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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유리와 함께 다시 복도를 걷는다. 이번에는 걷는 게 짧다. 역시 역세권이란 건 중요하다. 금세 동상들의 홀을 지나 전투팀 사무실에 도착한다.
"그럼 악마 탐색 시작."
책장 하나를 바라본다. 계속 눈을 움직인다. 나도 찾아야지. 나는 한유리의 뒤에 있는 책장을 바라본다. 책이 진짜 많다. 엄청 많다. 어마무시하게 많다. 너무 많다. 여기서 악마를 어떻게 찾는 담. 다른 사람들도 눈에 들어온다. 어제 식당에서 인사를 나눈 사람들. 날아다니는 사람 걸으며 돌아다니는 사람. 다들 책장만 뚫어지게 바라본다.
무언가 찾은 것 같은 사람들은 책을 꺼낸다. 한유리가 들고 다니던 펜을 꺼내고, 무언가를 그리다, 사라진다. 나도 저런 식으로 이동한 거구나.
다시 책장을 바라본다. 영어로 쓰인 제목들로 가득하다. 역시 못 읽겠어. 단어들은 알겠는데, 그걸 문장으로 만들지를 못하겠다. 정확히 말하면 단어도 듬성듬성 기억난다. 영어 공부해야겠다. 한유리한테 부탁하면 공부할 만한 책도 만들어 주겠지?
그러려면 한유리한테 잘 보여야 한다. 열심히 책장을 노려본다. 책들만이 보일 뿐. 그림자는 못 찾겠다. 눈을 좌우로 돌려도 보이지 않는다. 어지럽다.
"찾았다."
한유리가 날아오르더니 책을 한 권 가지고 내려온다. 나도 날고 싶다. 설마 저것도 정식 사서가 되어야 할 수 있는 건가! 한유리의 손에 들린 책은 하얀 표지. 뭐 검은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지만.
제목은 당연히 영어. 「Shepherd boy」. 작가는 `Aesop`. 뭐라고 읽어야 하나. 에이소프? 에이솦? 앗! 이솝이구나!
"이번에는 알겠어?"
"이솝의 양치기 소년."
셰퍼드가 양치기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한유리는 만족스러운지 고개를 끄덕인다.
양치기 소년. 이솝이 썼다는 건 몰랐지만, 모를 수도 있다고 치자. 거짓말을 하면 파멸이 다가온다는 교훈을 담은 동화. 사실 동화라기엔 결말이 잔혹하지만. 늑대한테 잡아먹히다니. 나는 이 동화가 `거짓말을 하지 말자`가 주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듣자지.
양치기라는 것은 상당히 낮은 지위다. 백정 같은 느낌. 혼자서 돌아다니는 게 일이다 보니 사람들과 대화할 일도 없고, 중세에는 악마와 계약한 사람이라는 말도 나돌았다고 한다. 즉 양치기 소년은 우리가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 비명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그 사람은 죽는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잡생각은 여기까지. 한유리가 펜을 꺼내 들고 책을 내민다. 책을 잡으라는 거겠지. 책을 잡는다. 한유리는 펜을 꺼내 들고 책 위를 내달리게 한다. 좌우로 위아래로 펜이 춤을 춘다. 알 수 없는 언어로 부르는 노래. 펜은 춤추고 한유리는 노래한다.
"이야기여, 사서를 받아들여라."
책이 상하게 빛을 내뿜는다. 나를 집어삼킬 듯이. 그러고 보니 가면 또 속 울렁거릴 텐데.



그리고 바닥에는 책 한 권만이 남는다

"으윽. 메슥거려."
김유빈은 배를 잡고 건물에 기대어 선다. 다행히 구토는 하지 않았다. 그래도 상당히 힘든지 안색이 새파랗다. 한유리는 한숨을 내쉴 뿐이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한유리의 가시 돋친 말에 김유빈이 비틀거리며 일어난다. 한유리는 김유빈이 정신을 차린 것을 보고 걸어간다. 향하는 곳은 언덕 너머에 있을 양치기 소년.
두 명의 사서는 푸른 언덕을 걸어 올라간다. 녹색의 풀들이 싱그럽게 자라있다. 하얀 꽃, 노란 꽃, 빨간 꽃. 총천연색의 꽃들. 김유빈은 자연을 느끼며 언덕을 걸어 올라간다.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흘러간다.
"보인다."
김유빈은 한유리의 말에 고개를 내린다. 멀리서 하늘의 구름 만큼 하얀 양들이 움직이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붉은 옷을 입은 소년도. 푸른 초원에는 수백은 되어 보이는 양 떼가 소년의 피리 연주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한유리와 김유빈은 서로 눈짓을 나누고 소년에게 들키지 않게 언덕을 내려간다. 소년은 냇가를 따라 양 떼를 몬다. 양에게 물을 먹이고, 풀을 먹이며. 두 명의 사서는 하늘에서 그 광경을 바라본다.
"이거 안전한 거 맞아?"
김유빈은 한유리의 연주로 만들어진 4분음표를 타고 있다. 음표는 연주에 따라 둥실둥실 흔들리며 난다. 김유빈은 안전장치 하나 없이 공중에 떠 있는 게 상당히 불안한 듯 계속하여 안전을 확인한다.
"난 집중 중이니까 말 시키지 마! 그리고 감시나 잘해!"
한유리는 펜으로 불러낸 통기타를 연주한다. 듣는이의 마음을 붕 뜨게 만드는 곡. 연주에 집중하느라 인상을 찌푸린다. 양치기 소년이 있는 초원에는 숨을 곳이 없다. 두 명이 머리를 맞대어 고민한 결론은 공중. 한유리의 연주로 투명한 상태로 날고 있다.
김유빈은 눈을 반쯤 감고 밑을 내려다본다. 소년이 양 떼를 몰고 다니는 모습이 보인다. 김유빈은 이내 양 눈을 감고 음표에 매달린다. 고소공포증이 없더라도 움직임이 멈추지 않는 곳에서 밑을 내려다보는 것은 고역이다. 한유리는 감시를 제대로 하지 않는 김유빈의 모습에 짜증을 느끼지만, 연주하기 있는 동안은 크게 화를 낼 수도 없다.
"근데 너무 조용한 거 아니야?"
양치기 소년의 이야기는 소년이 큰 소리로 "늑대가 나타났다!"라고 소리치는 것으로 시작한다. 지금 한 시간 째 날아다니고 있지만, 소년은 그저 양 떼를 몰고 있다. 한유리도 그 말에 의문을 느낀다.
"설마."
한유리는 무언가 생각 난 게 있는듯하다. 기타에서 울리는 선율이 달라진다. 그 선율에 맞춰 음표도 바람을 타고 흘러간다.
초원에 가까이 붙은 숲. 두 명의 사서가 내려앉는다. 숲은 기분 나쁠 정도로 고요하다. 나무뿌리를 넘어가며 두 사람은 숲에 들어간다. 새들의 노래도, 동물들의 움직임도 없다.
"너무 조용한데?"
김유빈은 오싹함을 느낀다. 그리고 검은 그림자를 보았다. 한유리와 김유빈의 눈이 커진다.
"악마!"
한유리는 등에 멘 기타를 연주한다. 음악은 날카로운 불협화음이 되어 악마를 향해 쇄도한다. 연주는 무심하게 그림자를 지나친다. 그림자는 웃었다. 입도 얼굴도 없지만, 웃었다. 그리고 점차 사라진다.
"놓쳤어."
한유리는 기타를 내려놓는다. 숲을 둘러본다. 기이한 적막만이 흐른다. 악마가 있던 자리에는 한 무리의 늑대가 죽어있다. 김유빈은 죽은 늑대를 보고 얼굴을 찌푸린다. 특별한 상처가 없어서 보는 것 자체에 무리는 없다. 그래도, 비록 이야기 속이라도 제대로 죽음을 본 것은 처음이다.
"당했다."
악마가 무슨 짓을 저지른 지 깨달은 한유리는 한숨을 쉰다.
"역시 그런 거겠지?"
김유빈도 대략 눈치를 챈다. 이제, 숲에는 늑대가 없다. 악마는 양치기 소년에게도 수를 썼을 것이다. 소년은 늑대가 있다고 소리치지 않을 것이다. 마을 사람들도 달려오지 않을 것이다. 늑대가 나타나 소년을 잡아먹지도 않을 것이다. 양치기 소년의 이야기는 시작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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