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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에 차가운 비가 떨어지는 것이 느껴진다.
누워있는 등 뒤로는 차가운 흙바닥이 느껴진다.
눈을 뜰 힘조차 없다. 숨을 쉬는 것만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
복부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게 느껴진다.
온몸에 격통이 느껴지지만, 허리 아래로는 감각이 없다. 척추라도 끊어졌나?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린다. 흙바닥을 밟으며 부드럽게.
숨 쉬는 소리가 소음이 되어 집중을 방해한다.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바로 옆에 있는 것 같다.

"죽어가는 기분은 어떻지?"

나를 이 꼴로 만든 남자가 말을 걸어온다. 입을 열어 소리를 내본다.

"으으...으"

입에서 나온 것은 그저 신음일 뿐. 어떠한 의미도 담지 못한다.
나는 죽어가고 있다. 나를 관찰하고 있을 저 남자에게.

"그러게 누가 규칙을 어기랬나?"

규칙을 어긴 것은 사실이다. 그건 실수였다.
실수했다고 일원을 죽음으로 밀어 넣는 거냐?
내가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데! 고작 실수로 죽여!
고함치고 싶지만, 입술조차 움직이지 않는다.

"이제 죽을 때다."

스르릉. 맑고 고운 소리. 저게 무슨 소리인지 안다. 
검집에서 검이 뽑혀 나오는 소리. 죽음을 알리는 소리.
차가운 금속이 가슴을 파고든다.
고통의 비명을 내지르고 싶지만, 나오는 것은 그저 힘없는 호흡.
생명이 빠져나가는 게 느껴진다.
점점 힘이 빠진다. 의식을 ... 유지... 하기가.. 힘....들다.




붉은색의 코트를 걸친 남자는 시체에서 검을 뽑는다.
몇 번 휘둘러 피를 털어낸 후 허리춤에 찬 검집에 집어넣는다.
가슴에서 피가 솟아나는 시체의 목덜미를 붙잡고 왔던 길로 되돌아간다.
그곳에는 남자가 타고 온 차가 머물러 있었고, 정장을 입은 다른 남성이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시체를 끌고 온 남자는 트렁크에 차고 있던 검과 시체를 싣고 운전석에 앉는다.

남자의 차는 검은색의 왜건이었다.
보닛과 범퍼가 무언가에 부딪혔는지 찌그러져 있다. 심지어 피까지 묻어있다.

"연락할까요?"

조수석에 앉은 남자가 물어보자 운전석의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차에 시동을 건다.
왜건은 사고 차량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게 부드럽게 움직인다.

"네. 복귀하겠습니다. 네. 후속처리팀이 필요할 겁니다.
네. 네. 보고하러 가겠습니다."

조수석의 남자는 핸드폰을 안주머니에 집어넣는다. 
가로등이 없는 시골길이지만 달이 밝게 떠 있기에 시야 확보에 어려움을 겪지는 않는다. 
10여 분을 주행할 무렵 전방에 검문소가 나타난다. 
차 안의 두 남자는 얼굴을 찡그린다. 들어올 때는 없었는데.

경찰의 수신호에 차량이 멈춰선다. 경찰은 찌그러진 보닛과 핏자국을 보더니 허리춤의 권총으로 손을 움직인다.
경찰은 창문을 두드렸고, 운전석의 창문이 내려간다.

"신분증 보여주시겠습니까?"

경찰은 떨리는 목소리로 신분증을 요구한다. 조수석의 남자가 안주머니로 손을 집어넣는다.
경찰은 침을 꼴깍 삼키고 한껏 긴장한다.
조수석의 남자는 안주머니에서 주민등록증을 꺼내 경찰에게 건넨다.
운전석의 남자도 지갑에서 주민등록증을 꺼내 제출한다.

경찰은 총이라도 나올까 긴장했던 자신을 한심하게 생각하면서 주민등록증을 확인한다.
어제 범죄 스릴러 영화를 보고 잔 탓이다.
주민등록증에는 두 명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등 적혀야 할 것이 적혀있었다.
경찰은 신분증을 남자들에게 건네주고 검문을 마치려 했다.
트렁크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보지 못했다면.

경찰은 떨어지는 핏방울들을 잘못 본 것이기를 빌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자기 안위와 직업윤리에서 고민하다 트렁크를 열어달라고 부탁한다.
운전석의 남자는 비웃음에 가까운 웃음을 흘리며 버튼을 눌러 트렁크를 연다.
경찰은 식은땀을 흘리며, 권총을 이미 반쯤 꺼낸 채로 트렁크를 확인하기 위해 차량의 뒤로 움직인다.

경찰은 트렁크에 들어있는 시체와 피 묻은 검을 보고 이미 울기 직전이었다.
왼 측에서 인기척은 느낀 경찰은 고개를 돌렸고, 그만 주저앉아버렸다.
피처럼 붉은 코트를 입은 남자는 주저앉은 경찰에게 다가가며 왼손을 안주머니에 집어넣는다.
경찰은 이제 진짜 죽는다고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는다.
한참 동안 총소리도 아픔도 느껴지지 않는 것을 의아하게 여긴 경찰이 눈을 뜬다.
붉은 코트의 남자는 오른손을 뻗은 상태로 멈춰 서있다.
경찰은 이게 무슨 짓이냐는 눈빛으로 남자를 쳐다본다.

"안 일어나시게요?"

남자의 말에 경찰은 머뭇거리면서 뻗은 손을 잡는다.
남자가 힘을 줘 경찰을 일으켜 세우고 자기소개를 시작한다.

"핏빛 십자 기사단 수도지부 현장 3팀의 기사 정진율입니다.
저 시체는 공무 집행 중에 발생한 것이니 그렇게 놀라시지 않아도 됩니다."

정진율이라 이름을 밝힌 남자는 왼손에 들려있는 기사단 수첩을 제출한다.
경찰 수첩과 같은 디자인의 그것에는 정진율의 신상 정보와 기사임을 입증하는 도장이 찍혀있었다.






"무고한 시민 놀리시다가 지부장님한테 호출당합니다."

"뭐 어때 재밌잖아?"

임무를 끝내고 돌아가는 길에 경찰을 놀렸다고 상익이가 잔소리를 퍼붓는다.

"얼마나 남았습니까?"

"1시간은 더 가야 해."

수도권 일대를 담당하는 수도지부이지만 오늘은 강원 지부의 요청으로 출장을 나섰다.
수도지부 사후처리팀 중 한 명이 변절하였기에 수도지부에서 처리하기로 나선 것이다.
한솥밥 먹던 사이였으니 껄끄러운 것은 사실이나 위험한 존재를 사회에 풀어놓을 수는 없다.
자수의 기회도 있었지만, 거부하고 달아났으니 사살 명령이 떨어졌다. 

"이제 진율 기사님과도 마지막이네요."

"너 이제 기사로 진급한다며? 3년 동안 고생 많았다."

기사로 진급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면접과 시험들을 통과하고 난 뒤에 다른 3년간 종자라는 이름으로 다른 기사의 조수 역할을 맡는다.
그동안 전체적인 수사방법과 전투방법들을 익히는 것이다.

"새로 종자 구하실 때까지는 쉬시는 건가요?"

"쉴 틈도 없이 구해질 거 같던데? 다음 주에 종자 배정해준 데."

"역시 3팀의 엘리트시군요."

"3팀의 미친개가 아니고?"

그 외에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며 수도지부 본청에 도착했다.
1층에서 상익이를 내려준 후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간다.
차가 찌그러져 있고 트렁크에는 피가 잔뜩 일 테니 정비소에 차를 주차했다.
정비팀에서 수리와 세척을 해줄 것이다.

"트렁크에 시체가 있으니까 알아서 처리해줘."

정비원에게 차를 맡기고 트렁크에서 검을 꺼내 핏기만 씻어내 챙긴 채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다.
임무를 끝냈으니 보고를 하러 가야 한다.
14층에서 내린 뒤 현장 3팀이라는 문패가 달린 문을 열고 들어간다.
이미 상익이는 팀장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문을 열고 팀장실 안으로 들어간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사무실 책상과 의자. 그 위에 앉아있는 중년 남성.
저 사람이 현장 3팀의 팀장인 유적성이다.
팀장은 우리를 보고 가까이 오라고 손짓한다. 보고하라는 의미겠지

"기사 정진율 보고합니다. 강원도에서 목표를 발견하여 사살하였습니다.
시체는 처리 중이며 그 외에 특이사항은 없습니다."

팀장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나가보라고 손을 휘젓는다.
저럴 거면 왜 불렀어. 상익이와 팀장실을 나선다.

"팀장님은 진율 기사님을 진짜 싫어하네요."

팀장이 나 싫어하는 거야 유명하지. 나랑 말을 섞는 것도 싫어한다.
그래도 규칙과 규범을 따르는 사람인지라, 업무상 피해를 주지는 않는다.

"순혈주의자들은 다 나 싫어하잖아."

내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나. 망할 것들.

"너무 괘념치 마세요. 그래도 3팀을 최고의 팀으로 만든 건 진율 기사님 아닙니까."

"그래 그런 거로 속 썩이는 것도 미련한 짓이지. 이제 기사도 됐겠다 술이나 마시러 갈까?"

"좋죠."




 

단잠을 방해하는 전화벨 소리. 아침부터 누구냐.
침대에 그대로 누워 손만을 뻗어 전화를 잡는다.
발신자는 수도지부의 인사담당관 유설아. 휴일에도 전화를 걸다니 망할 직장이다.

"정진율입니다."

아직 잠에서 덜 깨 목소리가 선명하지 못하다.

"너 아직도 자고 있었냐? 해가 중천이다."

전화를 귀에서 때고 시간을 확인한다. 11시 늦은 시간이긴 하네.

"어차피 어제 출장 때문에 오늘 휴식이거든요? 왜 전화하셨어요?"

상익이와 술을 마시고 들어온 게 3시쯤. 아직 더 자야 하는데.

"당장 본청으로 튀어와. 종자나 데려가라."

"다음 주 아니었어요?"

"그러니까 말이다. 팀장이 엘리트를 놀리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바로 데려가래."

제기랄. 종자를 기사로 취임시키면 한 달은 쉬게 해주는 게 예의 아니냐?
심지어 난 오늘 휴일인데?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인사담당관에게 말해도 의미 없고, 난 아직 백수가 되고 싶지는 않다.

"지금 출발할게요."

"빨리 와라."

미치겠다. 대충 씻고 옷만 어떻게 걸치고 현관을 열고 나선다.
어제 왜건의 수리가 끝나지 않아서 택시를 탔다. 출근 시간이 다 지나있어서 평소보다 빠르게 도착했다.
카드로 결제하고 본청 정문으로 들어간다.
수첩을 제시해 경비를 통과하고 로비로 갔지만, 1층에 머물러 있는 엘리베이터는 없었다.
어차피 인사과는 4층이니 걸어 올라가자. 계단을 뛰어 올라가 4층 인사과에 도착한다.
인사과 직원 하나가 방을 가리키며 얼른 들어가라고 했다.
옷을 가다듬고 심호흡을 한 후 문을 연다.

"늦어!"

들어오자마자 하는 소리가 그것뿐이냐.
고함치는 긴 생머리의 여자는 인사담당관 유설아.
한마디로 골드미스라 주장하는 히스테리 노처녀.
누구도 이 말을 입 밖에 꺼내는 무모를 감당하지는 못하지만, 인사과뿐만 아니라 본청 전체에 퍼져있는 소문이다.

"휴일에 불렀으면서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닥치고 이거나 읽어."

역시 히스테리 노처녀. 설아 씨가 건네준 것은 신상 보고서.
내 종자가 될 사람의 신상이 적혀있다.

"여자?"

"역시 좀 그런가?"

이름은 한백설. 21세. 인간. 고등학교 졸업. 성적은 좋고, 면접 점수도 좋네. 체력이 약간 부족하지만 3년간 구르다 보면 늘 테고.

"저는 상관없는데, 불편해하지 않을까요?"

"백설이는 상관없댔어. 한번 만나보고 결정해."

그게 정석이지. 설아 씨는 안쪽 문을 가리켰다. 저기서 대기하고 있단다.

"그런데 왜 갑자기 정해진 거예요? 원래대로라면 전 다음 주에 종자랑 만날 계획이었는데."

"낸들 알겠냐. 위에서 시키니까 하는 거지."

그렇겠지. 일단 만나보자. 설아 씨가 가리켰던 문을 열고 들어간다.
방 안에는 여자 한 명이 의자에 앉아 잔뜩 긴장한 상태로 굳어있다.
나도 저랬었지. 벽에 놓여있는 의자를 끌어다가 맞은편에 앉았다. 

"반갑다. 내가 너의 담당 기사가 될 정진율이다."

오른손을 내밀고 백설과 악수를 한다.

"앞으로 기사님의 종자로 일하게 될 한백설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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