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1.05 20:48

테아모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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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서 제일 이해 안 가는 게 있어."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내가 고개를 들었다. 내가 말했다.

 

 "한여린. 갑자기 무슨 소리야?"

 

 "아니. 그렇잖아. 사랑은 대체 뭘까? 왜 그런 감정을 품는 것이며, 어떻게 그런 감정을 품는 걸까? 하람이 넌 안 궁금해?"

 

 내가 너한테 왜 그런 감정을 품는지는 나도 궁금하다. 이 말이 턱 바로 밑까지 올라왔지만 내뱉지 않았다.

 

 "그냥 태어났는데 그런 감정이 있으니까 그러려니 하고 사는 거지. 뭘 그런 걸 궁금해하고 그러냐. 그러니까 네가 아직도 남자친구가 없는 거야."

 

 "또또. 괜히 틱틱 되기는."

 

 여린이가 말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먼 산을 바라보았다. 여린이가 애인이 없는 데는 저런 여린이의 특이한 사고가 분명 한몫했을 것이다.

 

 괜찮다. 그런 점마저도 좋으니까. 내가 대놓고 여린이를 보고 있다. 어느새 고개를 떨어뜨리고 걷고 있는 여린이는 그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은근히 엉성한 것이 귀엽다.

 

 "이상하게 생각해도 어쩔 수 없어."

 

 "뭐?"

 

 여린이가 고개를 들어 심지가 굳은 눈으로 날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말이야. 이런 게 너무 궁금해. 난 이런 사람이야. 근데 내가 날 포기해야 해? 남자친구 때문에?"

 

 여기까지 말하고 여린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난 나를 포용해 주는 사람 만날 거야. 진짜 날 사랑한다면, 이런 내 모습마저도 사랑해주겠지."

 

 여린이는 공부를 잘한다. 똑똑하기 때문이다. 과연 그랬다.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의 그런 면마저 사랑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있을는지 모르겠다."

 

 괜히 심술부리는 나였다. 여린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 없으면, 나한테 와. 적어도 난 너 이해하니까."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지만, 사실 엄청난 용기를 내서 한 말이었다. 여린이라고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흠. 생각해볼게. 근데 세상에 괜찮은 사람이 그렇게 없으려고."

 

 여린이는 그날 그렇게 말했다. 이제야 기억하는 데, 마침 그 순간이 테아모에 도착한 순간이었다.

 


 


 "넌 금테로 바꾸라니까. 야. 요즘 검은색 금테도 있다?"

 

 "내가 뿔테가 좋다는데 자꾸 왜 그러냐."

 

 뿔테 안경은 다음 사람들의 전유물이다. 나쁘게 말하면 찐따, 좋게 말하면 범생이. 내가 놈에게 넌 둘 다 아니니 뿔테는 벗으라고 했다. 당연히 놈은 코웃음 쳤다.

 

 "그래서. 대체 왜 쫓아오는데? 설마 서명하라는 건 아니겠지."

 

 "설마 여기 서명 좀 해라."

 

 내가 볼펜과 함께 서류를 내밀었다. 놈은 또 한 번 코웃음 쳤다.

 

 "싫어. 나 귀찮은 거 질색한다는 거 모르냐? 절대 서명 안 해줄 거야."

 

 그러더니 놈이 홱 하고 뒤돌더니 앞으로 걸어갔다. 어느 정도 떨어진 놈의 등에 대과 내가 말했다.

 

 "네가 서명을 해주든 말든, 난 테아모 부술 거다. 왜. 이왕이면 경제적인 신형이 좋지."

 

 내가 이렇게 말하자 놈이 멈추더니 이내 다시 뒤돌았다. 놈은 잠시 주저하더니 입을 열었다.

 

 "테아모 안 부수면 안 되냐?"

 

 "내가 뭐라고 할 것 같냐?"

 

 내 말에 놈은 한숨을 내쉬었다.

 

 "부순다고 할 것 같은데."

 

 "정답."

 

 내 말이 마음에 안 들면서도, 놈은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어떤 삶을 어떻게 살았는지를 녀석이 모르는 바가 아니다.

 

 딱 한 번. 진짜 딱 한 번 여린이가 누군가를 좋아한 적이 있다. 두 살 연상인 잘생긴 남자 선배를 좋아했는데, 그 사람은 리더십 있고 인기 많은 사람이었다. 만약 둘이 사귀었다면 분명 선남선녀 커플이라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 선배란 놈이 별로 좋은 인간이 아니었단 것이다.

 

 그렇게 착실하고 모범생 같은 사람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우유 당번을 맡았을 적에 우연히 들은 그 말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담배 피우는 쓰레기들 사이에서 여린이라는 애가 자길 좋아하는 것 같다며, 얼굴은 괜찮은데 좀 찐따같다며, 토요일쯤에 한 판 놀고 다음 날 자기가 실수했다고 말하는 게 좋겠다는 말을 듣는데 얼마나 구역질이 났는지 모른다.

 

 그리고 내가 이 고민을 상담한 게 저 녀석이었으니 놈도 이걸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야. 나한테 테아모가 어떤 의미냐.

 

 사랑을 물 건너 순정만화로 배운 여린이를 위해 손수 쓴 러브레터를 눈물을 삼키며 빼돌려야 했던 그 시계탑이 아니냐. 용기 내서 썼는데 전달이 안 된 것 같다며 우는 여린이를 역청을 삼키며 달래줬던 그 시계탑이 아니냐.

 

 하루하루 나만큼이나 심한 사랑의 역병을 호소하는 여린이를 달랬던 그 시계탑이며, 와중에 여린이보다도 독한 사랑의 역병을 홀로 버텨야 했던 그 시계탑이다. 내게 테아모는 그렇다.

 

 "여린이. 그 미친놈이 어떤 놈인지 알게 됐을 때 너한테 사랑이 어떤 건지 물었었다며."

 

 술먹고 저놈한테만 다 말해버렸었다. 저놈은 그걸 그동안 혼자 끙끙 앓기만 했었냐고 나를 질타했었다.

 

 "후우. 돈 많이 든다냐?"

 

 놈이 잠시 주저했다가 말을 돌렸다. 내가 담담히 대답했다.

 

 "두세 배. 처음부터 다시 짓기보다 더 어렵단다. 건축물이 특이해 설계사도 비싼 돈 주고 사야 한다고."

 

 "진짜 다시 짓는 게 낫겠구나."

 

 돌부터 새로 구해야 하고, 기둥에 쓸 나무도 특이한 거란다. 테아모를 지은 그 건축가가 좀 예술가였다는 말을 납득할 수 있다.

 

 "서명. 해줄게."

 

 내가 고개를 들었다. 장난은 아닌 것 같았다.

 

 "내가 네가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냐. 들어보니 명분은 충분한 것 같은데. 후. 이 형님이 널 위해서 귀찮은 일 한두 개 정도는 해 줄게."

 

 그렇게 첫 번째 서명인이 확보됐다. 그 우울한 날을 밝혀준 친구에게 많은 기분을 느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잠깐 몇 달 동안 무슨 바람이 들어 학교에 되게 일찍 등교한 적이 있었다.

 

 교실문을 열면 보이는 그 교실은 당시 꽤 침울해했었다. 당시 교실이 뭐에 그렇게 침울해했는지는 모르겠다.

 

 "여린아. 자?"

 

 이렇게 예쁜 여자아이와 단둘이 있을 수 있었는데 말이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가진 그 여자애는 책상에 엎어져서 조금은 뚱한 표정으로 자고 있었다. 볼살이 눌려서 더더욱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여린이의 부모님께서 해외여행을 가셨다고 한다. 무려 두 달 동안 말이다. 원래는 여린이도 함께였는데 여린이는 자기는 공부해야 한다며, 두 분이서 애틋하게 다녀오시라고 빠졌다고 한다.

 

 친척분들도 바쁘신 관계로 여린이 부모님께서는 입학 때부터 쭉 함께 지내 내게 여린이를 부탁하시고 떠나셨다. 그래서 주말마다 집안일을 도와주고 평일에는 같이 일찍 등교해주고 있다.

 

 어제 밤늦게까지 공부했다고 하더니, 졸린 것 같았다. 여린이 옆자리에 앉아서 내 쪽을 바라보며 자는 여린이를 보는데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러다가 대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얼굴을 여린이 가까이 가져다 댔다.

 

 "어."

 

 코로 뜨거운 김을 뱉은 다음에, 내가 대체 왜 이런 짓을 했는지 궁금해졌다. 그러고는 얼굴이 빨개져서 머리를 원위치시켰다.

 

 오른손으로 입가를 가려 애써 평온한 척을 해보다가 생각했다. 내가, 대체, 뭘 하려고 얼굴을 가져다 댔을까. 생각할수록 얼굴이 빨개지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았다.

 


 


 나는 학창시절에 평범하지만 꽤 재밌는 학생이었다. 날 시기하는 놈이 없진 않았지만 그런 놈은 어딜 가나 있는 거고. 착하고 편했기 때문에 날 싫어하는 애들은 별로 없었다.

 

 여린이도 굉장히 착했었다. 다만 은근히 4차원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하지 않을 생각이나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여린이었기에 여린이와 순수한 의도로 진짜 절친하게 지내고 싶어하는 애들은 얼마 없었다. 가장 친한 친구인 나마저도 그 의도는 순수하지 않았으나 말 다했다.

 

 생각해보면 그것이 완벽한 여린이의 인생에 존재한 단 하나의 결점이 아니었나 싶다. 인간관계에 대한 뛰어난 통찰력을 바탕으로 꼭 필요한 조언을 해주는 여린이었지만, 정작 사람들은 그런 여린이 역시 비슷한 위로가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망각한 것이다.

 

 그런 여린이의 곁에 항상 내가 있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엔 생판 모르던 사이였던 우리지만, 거짓말처럼 친해졌다. 마치 운명처럼. 그래. 우리는 운명이 이어준 친구 사이였다.

 

 그런 운명 같은 친구 사이를 두고 아무런 소문도 돌지 않았다면 그 역시 신기한 일이다. 공공연한 비밀. 아무도 진지하게 생각하지는 않지만, 아무도 모르지는 않는. 그런 소문을 당사자의 부모인 우리 부모님께서 모르셨다면 그 역시 신기한 일이다.

 

 숙취때문에 고생하는 척하면서 오늘 아침 테아모를 부수겠다고 말했을 때,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아 부모님의 얼굴을 보진 못했다. 어떠셨을까. 헛소문이라 생각했던 소문을 시작으로 별의별 생각이 스쳐 지나가시진 않으셨을까. 아무것도 묻지 않으신 것에 고마움을 느낀다.

 

 요맘때가 그렇듯 따스한 햇볕에 눈이 따끔하다. 마을 대다수를 이루는 유럽풍 벽돌 건물은 분명 이국적이여야 할 테지만, 우리 마을 사람들에겐 토속적이다.

 

 그래서 이 늙은 시계탑이 더더욱 우리 마을에 어울리는 것이다. 낮에 보면 빅 벤이 떠오르는 것 같기도 한 테아모를 난 오전 10시에 마을을 산책하다가 만나버렸다.

 

 테아모를 올려다보고 있다. 겉보기엔 아직도 10년 전과 다를 바가 없이 정정해 보이는데, 이제는 가실 때가 다 되셨단다. 이 사실 자체는 우리 마을 사람들의 기분을 별로 좋지 않게 한다. 나라고 크게 예외는 아니다.

 

 그 시계탑 1층을 뻔뻔이 차지하고 있는 하늘북스에게 시선이 옮겨졌다. 평범한 중형서점이었다. 엄청난 예산을 들여가면서까지 테아모를 다시 지을 필요가 있게 할 정도의 가치가 있는 가게인지 오기가 들어 서점 안으로 발을 들였다.

 

 도시에서 많이 본 분위기의, 테아모와는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정작 주인은 카운터에 엎드려 자는 걸 보니 마음에 들기도 했다. 테아모도 그 인테리어는 서구식이었다.

 

 무슨 가치 있는 책을 파는지 확인하며 점점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사람은 없었다. 서점이니 그럴만했다. 테아모를 부수면 주인은 파리 날리는 가게를 비싼 값에 팔게 될 테니 좋아할 것 같았다.

 

 서점 가장 안쪽은 조명이 꺼져 있었다. 별생각 없이 그 안으로 들어갔다가 사람이 있다는 것에 놀랐다.

 

 여자는 책장 밑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있었다. 소설로 보이는 책을 읽고 있는데 책장에 가려서 햇볕이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조명도 이 여자가 일부러

끈 건가. 어둡지도 않나 보다. 얼굴에 보이는 옅은 미소를 보니 더욱 그렇다.

 

 그런데 어딘가 이상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검은 생머리와 여름날에 어울리는 하늘하늘한 하늘색 가로줄 무늬가 그어져 있는 하얀색 셔츠, 그리고 청바지가 특히 그랬다. 내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여자는 아직 날 알아차리지 못했다.

 

 달랐다. 여린이는 청바지는 좋아했지만, 저런 셔츠를 좋아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 분위기가 같았다. 책을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옅은 미소와 가지런히 정돈된 다리. 얼굴이 확연히 다르지 않았다면 아마 난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저."

 

 지금 생각해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여린이에 대한 그리움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첫눈에 반한 것 같기도 하다. 그냥 그 처음 보는 여자분이 테아모를 어떻게 생각하는 지가 너무 궁금했다. 여자분이 내게 고개를 돌리셨다.

 

 "주민 의견을 묻고 있는데요."

 

 엄마아빠도 내가 여린이를 좋아한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래서 남은 서명인은 딱 두 명이다. 이 가게 점장한테 하나 얻어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니, 남은 건 하나다.

 

 여자분이 날 바라보셨다. 아직 테아모를 부셔야 하는지 결정을 못 했다. 이 여자분의 의견이 내 의견에 많은 영향을 끼칠 것 같았다.

 

 

 

하람과 뿔테 안경의 대화를 읽고 난 뒤 하람과 여린의 대화를 읽으면 다른 내용이 보이도록 설계했는데 잘 됐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또 무슨 짓을 해야 건물을 보수하는게 새로운 신식 건물을 짓는 것보다 두세배 비싼 비용이 드는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모르는 게 많은데, 뭐 삶이라는 게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하루하루가 칠흑 속을 겉는 것 같고 그런 거죠.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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