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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량한 방. 침대, 옷장, 책장, 책상, 의자만이 있는 방. 책장에 몇 권의 책이 꽂혀 있긴 하지만, 어떤 책인지는 모른다. 벽에서는 강한 햇살이 들어온다.
"우와. 진짜 아무것도 없네."
"응? 네 방은 달라?"
다 같은 방인 줄 알았는데. 설마! 내가 수습이라서! 너무한 거 아니냐! 인턴과 정직원의 차이가 심한 회사는 다니는 거 아닌데. 여기 들어오는 게 아니었어.
"뭐 필요한 가구가 있어?"
한유리가 질문해 온다. 신청하면 받을 수 있나? 아까 욕한 거 취소. 대기록원 최고의 직장이에요!
딱히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질문이라, 고민에 빠진다. 침대는 있고, 옷장도 있고. 아 옷이 없네. 그리고 냉장고도. 필요 없나? 잘 모르겠다.
"너 소설 쓸 때 어떻게 써?"
"컴퓨터로 타자 두드려서."
"옷도 필요할 테고, TV는?"
"별로 안 봐."
한유리는 다시 펜을 꺼낸다. 이번에도 황금 펜으로 하는 건가. 진짜 빨리 정식 달아야지. 펜이 움직인다. 자유자재로. 황금의 빛을 반짝이며. 무언가 써내려갈 때마다 내 방에 무언가 채워져 간다.
책상에는 컴퓨터가 올라간다. 옷장이 열리고 각종 의복이 차례차례 쌓여간다. 책장에도 책이 이것저것 쌓여간다. 그것 말고도 샴푸라든지, 비누라든지 실생활에 쓸 물건들이 쌓여간다. 역시 대단하군.
"이 정도면 된 거 같은데? 난 옆방이니까 뭔가 필요하면 불러."
한유리는 허리에 손을 얹고 가슴을 편다. 당당한 포부. 너무 멋져!
"그럼 오늘은 휴식! 나중에 부르러 올 거다."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간다. 약간 갑작스럽다. 일단 만들어진 물건들을 정리하자. 세면도구는 욕실로 옮겨야지. 양손 한가득 물건을 들고 한글로 욕실이라 쓰여있는 문을 연다. 딱 여기만 한글이군.
엄청나다. 세 명이 들어가도 충분할 욕조, 뭐랄까 드라마에 나오는 샤워룸. 고급이라는 것은 확실히 알겠다. 들고온 물건들을 내려놓는다. 칫솔은 세면대에, 샴푸와 린스는 샤워룸에. 그러고 보니 화장실이 없네. 한유리한테 물어보기는 껄끄러운데. 나중에 급해지면 생각하자.
욕실에서 나와 옷을 살펴본다. 후드티, 셔츠, 정장, 양말, 속옷까지 완벽하다. 심지어 구두와 운동화, 샌들까지 놓여 있다. 그러고 보니 여기 서양식이네. 방안에서 신발을 신고 있다. 한유리한테 말해서 좌식으로 바꿔야겠다. 마룻바닥을 맨발로 밟아야 안심이 된단 말이야.
책장을 살핀다. 사단으로 만들어져 있자. 제일 위에는 원래 놓여있던 책들. 제일 아래에는 한유리가 만들어준 책들. 일단 아래에 있는 책을 보자. 다행히 한글이다. 책등에 쓰여 있는 이름들은 「창의적 글쓰기」, 「글쓰기의 기본」, 「만물 대백과」 등등. 아마 글쓰기에 도움이 되는 책들인 것 같다.
위쪽에 놓인 책을 본다. 이것도 한글. 「오르니아의 왕 웹 연재분」,「오르니아의 왕 1권」, 「김유빈 단편」, 「마법은 살아있다」. 내가 썼던 글들. 단편집을 꺼내 본다. 표지는 흰색. 색. 작가 이름에는 내 이름이 적혀있다. 목차에는 여태까지 써왔던 글들이 적혀있다. 인터넷에 올렸던 것도, 그냥 노트에 끄적인 것도. 전부 있다. 내가 만들었던 이야기가. 내가 만들었던 세계가.
내 심정을 말하자면. 조금 당황스럽다. 그리고 뭐랄까 심금을 울린다. 내 글들은 한 번도 종이책으로, 실물로 본 적이 없다. 오르니아의 왕이 계약은 되었지만, 보기 전에 죽었지. 새롭다. 이렇게 책으로 보니.
책을 다시 꽂아 넣는다. 이번에는 책상 앞의 의자에 앉는다. 식당에 있던 의자와 비슷한 느낌. 컴퓨터를 켠다. 본체와 모니터 마우스와 키보드까지 내가 쓰던 물건과 똑같다. 한유리는 내가 쓰던 게 뭔지 모를 텐데.
컴퓨터가 켜진다. 항상 봐왔던 바탕화면. 사실 기본 설정이지만. 바로 가기 아이콘들도, 폴더들도, 시작 메뉴도 내가 쓰던 것과 같다. 폴더 하나를 열어본다. 오르니아의 왕이 들어 있는 폴더. 수십 개의 파일. 내가 써내려간 설정들, 시놉시스들. 그리고 유일한 본문.
내가 죽기 전까지 쓰던 부분과 같다. 1권이 끝난 부분. 본격적인 이야기의 시작을 알리는 전투 장면. 감회가 새롭다. 말로 표현 못 할 감정. 이런 것도 표현 못 하면 안 되는데.
오늘은 글을 쓸 기분이 아니다. 침대에 눕는다. 내가 오늘 깨어난 침대. 원래 집에 있던 침대와는 다른 침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자 이제야 내가 죽었다는 실감이 난다. 천장에는 별이 없다. 내 방에는 야광 별이 붙어 있지. 항상 자기 전에 그 별들을 보며 작가가 되어있을 나를 꿈꿨다.
가만히. 가만히 누워 천장을 바라본다. 아무것도 없는 흰색. 천장을 바라본다. 눈에는 천장이 비치지만, 뇌에는 천장이 비치지 않는다. 나는 죽었다. 나는 죽었다. 나는 죽었다. 그리고 이렇게 살아 숨 쉰다. 작가가 되지 못했다. 작가가 되어가고 있다.
인생의 허무가 느껴진다. 작가를 꿈꾸던 소년은 작가가 되지 못하고 죽었다. 그리고 죽은 뒤에 글을 쓸 기회를 얻었다. 내 인생을 한 줄로 정리하면 저렇게 되겠지.
나는 죽었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눈물은 나오지 않는다. 이곳에서 이룰 수 있으니. 잠이 오지 않는다. 생각이 너무 많다. 그저 하얀 천장을 바라본다. 하얗고 하얀 천장. 별이 없는 천장. 이루어야 할 꿈을 잃어버린 천장.
눈을 감는다. 내 삶을 떠올린다. 처음 읽은 책. 처음 쓴 글. 처음 받은 별점. 처음 받은 댓글. 내가 있기 위해 있었던 처음들.
기분이 묘하다. 죽었다는 느낌이 묘하다. 낯선 침대가 묘하다.
눈을 감는다. 창밖에는 해가 떠 있다. 햇살이 내 눈을 찌른다. 그렇지만 눈을 감는다. 깊은 어둠으로. 더욱 깊은 심연으로. 나의 정신이 빨려 들어간다.



쾅. 쾅. 쾅. 시끄러운 소리. 무언가 두드리는 소리.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 심연에서 벗어난다. 올라온다. 어둠에서 벗어난다. 올라온다. 정신은 점차 떠오른다. 위로. 위로. 빛으로.
닫힌 눈꺼풀 너머로 햇살이 느껴진다. 눈을 뜬다. 햇살이 내 눈을 찌른다. 눈을 깜빡인다. 하얀 천장이 보인다. 별이 달리지 않은. 몸을 일으킨다.
"언제까지 잘 거야! 얼른 준비해서 나와!"
문 너머로 들리는 한유리의 목소리. 잠들었었나? 몸이 뻐근하지 않다. 정신이 피로하지 않다. 침대는 젖어 있다. 내 눈도 젖어 있다.
침대에서 일어난다. 옷은 갈아입어야겠지. 옷을 벗는다. 그나저나 빨래는 어떻게 하지? 일단 대충 옷장에 쑤셔 넣는다. 새로운 옷을 입는다. 처음 입는 옷. 그렇지만 사이즈가 맞다. 다시 신발을 신는다. 잠깐. 난 집에서 죽었는데 왜 신발을 신고 있지? 그것도 내가 항상 신던 운동화를.
쾅. 쾅. 쾅. 의문을 가질 시간은 없다. 문으로 가서 문을 연다. 한껏 화가 나 있는 한유리가 서 있다.
"늦어!"
"미안."
"그래서 새로운 삶을 살아갈 준비는 됐어?"
몸을 돌려 방을 본다. 새로운 방. 이전과 같지 않은 방.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갈 곳. 그래. 이게 내 새로운 삶이다. 인간 김유빈이 아닌, 사서 김유빈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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