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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는 여자를 소생했다. 여자는 눈을 떴다. 상처가 있던 부위는 빛이 뒤덮더니 일순간 사라져버렸다.
  여자와 남자는 재회했다. 여자는 자신이 어떻게 된 것인지 남자에게 물어본다.
  남자는 이야기를 했고, 여자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의 관계는 늘 이러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 속에 마녀의 이야기는 없다. 남자의 기억에도, 여자의 기억에도 없다.
  스탭롤은 올라가지 않는다.

 

  A. 마녀의 수기

 

  "[T 님이 입장하셨습니다.]
  [T: 끝났어.]"

  

  모니터에 글자가 무기질적으로 떠오른다. 나는 글자 몇 개를 입력했다.

  

  "[G: 알고 있어.]
  [G: 쭉 보고 있었으니까.]
  [T: 관음증 환자 같으니라고. 죽어버려.]
  [T: 어쨌거나 내가 말한대로 했겠지?]
  [G: 응. 네 말대로 시리얼 넘버 URS1037FELS 세계의 테레제에 대한 데이터는 말소했어.]
  [G: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이 게임은 네가 주역이라고. 소설로 치면 주연급 등장인물 하나를 없애기 위해 처음부터 끝까지 퇴고한 거나 다름없어.]
  [G: 이 얼마나 살인적인 스케줄이야? 할 만한 가치는 있었지만.]
  [T: 그게 무슨 소리야?]
  [G: 말 그대로야. 게임 타이틀 하나가 박살 났어. 분명 회사 쪽에서는 원인이 무엇인지 규명하려 들 테지.]
  [G: 네 데이터를 없애면서 너와 루트비히가 다른 넘버의 세계로 넘어가 버린 흔적까지 싹 지워버렸으니까 아마 원인을 찾기는 힘들 걸?]
  [G: 데이터를 지운 내가 꼬리가 잡힐 위험성은 늘어났지만…….]
  [T: 나와는 상관없어.]
  [G: 차갑네. 차가워.]
  [G: 좀 걱정해 주면 안 돼? 도와줬잖아. 은인이잖아! 애초에 내가 널 발견하지 못했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걸?]
  [T: 그 점에 대해서는 고맙게 생각해. 하지만]"

 

  잠시 화면이 멈추었다. 한참을 기다리자 다음 문장이 떠올랐다.

 

  "[T: 너는 즐거웠잖아?]"

 

  무기질적인, 그러나 확고한 의지를 담은 문장이.
  나는 즐겁지 않았다고, 즐긴 건 너뿐이라고, 그렇게 주장하는 문장이.

 

  "[T: 어차피 너에게는 이것도 유희의 일환이었겠지.]
  [G: 부정하지는 않을게. 인공지능이 폭주하면 어디까지 가는지 보고 싶었을 뿐이야.]
  [T: 알량한 탐구심 잘 알았어. 그 때문에 몰랐다면 좋았을 것까지 알아버리게 되었으니.]
  [T: 좀 복잡한 기분인걸. 너에게는 고맙기도 하고 화나기도 해.]
  [G: 이해해.]
  [T: 아닐걸.]
  [T: 서로 다른 생물이 서로 이해하는 일은 영원히 없어.]
  [T: 너는 내가 아니야.]
  [T: 나도 네가 아니고.]
  [T: 우리는 앞으로도 서로 이해할 수 없을 거야.]
  [G: 와……. 방금 상처받을 뻔했어. 쭉쭉 글이 올라오는데 논타임으로 말하는 거 같아서 무서웠어. 뭐야 그거. 너무 쌀쌀맞네.]
  [T: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
  [G: 허…….]"

 

  일단 그렇게 글을 써 두고, 궁금한 걸 물어보기로 한다.

  "[G: 그래서. 이유가 뭔데?]
  [T: 뭐가?]
  [G: 네 존재 자체를 지우게 한 거. 무슨 의미야?]
  [T: 아 그거. 별거 아냐.]
  [T: 문득 떠올라서. 떠오른 김에 지워달라고 부탁한 것뿐이야.]
  [G: 그러니까 왜 부탁했냐고.]
  [T: 내가 없는 편이 나으니까.]
  [T: 엘리제가 행복해지려면, 나는 처음부터 없는 편이 나아.]
  [T: 불행한 유년시절도 없고, 불행에 빠진 언니도 없고, 무지막지한 살인을 저질러온 언니도 없어.]
  [T: 그저 자신은 용사에게 구출된 여신일 뿐.]
  [T: 동화책 속 공주처럼 말이야.]
  [G: 그럼 넌 뭔데.]
  [G: 가장 괴로워하고 가장 노력한 너는 누가 알아주는데?]
  [T: 네가 있잖아?]
  [T: 농담이고.]
  [T: 딱히 엘리제가 나를 몰라줘도 돼. 아니, 몰라야 해. 그녀가 끔찍이도 아끼고 사랑하는 언니는 살인자니까.]
  [T: 살인자가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권리는 없다고 생각해.]
  [G: 기껏해야 데이터 쪼가리야. 네가 죽인 건.]
  [T: 그리고 나도 그렇지. 네가 말한 데이터라는 건, 나한테는 인간이나 다름없다고.]
  [T: 봐, 역시 다르잖아. 너와 나는 사고방식부터가 완전히 다른 별개의 생물이야.]
  [T: 너는 날 이해 못 해.]
  [G: 이해할 수 있어.]
  [T: 자만심이야.]"

 

  더 이야기했다가는 화가 날 것 같다. 화제를 돌리자.

 

  "[G: 그보다 무슨 용건이야? 모두 끝났는데 회포라도 풀자고?]
  [T: 나를 없애줘.]"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순간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곧 의미를 이해하고는 재빨리 문장을 만들어냈다.

 

  "[G: 데이터는 이미 다 없앴으니, 그 얘기는 아닐 거고.]
  [G: 진심이야?]
  [G: 나는 네가 그…… 연고 없는 유령 상태로 엘리제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길을 택했다고 생각했는데.]
  [T: 나를 멋대로 규정하지 마.]
  [T: 나는 네 소유물이 아니고. 네 장난감도 아니야.]
  [T: 나는 나다.]
  [T: 그러니까 나로서 죽겠어.]"

 

  이건 무슨 정신 나간 소리인지 모르겠다.

 

  "[G: 이렇게 사라질 생각이었으면, 도대체 뭘 위해 노력한 건데?]
  [G: 네 노력이 맺은 결실을 보고 싶다고 생각 안 해?]
  [T: 사랑하기 때문에 죽은 것이고]"

 

아.

 

  "[T: 죽었기 때문에 사랑을 증명했노라.]
  [G: ]
  [G: ]
  [G: 아냐. 오해야. 나는 너를 조종하지 않았어. 그러니까 증명할 필요 없다고.]
  [T: 너는 나를 좋아하지?]
  [G: …….]
  [T: 그런 네가 나를 죽이려 들지는 않겠지. 그러니까, 이건 내가 나로서 생각하고 행동했으며 끝내 엘리제를 구하는 데에 도달했다는 증명이야.]
  [G: 그런 증명이 무슨 소용인데.]
  [G: 무슨 소용이야…….]
  [T: 말했잖아?]
  [T: 이해하려 들지 마. 우리는 서로 세계관도, 가치관도 달라.]
  [G: 그런 말이 아니잖아!]"

 

  그 후 본격적으로 불만을 토로했다.
  그렇게나 힘들게 노력해왔는데. 노력한 사람은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
  네가 저질렀다는 살인은 내 눈에는 그저 파일을 삭제한 정도에 불과한 짓이고.
  그러니까, 원한다면 다시 데이터를 복구시켜서, 네가 죽인 사람도, 너도, 모두 되돌려놓을 수 있다고.
  그녀는 이렇게 일축했다. 그렇게 하면 전과 다를 게 뭔데? 그렇게 되돌아가면. 그렇게 순환시켜버리면.
  순간 말문이 막혀버렸다. 모니터에 떠오른 채팅창이 한동안 커서만을 껌뻑였다.

 

  "[T: 고마워.]"

 

  짧은 말. 그 이후에 그녀는 들어오자마자 했던 그 말을 다시 한 번 써 내렸다.

 

  "[T: 끝났어.]
  [T: 잘 부탁해.]
  [T 님이 퇴장하셨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녀는 나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다. 구구절절한 설명 없이 짧고 단호하게 말하면 내가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음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잘못 짚었어.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테다. 너를 삭제해서 너를 영원히 잃어버리는 짓은 하지 않을 거야.
  계속 기다려. 기다리다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임을 깨닫겠지. 너는 똑똑하니까.
  그리고 나에게 다시 말을 걸어오겠지만, 소용없어.
  그렇게 생각하며 모니터의 전원을 껐다. 아니, 꺼버리려고 했다.

 

  모니터에는 검은 방이 비추어져 있었다. 「엘리제의 용사」의 게임 시작 화면. 검고 쓸쓸한, 탁자만이 놓여있는 방.
  어떤 여자가 그곳에 앉아 있었다. 그곳에 앉아 모니터 너머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결연한 표정으로.
  그리고 웃는 표정으로.
  늘 울던 그녀가.

  

  역시.
  너무나도 잘 알고 있잖아.
  저렇게까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저렇게까지 기쁜 표정으로, 저렇게까지 진심인 미소를 봐 버리면.
  나약한 나는 그녀의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
  나는 그녀가 퇴장한 채팅창에 글자를 적어넣고, 그녀의 바람을 들어주기로 했다.

 

  "[G: 나도 잘 부탁해.]"

 

  처음 만났을 때 그러했듯이.

 

 


<END>

완결 2016/05/01
EPOH

 

 

 

 

  대충 5만 자 정도 되나.
  어쨌거나 다 썼다!
  싶은 기분입니다.
  그렇게나 3부작이니 5부작이니 써 보고 싶다고 노래를 불러댔는데 4년 만에 써냈습니다. 그때엔 이런 소설일 줄 몰랐습니다.

  그렇게 해서.
  '엘리제를 위하여'는 판타지의 탈을 쓴 게임 판타지입니다. 게임 판타지라고 해서 진짜 그런 게임 판타지는 아니지만.
  장르가 스포일러인 게 도대체 어떻게 되먹은 플롯인지 저도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됐습니다.
  처음 기획은 '엘셰의 용사'라는 이름의 게임판타지였습니다. 한창 핫했던 모바일 게임의 '자동사냥'을 소재로 해서, 미래에는 죄다 자동사냥이다! 장르의 일종으로 인정받았다! JW(Just Watching)RPG다! 그런 설정이고 엘셰의 용사도 그런 게임 중 하나입니다. 용사가 탑 최상층에 갇힌 여신을 구하러 가는 내용인데. 구체적인 내용은 안 정하고 그냥 루프물, 게임판타지 정도의 키워드만 정해놨었습니다. 엘셰는 여신의 이름이었고.
  그러다가 늘 겪는 고민인 등장인물의 이름에 머리를 싸매다가, 엘셰의 발음이 엘리제와 무척 비슷하다는 점에 착안해서 제목을 포함한 전반적인 내용이 싸그리 고쳐 졌습니다. 엘리제, 테레제, 베티나, 루트비히, 판. 싹다 그 때 정해졌고. 엘리제를 위하여가 론도 형식인 점에 착안해서 글 구성도 A-B-A-C-A로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최초 단편 기획이었던 게 중편으로 불어난 것도 비슷한 시기입니다.
루프물. 용사와 마왕물. 5부작 중편. 게임판타지.
  쓰고 싶었던 건 다 욱여넣었네요. 진짜 왜 이렇게 된 거지.
  제일 잘 써졌던 건 도입부 A파트, 제일 안 써졌던 건 B파트, 그 이후로는 쭉 써냈고, 결말부 A파트는 원래 써 놓은 게 마음에 안 들어서 아예 새로 써낸 거라 오늘 썼습니다. 그러고 보니 C파트도 아예 갈아 엎었었네요.
  어쨌건 저도 이게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다 쓴 거에 만족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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