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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바로 실전 들어가자."
"잠깐만. 난 뭘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데?"
한유리는 내 말을 무시하고 책장을 바라본다. 나는 그저 그 뒷모습을 본다. 뭐 하는 거지?
책장에는 수많은 책이 꽂혀있다. 책등은 가지각색으로 빛난다. 빨간색, 파란색, 검은색, 흰색, 노란색. 전부 단색이네. 책등에도 제목이 쓰여있는 듯하지만, 역시나 영어. 가끔 다른 언어도 보인다. 한자나 일본어, 한글도 가끔 보인다. 아랍어처럼 보이는 것도 있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무언가가 책장에 꽂힌 책 사이를 헤엄친다. 검은 그림자. 가끔 책과 책의 틈으로 그 그림자가 보인다. 검은 그림자는 책장을 쏘다닌다. 계속 그것을 눈으로 좇는다. 한유리도 그것을 바라보는지 고개가 돌아간다.​
그것이 멈춰 선다. 그리고 하얀 책등이 검게 변해간다. 한유리는 그 책을 집어 든다. 저걸 기다린 건가?
"신입! 이리 와봐."
이름으로 불러주지를 않네. 일단 다가간다. 하얀 표지를 하고 있었을 그 책은 그림자의 영향인지, 조금씩 검게 변해간다.
한유리는 그 책을 나에게 들이민다. 얼떨결에 책을 양손으로 잡는다. 쓰여있는 제목은 「The Little Match Girl」. 작은 소녀인 건 알겠다. 무슨 소녀인지는 모르겠다. 작가의 이름인지, 밑에 Hans Christian Andersen이라 쓰여있다. 안데르센? 그 안데르센? 덴마크의 안데르센?
그럼 제목의 추측도 가능하지. 내가 알고 있는 동화중 소녀가 들어가는 안데르센 작품은 당연히 성냥팔이 소녀. 그런 의미구나.
"무슨 책인지 알겠어?"
한유리는 나를 무시하는 듯 코웃음을 친다. 후후. 다행히 추리에 성공했지.
"안데르센의 성냥팔이 소녀. 맞지?"
놀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다. 이런 걸로 놀라다니 너무하네. 이래뵈도 대학생인데. 평점은 2.8이지만.
"방금 네가 본 그림자가 악마야. 지금 그 이야기를 더럽히는 중이지."
그게 악마구나. 난 좀 더 뿔 달리고 날개 달렸을 거로 생각했는데. 그냥 그림자라니.
"그럼 들어가 볼까?"
"어딜?"
"이야기 속으로."
한유리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황금색 펜. 만년필 종류인듯하다. 내 손에서 책을 빼앗아간다. 그나저나 이야기로 들어간다고?
책. 안데르센의 성냥팔이 소녀를 펼친다. 그리고 들고 있는 펜을 가져다 덴다. 뭐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켜보자.
"책을 잡아."
일단 말을 들어 책의 한쪽 귀퉁이를 잡는다. 한유리는 펜을 이리저리 움직인다. 이상하게도, 펜이 움직인 자리에는 잉크가 남지 않는다. 잉크가 없는 펜은 아는 듯한데.
한유리는 펜을 움직이며 무언가 중얼거린다. 소리는 들리지만 이해할 수 없다. 영혼의 말은 자동 번역 아니었어? 책에서 빛이 난다. 한유리가 말을 이어갈수록 빛이 점점 강해진다.
"이야기여, 사서를 받아들여라."
마지막 문장만 머릿속에 이해된다. 그리고 책은 거대한 빛을 내뿜는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마치 나를 삼키듯이.



그리고 바닥에는 책 한 권만이 남는다.

"우웩."
김유빈은 강한 구토감을 이기지 못하고 무릎을 꿇고 토악질을 한다. 한유리는 그 옆에 서서 김유빈을 한심하게 쳐다본다.
"어지러워."
조금 진정 되었는지 김유빈이 몸을 일으킨다. 한유리가 생수병을 던져주자, 그것으로 입을 헹군다.
"차원 이동 후유증이야. 익숙해지는 게 좋을걸?"
한유리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김유빈의 어깨를 치고 지나간다. 멀어져 가는 한유리를 보며 김유빈은 한숨을 쉰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따라가야지.
김유빈은 자신이 걸어가는 거리를 살핀다. 그가 걷는 곳은 마치 유럽의 어느 도시와 같다. 현대의 유럽이 아니라, 성냥팔이 소녀의 배경이 되는 19세기의 유럽. 말 그대로 책 속으로 들어온 것만 같다.
"보인다."
한유리는 갑작스레 자리에 멈춰 선다. 김유빈은 숨을 몰아쉬며 한유리의 곁으로 다가간다.
"뭐가 보이는데?"
김유빈은 한유리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본다. 후줄근한 옷을 입은 금발의 여자아이가 바구니를 들고 서 있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건네지만, 모두가 거절한다.
"누군지 알겠어?"
"성냥팔이 소녀?"
그 말이 맞는다는 듯 한유리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진짜로 책 속으로 들어온 거야?"
"책 속이 아니라 이야기. 안데르센의 원작이 아니라, 사람들의 생각 속의 성냥팔이 소녀야."
김유빈은 이해하지 못했는지 고개를 갸웃한다. 한유리는 소녀와 약간 떨어진 곳에서 계속 소녀를 관찰한다.
"그래서 우리는 뭘 해야 하는 건데?"
"일단 지켜보기."
"그냥?"
"악마는 분명 뭔가를 벌일 거야. 우린 그걸 막는 거지. 아직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니 지켜보는 게 끝이야."
헤에. 김유빈의 입에서 한심한 소리가 나온다. 소녀는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건넨다. 이야기가 성냥팔이 소녀이니, 아마 성냥일 것이다.
한유리와 김유빈은 그저 한쪽 골목에서 계속 소녀를 바라본다. 한유리는 집중력을 잃지 않지만, 김유빈은 지루한지 계속 주변을 둘러본다.
오가는 사람들. 현대에서는 보기 힘든 디자인의 옷. 가끔 지나가는 마차. 오염 따위는 없는 청명한 하늘.
태양은 순식간에 진다. 말 그대로 순식간에.
"어?"
김유빈은 자연의 법칙을 무시한 천체의 움직임에 강한 당혹을 표출한다. 한유리는 주변이 어두워지는 것은 신경 쓰지 않는다.
"시작이다."
성냥팔이 소녀의 주된 시간적 배경은 겨울밤. 이제 이야기가 시작되려 한다.
갑자기 거리의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난다. 양복을 입은 남자들, 드레스를 입은 여자들, 떠드는 아이들.
김유빈의 귀에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성냥 사세요. 성냥 사세요."
작은 목소리. 힘이 없다.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가 무서워, 추위를 견디며 성냥을 판다. 하지만 아무도 작은 소녀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다. 소녀는 얼어붙은 손을 입김으로 녹이며 눈물을 닦는다.
한유리는 아직도 그 골목에 서서 소녀를 바라본다. 김유빈도 갑작스러운 상황의 변화에 소녀를 주시한다.
"아직인가?"
"뭐가?"
김유빈의 질문에 한유리는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다 댄다. 김유빈은 숨소리마저 낮춘다.
"악마가 나오지 않았어. 아직은 이야기가 그대로 진행 중이야."
소녀는 계속해서 성냥을 권유한다. 아무도 받아주지 않는다. 소녀는 쓸쓸히 자리에 주저앉는다.
등 뒤의 창문으로는 단란한 가족이 행복한 저녁 식사를 즐긴다. 소녀는 창문으로 그 광경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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