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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빈은 자신을 본다. 정확하게 말하면, 자신의 세계를 본다. 자신이 써내려간 이야기를 끌어오기 위해. 주위를 둘러본다. 김유빈의 머릿속에만 있던 인물들이 대지를 걷는다. 살아간다. 김유빈은 불러오기로 작정했던 것을 찾는다.
하얀색의 벽. 높다란 탑. 김유빈은 그곳으로 걸어 들어간다. 오르니아의 최강자. 본편에 등장한 적은 없지만, 언제나 언급되는 이름. 용을 죽이는 마법사. 김유빈이 생각하는 가장 강한 인간. 이곳은 그의 서재. 사실 이름도 정해지지 않은 인물이다.
김유빈은 천장까지 닿아있는 서재를 둘러본다. 이곳에 그가 찾는 것이 있다. 오르니아의 모든 마법이 적혀 있는 마법서. 용을 죽이는 마법사가 가지고 있는 마법서. 만약 불러낼 수 있다면, 강력한 힘이 되어줄 무기.
김유빈은 검은빛으로 빛나는 책에 손을 뻗는다. 책을 움켜쥐고 뽑아낸다. 책은 조금씩 김유빈의 손을 따라 책장에서 나온다.
"빨리!"
한유리의 고함이 김유빈의 집중을 깬다. 김유빈은 왼손에 전해지는 묵직한 감각을 느낀다. 그 책. 마법서. 김유빈의 이야기에만 있던 것. 황금빛 문자로 제목이 적혀있다. 김유빈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글자지만, 뜻을 이해할 수 있다. 「위대한 마법서」.
김유빈은 고개를 들어 한유리를 바라본다. 어느샌가 불러낸 기타의 줄을 튕기자, 음표들이 불꽃의 늑대를 옭아맨다. 김유빈은 정신을 차린다.
"비켜!"
마법서를 펼친다. 정확하게 어디에 쓰여 있는지는 몰라도, 자신의 이야기에 있는 것이니 반드시 펼칠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이 있다. 한유리가 늑대에게서 멀찍이 떨어진다.
김유빈은 오른손을 뻗는다. 마법서에 적힌 글자는 김유빈이 모르는 언어. 하지만 동시에 김유빈이 만들어낸 세계의 언어. 글자를 읽어간다. 자신도 이해 못 하는 말을 내뱉는다.
언어는 마법이 되어 손에 모여든다. 마법은 주변을 얼어붙게 한다. 얼음은 불꽃을 이긴다. 김유빈의 세계의 법칙. 김유빈은 그것을 믿는다.
불꽃의 늑대는 음표의 감옥에서 빠져나온다. 음표는 산산이 부서져 기이한 소음을 내뱉는다. 늑대는 낮게 으르렁거리며 김유빈을 노려본다. 김유빈은 오른손에 생겨나는 마법을 믿고 늑대를 쏘아본다.
늑대는 땅을 박차고 김유빈에게 달려든다. 김유빈은 피하지 않는다. 늑대의 움직임을 끝까지 보고, 마법이 모여든 오른손을 내뻗는다.
마법으로 만들어진 얼음의 창이 불꽃을 향해 날아간다. 물리법칙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이것은 이야기고, 마법이니. 얼음의 창은 불꽃을 뚫고 지나간다. 늑대의 모습을 한 화염은 그대로 불똥이 되어 사라진다.
김유빈은 자리에 주저앉는다. 긴장이 풀려 다리도 풀렸다.
"방금 그건 뭐냐?"
약간 떨어진 곳에서 한유리는 헛웃음을 내뱉는다.
"마법."
"너 판타지 소설가야?"
김유빈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서 전투팀으로 온 거구나. 뭐. 덕분에 일은 쉽게 풀리겠네."
멀리서 폭음이 들려온다.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오는 곳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른다. 밤이 밝아진다. 거대한 붉은 빛이 어둠을 내어 쫓는다.
한유리와 김유빈은 시선을 교환한다. 말할 것도 없이 달려나간다.

거리의 건물들이 타오른다. 그 불타는 거리를 소녀가 걷는다. 바구니의 성냥을 그을 때마다 건물 한 채가 타오른다. 사람이 타오른다. 거리가 타오른다. 어둠이 타오른다.
"마법!"
소녀를 보자마자 한유리가 외친다. 김유빈은 다시 마법서를 펼친다. 입에서는 알 수 없는 언어가 흘러나온다. 오른손에서는 알 수 없는 마법이 일어난다. 불꽃의 소녀는 김유빈과 한유리를 바라본다.
한유리는 들고 있는 기타 줄을 튕긴다. 연주되는 선율은 소녀의 주위를 둘러싼다. 소녀는 성냥에 불을 붙인다. 한유리의 연주는 성냥의 불꽃에 타오른다.
"쳇."
공격이 막히자 혀를 찬다. 김유빈은 아직도 마법을 준비 중이다. 소녀는 조금씩 사서들에게 다가온다. 한유리의 연주는 소녀의 불꽃에 재가 되어간다. 그리고 김유빈이 눈을 뜬다.
김유빈의 오른손, 마법의 오른손이 하늘을 향한다. 손가락을 튕기자 하늘에서 눈이 내려온다. 건물을 불사르며 타오르는 화염은 그 눈을 녹일 듯이 이글거리지만, 눈은 녹지 않는다. 그저 사뿐히 내려앉는다. 눈이 화염에 닿자 불이 시들어 버린다. 거리의 불타는 건물들이 식어간다.
소녀의 눈동자는 불타오른다. 바구니에서 성냥을 꺼낸다. 성냥갑에 긋는 행위도 없다. 그저 성냥이 타오른다. 성냥의 작은 불꽃은 거대한 화염이 된다. 소녀의 손짓에 화염 덩어리는 김유빈을 향한다.
김유빈은 화염의 움직임을 주시한다. 중심을 찾는다. 일격에 부술 약점을. 오른손을 뻗는다. 중심을 향해서. 그리고 마법을 쏘아낸다.
얼음의 창은 불덩이를 완벽하게 꿰뚫는다. 그리고 그대로 폭발한다.
"죽어! 죽어! 죽어!"
소녀는 소리 지르며 성냥을 마구잡이로 켠다. 성냥의 불꽃들은 창이 되기도, 늑대가 되기도, 기사가 되기도 한다. 한유리는 불꽃의 군대를 음악으로 붙잡는다. 행동의 자유가 없는 불꽃들은 김유빈의 마법에 쉽게 사라진다.
"거의 끝났다! 좀만 더 힘내!"
과도한 힘의 사용 때문인지, 김유빈의 호흡은 거칠어진다. 한유리는 김유빈을 독려하며 연주를 멈추지 않는다. 한유리의 음표들은 계속 소녀를 압박한다. 소녀가 성냥을 집기 위해 바구니에 손을 뻗는다.
"어딜!"
얼음의 창이 바구니를 꿰뚫는다. 바구니는 성냥을 흩뿌리며 날아간다. 김유빈은 지쳤는지 무릎에 손을 데고 버티면서도 마법을 쏘아낸다. 무기를 잃은 소녀는 도망가려는 듯 몸을 돌린다. 한유리의 음악은 소녀의 발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김유빈이 오른손을 올린다. 마법이 모여들고, 얼음의 창이 날아간다. 날아가는 얼음의 창은 음악에 묶인 소녀의 등을 꿰뚫는다. 소녀를 관통하고 날아가는 얼음의 창에는 검은 그림자가 묻어있다. 벽에 부딪힌 얼음 창은 부서진다. 그림자는 조금씩 작아지다 사라진다. 소녀는 땅에 쓰러진다.
숨을 몰아쉬던 김유빈은 땅에 쓰러진다. 한유리는 쓰러진 김유빈에게 다가간다. 정신은 잃지 않았는지, 걸어오는 한유리를 바라본다.
"끝났어?"
"마무리만 하면 돼. 펜 좀 줄래?"
김유빈은 주머니를 뒤져 황금 펜을 한유리에게 건네준다. 한유리는 펜을 잡고 공중에 무언가를 써내러 간다. 김유빈은 한유리의 행동을 유심히 바라본다.
한유리가 적어 내려갈 때마다, 주변이 변해간다. 쓰러진 사람들은 일어나고, 타버린 건물들은 다시 세워진다. 김유빈은 자신의 마법보다 더 마법 같은 상황에 입을 다물지 못한다. 주변이 원래대로 돌아간다. 마지막엔 쓰러진 소녀도 다시 일어난다.
"끝났다."
체력을 회복한 김유빈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았다. 소녀는 골목길에서 성냥을 피운다. 성냥의 빛 너머로 소녀가 바라는 것들이 나타난다. 이제 소녀는 얼어 죽을 것이다.
한유리는 소녀를 바라보다 등을 돌린다.
"돌아가자. 내 손잡아."
한유리가 뻗은 손을 김유빈이 잡는다. 한유리는 황금의 펜으로 공중에 글을 써내려간다.
그리고 사서는 그곳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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