정치적 바람막이에 불과했습니다.
다른 배에서 났지만 아비가 같은 그 남자가 필요했던 건 저의 머리였고,
제 피 속에 흐르는 피의 권위였습니다.
황실의 피를 외면하고 살았던 저는 그 답답한 곳에서
평화로웠던 시절에 대한 향수로 괴로웠습니다.
하지만 황제가 되고 싶었던 그의 곁에서 묵묵하게 직책을 맡아 신뢰를 높여갔습니다.
처음에 불신하던 그도 조금씩 마음을 열게 되었습니다.
이용가치가 없다면 죽게 되었을 저의 운명에 그는 칼 대신 사슬을 드리웠습니다.
어딜 가더라도 저를 대동하였고, 황실에 관한 것들을 저에게 들려주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 금빛의 사자가 한순간 저를 향해 웃어주었을 때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제가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을.
냉혹함 속에 간혹 비치는 강인하지만 나즈막한 미소가 너무 좋아서,
저는 착각을 하고 이루지 못할 추악한 망상에 시달리며 그를 보필했습니다.
잔인한 모사꾼이 되어 그의 곁에 섰습니다.
제 잔혹한 혓바닥을 그를 위해 할애하고, 그를 위해 정적들을 제거했습니다.
귀하게 자라라 하셨던 어머니의 당부를 잊고, 더러운 피를 흠뻑 뒤집어썼습니다.
비겁하게 정적들의 약점을 이용해 발밑으로 끌어내리고,
칼날같은 몇 마디 말로 그들을 베었습니다.
한낱 여인의 몸으로 남자행세를 하면서 말입니다.
그들의 부릅뜬 두 눈에서 흘러나오는 살기, 증오, 분노를 이 몸에 받아내고
모든 것은 오로지 그를 위해-.
그래도 전 행복했습니다.
비록 이용당하고 그 뒤에 비참하게 버려질 개가 되더라도,
그 사람을 사랑한다는 사실만으로 버틸 수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어느 날 술에 취한 그 남자가 저를 안았을 때도,
그 후로도 몇 번씩 관계를 맺을 때도 저는 말하지 못했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이 밖으로 나오면 그가 저를 버릴 것 같았습니다.
경멸당하고 멸시당해도 버려지는 것만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으니까요.
정적을 사냥하던 날, 제가 그를 대신해 암습해온 화살을 맞고 쓰러져 옮겨질 때, 저는 환청을 들었습니다.
제 이름을 부르며 정인에게 말하듯이 속삭이던 그의 낮은 목소리를.
저의 헛된 바람이 환청을 부른 것이었을까요.
그 때이후 하나하나 제거한 끝에 마지막 남은 그 남자의 정적은 1황자 루디온이었습니다.
그는 상황을 적절하게 이용할 줄 알았고, 제가 금빛 사자를 사랑한다는 것도 꿰뚫어 보았습니다.
어머니께서 예전에 말씀하셨죠. 눈 앞의 것에 눈 멀지 말라고.
저는 어머니의 충고를 잊은 대가로 1황자의 손에 넘어왔습니다.
그 남자에 대한 치명적인 사실을 알고 있고 그것을 세간에 알리겠다는 루디온의 말에 눈 멀어 머리가 뜨거워져 버렸던 것입니다.
전, 루디온과의 약속대로 혼자 그의 비밀가택에 찾아왔습니다.
당연하게도 그 말은 거짓이었고, 저는 그 자리에서 구금당했습니다.
어리석게도, 저는 그 치명적인 사실이 그와의 관계를 일컫는 말인줄 지레짐작 했던 겁니다.
그 남자가 황제의 자리에 오를 때 최고의 오점이 될 사실 말입니다.

 

어머니, 이제 선택의 길은 없습니다.
반동을 꾀하는 무리들은 금빛의 사자가 왕이 될 때까지 끊이지 않을 것이고, 마지막 남은 1황자가 죽을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저의 존재는 그 남자가 황제가 된 후에 있어서도,
지금 현재에 있어서도 방해가 될 뿐이라고, 루드온은 말해왔습니다.
자신에게 고급정보를 말해주면 황제가 됐을 때 저와 그의 목숨만은 살려주겠다는 더러운 말을 늘어놓으며 말입니다.
루드온에게는 황제의 자질이 없습니다.
어머니께선 늘 군주의 자질이 결여된 자가 황제가 됐을 때
벌어지는 활극은 끔찍하다고 하셨죠.
어릴 때는 몰랐지만 지금에서야 그것이 아버지를 뜻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어머니, 벌써 이곳에 온지 20여 일이 지나갑니다.
루드온의 고문에도, 그 남자에게 발목을 잡는 존재라는 진실에도
제 육체와 심신은 짓눌려갑니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선택을 해야 하는 못난 딸이라서 죄송합니다.
강하게 살아가십시오.
어머니께서 원하시는 세상에 살게 될 날, 그 가 바라는 세상이 될 그 날을 지켜보며 저는 조용히 잠들어 있겠습니다.

 

어머니, 당신의 나직하고 가만가만한 자장가 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옵니다.
따뜻한 무릎 위에 머리를 베고 들었던 자상하고 상냥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점점 눈앞이 흐려지는군요.
이제 이별입니다.
까맣게 타버릴 어머니의 가슴에 붉은 피로 얼룩진 슬픈 여인은 사라지고 없겠지만-
아득한 옛날 품속에서 어리광 부리던 작은 아이는 영원히 남아있을 것입니다.


어머니, 나의 가련한 어머니-.

 


-

 

Epilogue

 


제 5황자 반트 레오반은 까만 관 속에 누운 창백한 시체 옆에 있었다. 제1황자의 비밀사택에 날랜자들을 뽑아 기용한 용병대를 푼지 23일째 되는 날. 드디어 제 1황자를 압박하여 없애버릴 수 있는 빌미를 찾아내었고, 그의 병력을 조금씩 흠집내어 압박하기 시작했다. 긴 시간이었다. 하지만 1황자에게 잡혀있던 그의 책사, 아니 그가 사랑하는 정인은 그가 본격적으로 1황자를 치기 시작할 무렵 이미 독을 마시고 차가운 바닥에 길게 누워있었다.


반트 황자의 얼굴은 표정없이 비어있었다. 달빛이 순금색의 아름다운 머리칼을 은은하게 조명했지만 메마른 눈동자에는 닿지 못하고 바스라졌다 .그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단전 위에 얹고 있는 시체 위로 고개를 떨구고 무릎을 꿇었다.


반트 황자의 반대편에는 딸이 남긴 편지를 소중히 꼭 쥐고 있는 마티엔 황녀가 있었다. 그녀는 두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처연한 분위기가 그녀 주위를 고요히 감싼다.


이윽고 그녀는 결심한 듯 눈을 떴다. 딸의 마지막 편지를 눈으로 읽어내려 갔다. 편지의 마지막 부분은 말라붙은 피 때문에 흐릿해서 알아보기도 힘들었다. 독약이 서서히 체내에서 돌다가 몸 전체를 갉아먹는 고통에 토혈을 했던 듯 했다. 소리없는 눈물이 그녀의 아름다운 두 눈에 고이기 시작했다.


얼마나 괴로웠을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속에서 왈칵 올라오는 악에 받친 오열을 누르고 마티엔 황녀는 유서를 손으로 살며시 쓸었다가 꼭 쥐었다. 가슴 한가운데를 찔러오는 통증에 숨조차 쉴 수 없었다. 그녀의 가늘게 떨리는 손이 허공에서 미약하게 꿈틀거리며 천천히 딸의 뺨에 닿는다. 지독하게 서늘했다. 하얀 얼굴을 어루만지던 그녀가 손을 곱게 겹쳐져 있는 딸의 두 손 위에 함께 얹는다.


반트 황자가 물끄러미 그것을 바라보았다. 꺼진 눈빛으로 반트 황자가 입을 열었다.


“나는……결국 사자였다. 산 자를 먹는 사자(死自).”
“…….”


마티엔 황녀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저 딸의 차갑게 식은 손을 조금 더 힘주어 잡을 뿐이었다.

뺨 아래로 흘러 내려가던 슬픔이 손등 위로 툭 떨어져 또르르 아래로 굴러간다.

 


열어놓은 창문 사이로 새어들어온 밤바람이 마티엔 황녀의 손에 꼭 쥐인 유서의 모퉁이를 살짝 흔들어 놓았다.

 


fin.

 

 


그대에게 바치는 연서(戀書)

 

-그대에게 바친다.

 

로안.
그대의 어미가 어젯밤 운명하였다.
그녀의 유언으로 그대가 10년 전 남겼던 유서를, 이제야 보게 되었다.
복수.
딸을 죽음의 신에게 넘겨준 짐에 대한 그녀의 작은 복수였지.
그래서 짐은 지금껏 알지 못했다. 그대의 연심(戀心)을.
우습지 않은가.
유서에 적힌 단 몇줄의 글귀만이 그대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게 한다니.
그것도 모르고 가슴을 치며 회한의 시간을 살아왔다니,
우습지 않은가.
어째서 그대는 말 하지 못했는가.
어째서 그대는 표현 하지 못했는가.
그랬다면 짐은 그대에게 말해 주었을 터인데.
짐 또한 그대를 연모하고 있었다고.

 


로안.
그 때가 생각나는가.
짐이 아직 황자였던 시절, 형제 아우들을 차례차례 피로 물들인 그 나날들을.
평온하고 풀향 가득한 그대의 마을에 당도하였을 때, 나는 그대를 처음 보았지.
생각해 보면 그랬다.
총명하고 맑은 두 눈으로 나를 똑바로 올려다 보던 것이 그대였지.
괴이하게 마음 한 구석이 켕겼지만 계획대로 칼날을 높이 들어올렸다.
이 하얀 목을 치면 검붉은 피가 치솟아 땅을 비참하게 물들이겠지, 그 생각 밖에 없었다.
바로 그 때, 그대의 어미가 절규하며 외친 한마디만 아니었다면.
이 아이의 머리가 힘이 될 것이라는 피맺힌 절규가 아니었다면.
아슬아슬하게 칼날은 그대의 목 바로 위에서 멈추었다.
그대를 죽이지 않아도 된다는 수상쩍은 안도감이 짐에겐 몹시도 낯설었지.
그 안도감을, 짐은 아까운 인재를 잃을 뻔한 것에 비유하며 묻어버렸다.
그대를 유용한 정치적 도구로 쓸 수 있으리라 여긴 짐은 다음날 그대를 이끌고 입궁했지.
피비린내 가득한 살육의 현장으로-.


로안.
그대가 황성에 입궁한 날, 모든 것을 신기하게 바라보던 그대의 눈망울을 기억한다.
표하진 않았지만 잔잔하던 두 눈이 황궁의 진귀한 풍광을 볼 때마다 즐겁게 휘던 것을,짐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정치적 역변이 일어나고, 대신들이 들고 일어나는 그 혼란의 아귀 속에서도 그대의 두 눈은 늘 차분하고 흔들림이 없었지.
현명하고 사리분별력이 명확한 그대의 머리는 짐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어.
달아날 기색도 보이지 않고 조용히 짐을 보필하는 그대의 모습에 점점 신뢰가 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어딜가든 그대를 대동하기 시작했지.


로안.
그대는 언제나 나직이 짐을 부르곤 했다.
황자 전하-.
라고.
언제부터인가 그대가 짐을 부르는 소리가 점점 다르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언제부터인가 그대가 더러운 피로 얼룩져 가는 것을 보며 점점 안타까워지기 시작했다.
왜일까.
왜 그대가 자꾸 눈에 밟히는 것일까.
그 헤아릴 수 없었던 감정들은 한 방향으로 뻗어나가고 있었지.


로안.
그대가 처음 입궁할 때의 무구한 눈이 서서히 변해가고 있을 무렵을 기억하는가.
핏물보다 짙은 정계의 사악한 독이 그대의 눈에 스며드는 것을 보며, 짐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는가?
후회했다.
그대를 데리고 온 것을, 지독하게 후회했다.
그대는 언제나 짐을 위한 것이라 하였지.
스스로가 진창에 빠지는 것도 마다않고 암수를 부리며 적을 쳐내는 것이 전부인 양, 그대는 언제나 짐을 위해-.
그래도 욕심이 나 그대를 놓아줄 수 없었다.
놓아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도저히 놓아줄 수 없었다.
술에 취해 처음 그대를 안은 날은 온전한 실수였다.
그런 식으로 그대를 품지 말았어야 했다.
처음 보았다, 그대의 그런 상처받은 눈은.
그럼에도 한 번 취한 육체의 향락은 내 정신까지 취하게 만들었지.
몇 번이고 그대를 안았다, 몇 번이고.
향긋한 술에 취하는 동안은 마음껏 착각할 수 있었으니.
추악한 착각.
그대도 짐을 연모하고 있을거라는 착각.
술에서 깨어나면 여지없이 착각은 깨어졌다.
짐을 미워할테지, 그리 따르던 어미에게서 강제로 떼어놓은 짐을 미워할테지.
악취나는 인간군상들에게 강제로 밀어넣은 짐을 증오할테지. 제 손을 더럽히는 짐을 증오할테지.
그리 생각하였다.
결단코 짐에게 연정을 느낄 리는 없을 거라, 그리 어리석은 아집에 사로잡혔다.


로안.
정적을 사냥하던 그 날을 기억하는가.
그대는 짐을 대신해 독화살에 맞아 쓰러졌지.
날개가 무참히 찢어진 나비처럼 힘없이 목을 떨군 그대를 보면서,
그 때- 짐이 느낀 감정을 이해하는가.
제 5황자 반트 레오반이, 황제가 되기 위해서만 숨 쉬어온 그 냉귀(冷鬼) 반트 레오반이, 뜨겁게 우짖었다.
시리게 식어가는 그대의 손을 잡으며 끝도 없이 연모하느라 속삭였다.
그 마음이 멎어가는 그대의 심장에 닿을 때까지.
그 마음이 얼어가는 그대의 몸을 녹일 때까지.
그리하여 그대가 되살아났을 때, 멈춰가던 짐의 심장이 다시 뛰었다.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로안.
뱀보다 비열한 제 1황자 루디온이 그대를 납치했을 때, 짐은 예감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루디온의 포악하고 악랄한 성정이 그대를 온건히 놓아둘 리가 없다는 것을.
그래도 짐은 그대가 잘 견뎌낼거라 믿었다.
수색대를 보내며 허망한 희망을 품을 때도 그대를 믿었다.
그리도 그대를 믿었건만-.
그대가 루디온에게 받은 서찰을 입수했을 때 짐은 절망했다.
수색대의 소식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까맣게 탄 속을 잠재우던 짐은 깊은 수렁에 빠졌다.
스스로 짐의 약점이 되리라 어림 짚을 그대가 취할 행동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너무나 그대다운 행위를 할 것이란 걸 잘 알고 있기에.
부디 늦지 않기를, 신을 믿어본 적도 없던 짐이 무심한 신을 향해 절규했다.
형제 아우들을 죽여온 것에 벌을 내리시는 것이라면 그 합당한 철퇴를 저를 향해 내려주고,
부디 소중한 사람만은 앗아가지 말아달라고, 간절하게 빌었다.
허나-.
그대는 아는가.
짐을 보며 조용히 미소짓던 입술이 독액으로 바싹 마르고,
언제나 짐의 등을 쫓던 그대의 두 눈이 처참하게 감겨있던 것을 목도했던 그 순간을.
안았을 때 항시 떨리던 심장소리가 멎어있고, 뜨겁게 타오르던 그대의 육체가 얼어붙었던 것을 목도했던 그 순간을.
짐은, 그 순간-
신(神)을 잃었다.


로안.
그대는 입버릇처럼 말했지.
좋은 황제가 되어 강녕한 국가를 이뤄달라고.
짐은 그대의 꿈을 이루었다.
모든 것이 순조롭고, 그대가 닦아놓은 기반들로 황실의 안녕은 확고하기만 하다.
허나, 짐의 마음은 허무하기만 하구나.
그토록 갈구하던 황제의 위치도, 허무하기 이를데 없다.
그대가 스러진지 10년이 흘렀건만, 이 허망한 마음을 다스릴 길이 없구나.


로안.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짐을 보아왔을 그대의 서글픔을 헤아리지 못하였다.
그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죄, 어찌 사죄해야할지 짐은 도무지 알 도리가 없다.
죽어서도 갚지 못할지도 모를 죄를, 어찌 속죄해야 하는가.
허나, 그대에게- 한가지는 말해줄 수 있다.
그대의 마음이 짐과 일합한다는 것을 알게 된 작금에서야, 짐은 말해줄 수 있다.
우습다고 고갯짓을 하여도 좋다.
조금 더 빨리 말하지 못한 짐을, 부디 용서해다오.
헤가오스 황국 27대 황제, 반트 레오반이 니른다.

 


그대를 연모한다고.

 

 


Epilogue

 

 


황제 반트 레오반은 말없이 서찰을 접어 손에 쥐었다. 발갛게 솟아오르는 고아한 등불 위에 서찰을 가져다대자, 빠른 속도로 대번에 불길이 옮아온다. 뜨거운 화염 속에서 화르륵 타오른 순백의 종이가 검은 연기를 피워올리며 타들어간다.


황망한 황제의 두 눈이 위로 치솟는 불길에 머무른다. 열어놓은 창으로 선선한 바람이 들어오자 검붉은 불꽃이 힘을 얻어 반대 방향으로 내뻗는다. 정무를 보다 만 것인지, 너른 집무용 탁자 위에 서류들이 어지러이 널려있었다.


“로안-.”

 

안타까이 불러보는 이름. 이제는 스러지고 없는 존재하지 않는 이름.


제왕의 위엄이 흐르는 몸짓과 여전히 건장한 체격, 힘있게 넘쳐흐르는 블론드를 간직한 반트 레오반 황제. 훗날 금빛의 사자라 불리며 맹용을 떨친 그는, 이 순간만큼은 정인을 무참히 떠나보낸 평범한 인간에 불과해 보였다. 반트 레오반은 서찰이 까맣게 재가 되어 바스라질 때까지 한치도 눈을 떼지 않았다.


새카맣게 내려앉은 잿더미가 그의 손에 온전히 내려앉는다.

손을 뻗어 창 밖으로 향하자 홀연 불어닥치는 바람이 잿더미를 멀-리 쓸어안는다.


부디 그대가 있는 곳까지 닿을 수 있기를.

 

-연심(戀心)을 헤아려 주지 못하고 떠나버린 정인, 로안을 위해서.

 


Fin.

 

==================


부제는 '그대에게 닿았더라면' 이었습니다.

주제는 '슬픔' 이구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__)


*에필로그 용 BGM -이수영 얼마나 좋을까. (오케스트라 Ver.)
소설을 쓰면서 들었던 노래.

  • ?
    PWnameNa 2011.03.02 14:44

    ' ' 잘읽었습니다~

    ' ' 판타지 읽은것 중에서는 감동적이었어요. 엔딩이 슬펐지만요. 외전으로도 보고싶은 작품이네요 ' ' ~♬

    ' '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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