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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남자는 말없이 서로를 본다. 남자는 말을 이어갈 생각이 없는 듯 입가에 잔잔한 웃음만 띠고 있다. 그럼 내가 물어봐야지.
"대기록원은 뭐고, 사서는 뭔가요?"
남자는 그제야 입을 연다.
"대기록원. 죽은 작가들이 모이는 곳. 모든 이야기가 있는 곳. 세계의 모든 기록이 모이는 곳."
"아카식 레코드?"
남자의 설명에 떠오른 단어를 입에 내뱉는다. 세상의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다는 환상의 개념.
"비슷하지. 명칭만 다를 뿐 사실 똑같은 개념이야."
대기록원은 아카식 레코드다. 라고 지금 저 남자는 말한다.
흐에.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난다.
"사서에 대해서도 물었지?"
고개를 얼른 끄덕인다. 갑자기 이곳에 관한 관심이 급증한다. 아카식 레코드라니.
"기록은 그냥 쌓이지 않아. 누군가 기록해야지. 그게 사서의 본질이야."
"기록을 직접 작성하는 건가요?"
"그것 말고도 기록의 수정, 오류 수정 등등의 잡무도 맡고 있지."
환상이 깨져 나간다. 그냥 사람을 갈아 넣는 거잖아. 뭔가 좀 더 신비로운 무언가 있을 줄 알았더니.
"저는 왜 사서가 된 거죠?"
이것도 의문. 갑자기 죽어서 불려 온 곳에서 톱니바퀴처럼 구르라니. 쉽게 받아드릴 수 없다.
"모든 작가는 죽은 뒤 대기록원에 오지. 그리고 이곳에서 사서로 일하는 거야."
"작가라는 이유 하나로?"
"작가라는 이유 하나로."
제기랄. 죽어서도 편히 쉬지 못할 거라면 작가가 되는 게 아니었는데.
"그래도 완결시키지 못한 작품을 완결시킬 기회를 얻지."
남자는 입가에 웃음을 짓는다. 작품의 완결. 모든 작가가 꿈꾸는 것. 내가 쓰던 「오르니아의 왕」도 완결되지 못했다. 약간 혹한다. 마무리 짓지 못한 작품을 완결시킬 수 있다니.
내 생각을 눈치챘는지 남자가 다시 입을 연다.
"어떡할래? 사서가 될 거야?"
미끼를 던져놓고 질문하다니. 성격도 고약하군. 그래도. 물어야지 어쩌겠어.
"해보죠. 사서."
남자가 씩 웃는다. 아. 잘못 선택했나. 후회해도 소용없다. 이미 결정은 내렸으니 받아드려야지.
​"그럼. 나를 정식으로 소개하지. 김유빈 수습 사서."
수습부터인가. 돼보지도 않은 인턴이 된 기분이다. 진짜 인턴처럼 중간에 잘리지 않았으면 좋겠네.
"나는 사서장 요하네스 필스버그. 전투팀의 팀장이지."
"전투팀이요?"
"그에 대해서는 나중에 얘기하자고. 일단 나 좀 따라와라."
요하네스 필스버그. 서양 이름이니까 요하네스가 이름이겠지? 요하네스라고 부르기에는 기니 요한이라고 부르자.
요한 씨는 의자에서 일어난 문으로 향한다. 나도 침대에서 일어난다. 요한은 문을 열고 복도에서 내가 나오기를 기다린다. 이제 새로운 곳으로 발을 내디딘다.
아직도 이곳에 익숙해지지 못했다. 갑자기 죽어서 온 곳이라니. 익숙해지기 힘들지.
복도는 붉은 융단이 깔린 채 기다랗게 이어져 있다. 양쪽 벽에는 방금 나온 방의 문과 같은 문이 복도에 쭉 놓여 있다.
각각의 문에는 금색 판이 달려있다. 그 판에 검은 글씨로 이름이 쓰여있다. 영어로 쓰여있기에 제대로 읽지는 못하겠다.
내가 나온 방문에도 `Kim Yubin`이라고 쓰여있다. 다른 사람들의 이름을 살피기도 전에 요한 씨가 저 멀리 걸어간다. 이러다가는 놓치겠다 싶어 빠르게 따라간다.
복도를 끝도 없이 걷는다. 계속해서 같은 풍경. 벽에는 문이 있고 바닥에는 붉은 융단이 깔렸다.
"저. 요하네스 씨."
마음속으로는 요한 씨라고 불러도 갑자기 요한이라고 부르는 건 예의가 아니겠지. 요한 씨는 멈춰 서서 나를 바라본다.
"이 복도는 언제 끝나나요."
"좀만 더 걸으면 돼."
요한 씨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복도를 걷는다. 따라갈 수밖에 없나. 나도 멈췄던 갈음을 재개한다.
조금 더 걷자 복도가 끝난다. 나타난 것은 거대한 문. 문에는 홀이라고 영어로 쓰여있다. 나라도 이 정도는 읽는다. 역시 한국의 교육.
요한 씨는 그 문을 연다. 문 너머에는 말 그대로 거대한 홀이 있다. 천장에서 거대한 샹들리에가 빛을 발한다. 팔각형의 홀에는 벽마다 문이 하나씩 있다. 각각 문 옆에는 대리석으로 만든 동상이 서 있다. 여덟 개의 동상은 전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누구를 표현한 건지는 몰라도 잘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들어온 문에는 영어로 `Rooms` 라고 적혀있다. 숙소라는 의미로 쓰인 거겠지. 옆에 있는 동상은 왕관을 쓰고 검을 들고 서 있는 왕. 밑에는 금색의 이름표가 달려있다. `David`. 다비드. 다비드? 다비드. 다비드···. 어디서 들어봤는데.
"다윗의 동상이다."
요한 씨는 내 생각을 읽었는지 설명해준다.
"다윗? 그 다윗이요? 이스라엘의 왕? 골리앗을 물리친?"
내 질문에 요한 씨는 고개를 끄덕인다. 왜 여기에 동상이 있지? 작가들의 공간 아니었나?
"대부분이 그 동상의 이름을 알면 너와 비슷한 얼굴이 되지. 다윗은 전사고 왕이였지만, 동시에 시편을 쓴 사람이야. 작가라는 말이지."
"여기 있는 다른 동상들도 다 작가들이에요?"
"다 작가들이지. 무슨 기준인지는 모르겠지만. 기록실에는 플라톤. 전투팀 사무실에는 호메로스. 기록탐색실에는 나관중. 외부로 나가는 문에는 베토벤."
"베토벤? 음악가 아닌가요?"
"음악가는 음악이라는 작품을 만들지. 그러면 작가야. 음악가 말고도 사진작가, 화가, 극본가, 영화감독 같은 자신을 작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여있지."
작품을 만드는 사람은 다 작가라. 약간 애매한 기준이네.
"차원 이동로에는 미켈란젤로. 휴게실에는 세르반테스. 행정실에는 알퐁스 도테."
다 들어본 이름이다. 그나저나 진짜 기준이 없구나. 시대도 다르고, 동상이 서 있는 문이랑 매치도 안 된다.
"우리는 이곳을 동상들의 홀이라고 부르지. 그럼 계속 가자고."
요한 씨는 다시 걸음을 옮긴다. 향하는 방향은 오디세이아의 저자인 호메로스의 동상이 서 있는 곳. 전투팀 사무실. 영어로는 `Combat Team`. 사무실이라는 단어는 없군.
호메로스의 동상은 어디선가 본 옷을 입고 있다. 튜닉이라고 하나? 천 하나를 몸에 걸치고 있는 모습이 현대인에게는 충격적이다. 다 늙은 할아버지가 나보다 몸이 좋다.
"환영한다. 이곳이 네가 일하게 될 전투팀이다."
요한 씨는 전투팀 사무실의 문을 연다. 강한 빛에 눈을 잠시 감는다. 눈이 익숙해지자 눈을 뜬다. 그곳에는 거대한 책장들이 있다.
수많은 사람이 책을 들고 뛰어다닌다. 날아다니며 책을 넣었다, 뽑았다. 사다리가 자기 멋대로 움직인다. 그저 입이 떡 벌어지는 광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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