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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남았는데."
녹초가 된 김유빈은 힘없는 목소리로 질문한다. 순진한 소년 하나를 거짓말쟁이로 몰아넣는 것은 생각보다 피로한 일이다.
"양치기 소년의 끝이 어떻게 되는지 알지?"
양치기 소년이라는 이야기의 끝은 소년의 죽음으로 완성된다. 김유빈은 한유리가 말하는 바를 단번에 이해한다. 그리고 분노한다.
"지금. 나 보고 죽이라는 거야?"
"늑대한테 명령하라는 거야."
김유빈의 목소리에 분노가 묻어나온다. 한유리는 불타는 눈동자를 보고 한 발짝 물러난다.
"그러니까 나보고 죽이라는 거잖아. 저 소년을."
한유리도 물러서지 않는다.
"그래. 죽이라는 거야. 이야기를 위해서."
이야기를 위해서. 김유빈의 입가가 일그러진다. 이를 갈며, 눈을 부라린다. 한유리는 흉흉한 기운마저 퍼져나오는 김유빈을 보고 침을 삼킨다.
"나보고 사람을 죽이라고?"
"저건 사람이 아니야. 그저 이야기 속 인물이야."
"그래도! 지금 살아 숨 쉬고 있잖아!"
"너 판타지 소설가라며? 너도 이야기에서 사람 죽인 적 있을 거 아니야!"
고함이 터져 나온다.
"어떻게 사람보고 살인하라고 할 수 있어!"
"사람? 네가? 넌 사람이 아니야!"
김유빈은 한유리의 말에 얼어붙는다.
"네 방에 화장실이 왜 없는지 알아?"
모든 사서의 방에는 화장실이 없다. 다른 어는 곳에도 없다.
"사서는 배변 활동이 필요 없어. 사람이 아니거든."
사서는 살아있지 않다. 살아있지 않은 자는 소화 활동이 필요 없으며 그에 따라 배변도 필요치 않다.
"네가 먹은 밥도 다 가짜야! 사서는 먹지 않아도 죽지 않아."
김유빈은 입을 꾹 다문다.
"넌 사서야. 인간이 아닌 자.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자. 이야기를 수호하는 자!"
"어쩌라고! 그래도 난 여태까지 사람으로 살아왔어!"
둘의 언쟁은 쉽사리 진정되지 않는다.
"그럼 이 이야기는? 어떻게 할 건데?"
김유빈이 아니면 양치기 소년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미완이 되어버린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차갑게 내려앉은 목소리. 진정한 것이 아니다. 분노가 극에 달하면 냉정과 다를 바 없어진다.
"넌 네 이야기가 끝나지 않게 내버려둘 셈이야?"
김유빈이 사서로의 삶을 선택한 이유는 완결 나지 않은 이야기 때문. 한유리는 그것을 지적한다. 너는 이야기의 완성을 위해 사서가 되었는데, 이야기의 완성을 방해하고 있다. 하는 일의 모순을 지적당한 김유빈은 호흡을 가라앉힌다.
"만약 이 이야기가 완성되지 않으면 어떻게 돼?"
아까보단 냉정해진 김유빈이 질문한다.
"이야기가 사라져. 세상에서 양치기 소년이 사라져. 그 파급은 아무도 알지 못해."
하나의 이야기가 사라진다. 하나의 세계가 사라진다. 하나의 작품이 사라진다.
"넌 정말 이 이야기의 완결을 장식하지 않을 거야? 작가가?"
작가는 이야기를 쓰는 자. 모든 이야기에는 끝이 있어야 한다. 사서는 망가진 이야기가 끝을 낼 수 있게 도와주는 존재.
"넌 사람이 아니야. 작가지."
김유빈은 침묵을 유지한다. 한유리는 계속하여 말을 이어간다.
"이야기에는 끝이 필요해. 그것이 얼마나 잔혹하든, 얼마나 역겹던, 반드시 끝은 필요해. 이야기는 원래 잔혹한 거야."
"넌……. 사람을 죽인 적 있어?"
간신히 입을 연 김유빈의 입에서 나온 것은 질문.
"사람이 아니라 인물이야. 이야기 속의 인물. 이미 운명이 결정 난 존재."
"그럼. 인물을 죽인 적 있어?"
"........."
한유리는 별로 꺼내고 싶은 이야기가 아닌지 바로 대답하지 않는다. 김유빈은 가라앉은 눈동자로 한유리를 지긋이 바라본다.
"햄릿. 오필리아가 물에 떨어져 죽지 않았어. 그래서 내가 손으로 밀어 넣었지."
침묵. 침묵만이 숲 속을 감돈다. 두 명의 사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이야기에는 끝이 있어야 해. 정해진 흐름이 있어야 해. 나는 사서고, 음악가고, 작가야."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한유리가 입을 연다. 김유빈은 잠잠히 그 목소리를 듣는다.
"어떻게 할 거야. 넌. 작가야? 인간이야?"
작가로서, 사서로서 살길 원한다면 인간성을 버려라. 잔혹할 수도 있는 말.
"난 작가야. 그리고 인간이지. 그건 포기 못 해."
이기적인 대답. 모든 것을 가지겠다는 대답에 한유리는 말을 잇지 않는다.
"그래도 이야기에는 끝이 있어야겠지?"
김유빈은 쓸쓸히 웃으며 고개를 든다. 그리고 늑대에게 명령한다.
늑대들이 달려나간다. 양 떼를 습격한다. 찢어발기고, 물어뜯고, 잡아먹는다. 양치기 소년이 울부짖는다. 늑대가 나타났다. 늑대가 나타났다. 어떠한 응답도 없다. 늑대는 소리를 지르는 존재를 적으로 인식한다. 소년은 달아나지 않는다. 양치기로서, 양 떼를 돌보는 자로서, 늑대와 맞서 싸운다.
이야기는 끝이 난다. 소년의 죽음으로. 잔혹한 방향으로.
한유리가 손을 뻗는다. 김유빈은 그 손을 잡는다. 황금의 펜이 글을 써내려간다.
그리고 사서는 그곳에 없었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본다. 하얀 천장. 한유리는 방에 돌아가서 쉬라고 했다. 한유리의 말이 머릿속을 휘몰아친다. 이야기는 원래 잔혹한 거야. 아는데, 알고는 있는데.
동화는 악당이 죽어야 끝난다. 그리고 사람들은 행복하게 살았어요 라고 말하지. 이야기는 잔혹하다. 누군가 죽고 다른 이는 행복하게 산다. 세상이 잔혹하기에, 세상을 써내려가는 이야기도 잔혹하다. 나도 잔혹한 이야기를 쓴다. 나는 수많은 사람의 죽음을 서술했다. 묘사했다. 써내려갔다.
이름없는 병사. 누군가의 연인. 어딘가의 영웅. 대규모로 그냥 죽었다고만 쓸 때도 있고, 시체의 산이 쌓였다고 쓸 때도 있고, 자세하게 세밀하게 써내려갈 때도 있다. 이야기가 진행되고 끝나려면 잔혹해야 한다. 언제나 행복한 이야기는 드물지.
그걸 알지만, 그 잔혹한 이야기를 위해 내가 직접 움직이니 느낌이 다르다. 다른 사람들도 이런 기분을 안고 살아가나? 힘들다. 힘들다. 힘들다.
내가 쓰는 이야기에 회의감이 든다. 나는 작가로, 이야기의 신으로 인물들을 죽여갔다. 그리고 사람으로서 인물을 죽였다. 미쳐버리겠다.
그럼에도 나는 작가다. 이야기를 쓰는 자. 세상을 만들어가는 자. 잔혹한 이야기를 쓰는 자. 나는 그런 사람이다. 나는 그런 작가다. 그래. 나는 작가다. 어떠한 잔혹한 이야기라도 끝을 내는 사람. 그런 인간. 타인의 불행을 이야기로 쓰는 자.
침대에서 일어난다. 책상으로 다가가 컴퓨터를 켠다. 이야기를 써내러 간다. 쓸 이야기는 오르니아의 왕이 아니다. 나의 이야기. 내가 살아온 이야기. 내가 살아갈 이야기. 인간으로서의 나와 작가로서의 나의 이야기.
손가락이 자판 위에서 춤을 춘다. 화면에는 나의 삶이 나타난다. 이것이 사서로서 내가 쓸 이야기다. 나의 삶은 이야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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