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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났다!"
책상에 엎어진다. 토할 거 같아. 3일 동안 물만 마시고 화장실만 가며 컴퓨터 앞에 앉아있었더니 죽을 것 같다. 그래도, 노력의 결정체가 모니터 너머에서 반짝인다.
빽빽이 적힌 글자. 첫 장에 적힌 큼지막한 글자. 「오르니아의 왕. 내일이 마감인 나의 첫 작품. 웃음이 새어 나온다. 이것으로 나도 프로 작가다.
넷상에 연재 중이던 작품이 출판사에 눈에 띄어 종이책으로 나온다. 돈을 받고. 이게 중요하다. 돈을 받고. 10개월간 연재한 보람이 있구나.
2개월 동안 한 권 분량, 300쪽, 15만 자. 다니던 대학도 때려치우고, 아르바이트도 때려치우고 방에만 틀어박혀 글만 써댔다. 첫 일 주일은 연재분을 옮겼다. 그러다 맘에 안 들어서 기본 플롯만 남기고, 싹 갈아엎었다. 처음부터 쓰기 시작했다. 원래 쓰던 속도로 쓰면 마감까지 쓸 수 있을 줄 알았다.
제기랄. 2만 자 정도 쓰고 처음부터 읽으니 나도 안 사겠더라. 처음부터 다시. 쓰고, 맘에 안 들어서 다시. 결국, 마감까지 보름밖에 안 남게 되었다. 쓴 것은 제로.
진짜 미친 듯이 써내러 갔다. 외부와의 연락은 끊고, 방안에서 최대한 나가지 않았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사기 위해서만 신발을 신었다. 그런데도 다 채우지 못했다.
남은 글자 수 2만 자, 남은 기한 3일. 그때부터는 잠도 자지 않았다. 쌓아놓은 커피와 각성제들을 마시며 컴퓨터 앞에만 앉아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의 결과가 지금 내 눈앞에 있다.
온몸에 기운이 없다. 얼른 메일로 보내고 잠을 자자. 배도 고프지만, 일단 자고 생각하자.
담당자의 메일로 원고를 보낸다. 문자도 보내야지.
신경 쓰지 않기 위해 한쪽 구석에 박아둔 핸드폰을 찾는다. 침대 위에 충전기가 연결된 채로 방치되어 있다.
침대도 3일 만이다. 의자에서 일어서 침대 쪽으로 걷는다. 아무것도 안 먹고, 한숨도 안 자서 그런지 몸이 무겁다. 발걸음이 천근만근.
한 근은 600그램. 천 근은 600킬로그램. 만 근은 6톤. 시답잖은 생각들이 머리를 에워싼다. 침대 까지 거의 다 왔다.
3일간 쓰지 않은 배게 위에 얹어져 있는 핸드폰으로 손을 뻗는다. 손도 무겁다. 온몸이 무겁다. 눈꺼풀은 자꾸만 내려온다. 문자 보내야 하는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침대에 쓰러진다. 포근하다. 그다지 좋은 침대는 아니지만, 시장이 반찬이란 말이 맞는 것 같다. 피로가 꿀잠을 불러온다는 정도로 바꾸면 알맞겠지.
어차피 메일도 보냈고, 그냥 잘까? 눈이 감긴다. 몸에 힘이 싹 빠져나간다. 오직 정신력을 밀어냈던 피로가 나를 덮친다.
세상은 어둠으로 가득 찬다. 몸은 공중에 붕 뜬 것만 같다.



밝은 빛. 감겨있는 눈동자 너머로 빛이 느껴진다. 얼마나 잤지? 눈을 감은 채로 머리 위로 손을 뻗는다. 핸드폰이 있을 거다.
손을 이리저리 휘둘러도 금속성의 물체가 느껴지지 않는다. 굴러떨어졌나? 어차피 중요하지 않다. 아직 피로가 덜 풀린 듯 몸이 무겁다. 다시 자자. 아침의 햇살은 나를 깨울 수 없다.
햇살? 머릿속을 의문이 가득 채운다. 내방에는 커튼을 쳐놨는데?
밤샘 작업을 하는 동안, 빛에 방해받지 않기 위해 두꺼운 커튼을 쳐놨다. 햇빛은 내 방에 들어오지 않는다.
온몸의 감각이 곤두선다. 내 얼굴과 팔, 몸에 닿아있는 것은 내 이불의 감촉이 아니다.
눈을 뜬다. 밝은 빛이 눈동자를 후벼 판다. 다행히 금방 동공이 작아진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내가 누워 있는 곳.
침대다. 일단 침대이긴 한데…….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침대. 영화나 드라마에서 부자들이 사용하는 침대. 이 질감을 표현할 방법을 나는 알지 못한다.
기겁하듯 일어난다. 침대에서 일어서 주변을 둘러본다. 나를 깨운 범인은 쉽게 찾았다. 벽 한쪽이 통유리로 되어있다. 그 유리창 너머로 밝은 태양이 떠 있다.
창문 너머로는 광활한 해변이 펼쳐져 있다. 당황스럽다. 살던 곳은 연신내의 원룸인데, 깨어난 곳은 파도가 몰아치는 바닷가.
고개를 돌려 방안을 살핀다. 방은 그다지 크지 않다. 한쪽 벽에는 침대와 욕실이라고 큼직하게 쓰인 문, 반대쪽 벽에는 책상과 의자, 옷장, 몇 권의 책이 꽂혀 있는 책꽂이가. 지금 내가 보는 해변이 보이는 창 반대쪽은 원목으로 만든 것으로 보이는 문이 있다.
좋아. 다 둘러봤어. 이제 어떻게 하지? 내 몸을 살펴본다. 다친 곳은 없어 보이고, 입고 있는 옷도 잘 때 입었던 옷.
일단 침착하자. 문을 열고 나갈지, 책꽂이에 꽃인 책을 살펴볼지를 정하자. 생각해보니 책을 읽을 여유가 있을 리가.
문으로 다가간다. 갈색의 문에는 이렇다 할 특징이 없다. 나무의 물결무늬만이 장식처럼 남아있다. 안쪽으로 열리는 문인지, 경첩이 보인다. 손잡이는 금색으로 반짝인다.
일단 심호흡을 한번 하고.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쉰다. 손잡이를 잡고 돌리려는데, 문이 열린다.
균형을 잃고 엉덩방아를 찧는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검은 양복을 입은 남성. 짧게 잘린 머리와 치켜 올라간 눈은 인상을 무섭게 만든다.
"일어났냐?"
목소리는 낮게 깔린다.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인다. 남자는 나를 지나쳐 방으로 들어간다. 책상 앞에 놓여있는 의자를 들고 침대 앞에 내려놓는다.
남자는 그대로 의자에 앉는다. 그리고 나를 보고 손가락을 까딱인다. 나보고 오라는 건가?
"침대에 앉아 봐."
고압적인 말투는 나에게 반항을 허락하지 않는다.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로 걸어간다. 인상도 나쁘고 말투도 고압적이지만,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는다. 역시 이 침대는 고급이다. 앉았는데도, 앉은 느낌이 들지 않는다. 남자는 계속 나를 바라본다.
"좋아. 쉽게 설명하지. 넌. 죽었어."
갑자기 떨어지는 사형선고. 내가? 죽었다고? 이렇게 살아있는데?
입을 벌리고 남자를 빤히 바라본다. 남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지상의 너는 과로사로 죽었다. 3일 동안 안 자고 안 먹으면서 글을 썼으니 당연하지."
"진짜 제가 죽었나요?"
죽었다는 말에도 왜인지 차분하다. 저 남자의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이 느껴진다.
"시체 보여줄까?"
고개를 젓는다. 그냥 죽었다고 믿자. 내가 사체를 보고 싶지는 않다. 별로 좋은 기분도 아닐 거다.
"그럼 여긴 천국?"
"비슷한 곳."
비슷한 곳이라니. 그렇게 모호한 대답이 또 있을까.
남자는 내 반응이 재미있는지 살짝 웃는다.
"이곳의 이름은 대기록원. 죽은 작가들이 모이는 곳이지."
죽은 작가들이 모이는 곳? 그런 곳도 있나? 새로운 신흥 종교인가? 작가들의 천국 그런 건가?
온갖 의문이 폭풍이 되어 머리를 헤집는다. 남자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 나간다.
"정식으로 환영한다. 김유빈. 대기록원의 사서가 된 것을."
내가? 사서? 그건 또 뭔데? 난 그런 거 바란 적 없는데?
남자의 말은 의문을 잠재우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 폭풍을 크게 만들 뿐. 남자는 그저 입가에 웃음을 짓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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