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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용들은 빛도 어둠도 없는 안개뿐인 땅 위에 그저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무채색 세상 위에 불꽃이 일었으니, 그것이 바로 태초의 불꽃이었다.

 

불꽃에 열기와 증기가 생겨났다. 그러자 용들을 피해 지하의 어둠 속에 숨어살던 원시종족들이 화염을 나눠가져 그 힘에 의지해 지상으로 올라왔다. 그들은 불을 나눠가진 세 명의 선각자들을 따라 지상을 차지하고자 원주민들이었던 고룡들과 전쟁을 벌였고, 끝내 승리했다.

 

하지만 그렇게 열린 빛의 시대는 오래가지 못했으니, 세계의 빛이라 할 수 있는 태초의 불꽃이 점차 사그라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둠에서 비롯된 피륙이 빛을 갈구했기 때문이었을까. 불길이 약해지면서 인간들의 몸에 검은 구멍(dark ring)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몸에 검은 반흔이 나타난 인간들은 죽어도 죽지 못하는 불사의 몸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정신이 육체를 따라가지 못해 병자들은 이성을 잃은 괴물, 즉 망자로 전락했다.

 

망자화는 점차 가속되었고 설상가상으로 다크링과 함께 심연(abyss)이라는 전염병이 나타나기에 이르렀다. 심연에 잠식된 생명은 붉은 안광을 띄며 전신이 검은색 고름으로 뒤덮이다가 이형의 괴물로 전락하게 되는데, 심지어 이 병은 종족을 가리지도 않았다.

 

그러자 세 명의 선각자 중 스스로를 신이라 참칭했던 거인은 뒤늦게 불꽃을 되돌려놓고자 했으나 불의 힘에 취한 나머지 두 선각자는 이를 거부했고, 태양빛의 신이라 불리는 거인은 이미 노쇠하여 이제는 창을 들 힘조차 없었다.

 

만일 불이 꺼져 세계가 다시 안개에 잠긴다면 하늘 위로 도망친 고룡들이 내려와 이제 막 번성하기 시작한 지상의 생명들을 멸하리라. 차마 그리 둘 수 없었던 태양빛의 신은 그가 총애하던 네 명의 기사에게 자신의 힘을 나눠주어 세계를 좀먹는 심연과 대적하게 만들었다. 그런 뒤 그는 하나의 화로를 만들어 그 스스로를 불태워 열기를 지폈으니, 그가 바로 최초의 장작의 왕이었다.

 

하지만 재로 바스러지는 마지막 그 순간까지도 빛의 시대를 갈망했던 그의 염원과는 달리 시간이 흐를수록 불길은 약해져만 갔다. 결과적으로 신들의 도시라 불리는 로드란을 시작으로 무수한 문명이 몰락의 길을 걸었다.

 

그렇게 남겨진 태양빛 거인왕의 네 기사만이 남겨져 심연과 대적했으니 이들은

 

늑대기사 - 아르토리우스

왕의 칼날 - 키아란

용 사냥꾼 - 온슈타인

매의 눈 – 고.

 

네 기사는 왕의 사명을 이어받아 오랜 시간동안 심연과 대적했다. 그리고 또다시 긴 시간이 흘러, 태양빛 신의 광휘조차도 거의 사그라져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조차 남지 않은 시대의 끝자락에 심연과 맞서는 집단이 창설되었으니, 이들이 바로 심연의 감시자(the abyss watcher)다.

 

심연의 감시자들은 키아란과 아르토리우스, 두 기사의 사상과 불꽃을 이어받은 무력집단으로 이들의 사명은 지상에서 심연을 근절하는 것이다. 이들은 과거 아르토리우스가 충직한 늑대와 함께 다녔던 것을 숭상해 늑대기사의 불꽃을 계승한 것을 ‘늑대의 피를 이었다’고 말하며 스스로를 계승자라 칭한다.

 

이들은 전원이 불사자들로 이뤄진 집단으로 세간에서는 저주받은 망령들(cursed hollows)이나 불사대(the undead legion)라는 이명으로 불렸다.

 

 

*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고서 하는 거냐?”

 

“나야 말로 정당한 늑대 피의 계승자야!”

 

그 말에 남자는 투구과 귀까지 덮은 옷깃 사이로 드러낸 갈색 눈을 가늘게 좁혀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제 딴에는 얕보이지 않겠다는 듯 턱을 꼿꼿이 쳐들고 있지만, 키가 남자보다 머리통 두 개는 더 작아서 남자의 눈에는 소녀가 같잖아 보일뿐이었다. 그렇게 가늠하듯 지그시 쳐다보자 소녀는 곧 긴장한 듯 침을 꼴깍였다. 잠시 후 남자는 단호하게 말했다.

 

“안 돼.”

 

그 말에 소녀는 잠시 멍한 얼굴이 되었다고, 그네들 특유의 높은 톤의 목청으로 소란을 피웠다.

 

“에…, 뭐? 왜-!!”

 

남자가 거절한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먼저 소녀는 윤기 흐르는 흑발이었는데, 이는 흑발은 아스토라의 귀족들의 상징이었다. 게다가 뒤로 묶어 올린 긴 머리를 보면 확실히 어느 명문가의 자제임이 확실했다. 판금을 덧댄 맞춤형 가죽갑옷에 채 마모되지도 않아 윤이 흐르는 검과 방패를 보면 명문가의 자제가 나들이 나온 모양새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계승자는 방패를 쓰지 않아.”

 

계승자는 방패를 쓰지 않았다. 240개의 모든 관절을 사용해 극한의 동작을 만드는 팔란의 검술에 방패는 거추장스러울 뿐이었다. 그 사실을 전혀 모르는지, 아니면 그저 인정할 수 없었던 건지 소녀는 포기하지 않고 작게 볼을 떼를 쓰듯 말했다.

 

“뭐? 그런 법이 어디 있어! 미쳤어? 미친 거 아냐? 돌았냐고!”

 

점점 목소리를 높이는 소녀를, 남자는 기가 막힌다는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이런 꼬맹이가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늑대의 피를 마시며 맺은 서약과 함께 계승자에게 주어지는 숭고한 대의을 이해할 턱이 없었다.

 

“그래.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심연과 대적하겠어.”

 

그렇게 말하자, 대꾸할 말이 없는지 입술만 삐죽이는 소녀로부터 등을 돌리며 남자는 흘리듯 말했다.

 

“그만 돌아가. 꼬마를 대신해서 죽어줄 녀석들은 많아.”

 

애초에 이상한 조우였다고 생각하며 남자는 숲의 입구 쪽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미친망자를 상대하고 있는데 갑자기 나타나서는 자신을 계승자로 만들어달라니. 웃기지도 않는다.

 

“웃기지 마!”

 

남자의 등 뒤에서 앙칼진 목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눈을 고쳐 뜨며 본능적으로 등에 맨 대검을 뽑았다. 날아들던 칼날이 그의 코앞에서 아슬아슬하게 멈췄다. 이 불쾌한 기습에 남자는 미간을 좁히며 교차된 칼날 너머의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소녀는 이글대는 눈동자로 남자를 노려보며 화가 난 얼굴로 한 자씩 또박또박 끊어 말했다.

 

“실력에는, 자신, 있으니까!”

 

남자는 그의 칼날을 밀어내는 소녀의 묵직한 힘에 조금 놀랐다. 하지만 그건 여자애치고는 꽤나 힘이 강하다는 뜻이지 그를 밀어낼 정도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세상물정 모르는 철부지를 우물 속에서 건져줄 요량으로 그녀를 밀쳐냈다.

 

“윽?”

 

갑작스럽게 더해진 힘에 소녀가 뒤로 밀려나 주춤거리는 사이, 남자는 왼손으로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막 자세를 잡은 소녀를 향해 검을 날렸다. 마치 지면을 휩쓰는 듯한 일격에 소녀는 당황하면서 방패를 끌어올렸다.

 

투웅!

 

칼날이 방패를 두드린 순간, 남자의 눈이 희미한 이채를 띄었다. 분명 작은 체구 따위는 뒤로 날려버릴 힘을 실었는데, 소녀는 고작 한 걸음 뒤로 물러났을 뿐 여전히 턱 아래까지 방패를 끌어올리고 가장자리에 검면을 붙인 정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 제법.”

 

무심결에 짤막한 감상이 남자의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휘둘려지는 검에 실린 속도가 최고점에 도달하기 직전에 방패를 앞으로 내밀어 막아냈던 것이다. 이것은 소녀에게 적어도 전투감각은 있다는 의미였다.

 

“어때. 이 방패가 있는 한 나는 무적이라고!”

 

고작 가벼운 일격을 막아낸 것만으로 기세등등해진 소녀의 단순함이 재밌어서 남자는 피식 웃었다.

 

“씨이, 왜 비웃는 거야! 이 방패는 그 고명하신 늑대기사님이 쓰던 거라고!”

 

별안간 언급된 늑대기사의 이름에 남자는 어이없다는 듯 입을 벌렸다. 직후 소녀가 남자에게 달려들어 수직으로 내려벴다. 남자는 몸을 틀어 그것을 가볍게 피한 뒤 소녀의 아담한 상체를 가린 방패를 걷어찼고, 불시의 일격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방패가 팔과 함께 옆으로 젖혀졌다. 그녀의 몸통이 활짝 열린 순간, 남자는 옆구리를 향해 검면을 날려갔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겁에 질려 떠는 소녀의 얼굴을 보고는 차마 때리지 못하고 초인적인 팔 힘으로 검을 우뚝 멈춰 세웠다. 그러자 이때라는 듯 소녀의 칼날이 남자의 턱밑에 걸렸다.

 

“자, 내가 이겼지!”

 

실전이었다면 두 동강났을 주제에. 그렇게 속으로 반박하면서도 남자는 힘없이 숨을 터트리며 입을 열었다.

 

“그래, 네가 이겼다.”

 

“야호! 이 바보! 바보! 바보야! 꼬마한테 지니까 좋냐! 바보!”

 

유독 길게 자란 앞니를 활짝 내보이며 제 자리에서 방방 뛰는 소녀의 모습을, 남자는 대꾸하는 것도 잊은 채 홀린 듯 눈에 담았다. 무채색의 어둠에 익숙해진 남자의 시계에 소녀의 미소는 너무나도 눈부셨다.

 

“… 너, 이름은?”

 

“나? 나는 아르토리아! 진정한 늑대가 될 서쪽의 아르토리아!”

 

허리에 양 손을 얹고 가슴을 쭉 펴며 선포하듯 대답하는 소녀에게, 남자는 입을 열어 말했다.

 

“나는, 호크우드. 최초계승자(Frist-born).”

 

 

*

 

 

심연은 천지사방에서 그 비릿하고 꿈틀거리는 맹위를 떨쳤다. 그럴수록 불사대는 투쟁했고, 그들은 최근 결정의 노야(Noya the crystal sage)라 불리는 쌍둥이 마술사를 영입하는 것을 시작으로 끊임없이 세력권을 넓혀갔다. 죄를 저질러 고향에서 쫓겨난 귀양인들까지 영입한 그들은 곧 성직자와 마술사를 고루 갖춘 군단으로 거듭나 팔란 전역을 둘러쌀 정도의 성체를 세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양왕의 시대부터 세상을 잠식해온 비대한 악과 싸우기에 군단은 아직도 역부족이었다.

 

검은 고름이 된 인간, 심연에 미쳐버린 거인, 흑귀까지. 마치 잡초를 뽑듯 계속해서 갖가지 이형들을 제거해냈지만 바가지로 강물을 퍼내는 꼴이었다. 심지어 100명의 계승자 중 나약한 몇몇이 심연에 잠식되는 참상까지 벌어졌다. 동료들이 하나 둘씩 쓰러져가던 연전연퇴의 어느 날, 계승자들에게 상인국가 제나에 심연의 징조가 나타났다는 급보가 날아들었다. 그러자 성체 최심부 공동에서 곧장 회의가 열렸다.

 

“어떡하지?”

 

“어쩌긴, 군세를 제나로 돌려야지.”

 

“양민들까지 모두 말살하자는 건가?”

 

“제나가 당하면 그 다음은 빈헤임이야. 우라실 꼴이 날 걸?”

 

“웃기지 마, 내 가족이 제나에 있다고.”

 

“어차피 네 놈을 버린 가족이잖아. 불사자에게 가족 따위가 무슨 소용이라고.”

 

긴 석탁에 앉은 99인의 계승자들이 의견이 엇갈려 각자의 목소리를 드높였다. 창문 없이 촛불만 가득한 공동은 금세 미어터질 것처럼 소란스러워졌다. 석탁의 짧은 가장자리, 상석이라 부를 수 있는 곳에 앉은 호크우드는 잠자코 그 혼란을 지켜보았다. 행정의회는 기본적으로 다수결을 원칙으로 삼았지만 그는 선구자였다. 최초로 늑대 피를 계승한 그의 피를 나눠 마신 다른 계승자들은 어느 정도 그를 존중했고, 그 때문에 그는 신중하게 발언해야 했다. 심지어 지금은 말 한 마디 잘못해서 국가를 지워버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쿵.

 

그때 누군가가 석탁을 내리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제나를 정화하는데 반대야!”

 

아직 앳된 목소리. 투구를 벗어 석탁에 올려놓는 계승자는 아르토리아였다. 그녀는 특유의 초식동물처럼 서글서글한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 잠잠해진 사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될 거야. 죄 없는 사람들. 아이들까지. 섣불리 행동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100인의 계승자들 중 유일한 여성인데다가 나머지 45명에게 검술을 하나하나 가르친 아르토리아의 말은 꽤나 힘을 가졌다. 이렇게 되면 많은 계승자들이 그녀를 따를 거라고, 호크우드는 깍지 낀 손에 턱을 괜 채 조용히 그녀를 지켜보면서 생각했다. 이윽고 그의 생각대로 찬반은 딱 절반으로 나뉘었다. 기권이 9명에 45대 45인 상황이 되었다.

 

“호크우드.”

 

아르토리아가 아직 결정을 내리지 않은 호크우드를 쳐다보았다. 이제 그의 한 마디에 불사대의 행로가 결정될 것이다.

 

“확실하지도 않은 거잖아.”

 

아르토리아는 간절한 눈빛으로 호크우드를 쳐다보았다. “우디?” 하지만 호크우드는 고개를 틀어 아르토리아의 시선을 외면했다. 그는 조용히 투구를 벗어 석탁 위에 올렸다. 그런 뒤 떼어 말했다.

 

“확실해진 뒤에는 늦어.”

 

아르토리아는 윗니로 아랫입술을 지그시 내리누르며 호크우드를 잠시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불쾌한 듯 콧김을 내쉬고는 야멸찬 몸짓으로 그로부터 몸을 돌렸다. 방패와 검이 메인, 멀어져가는 그녀의 등을 보며 호크우드는 낮게 한숨 쉬었다. 그는 이런 면에서는 그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체 왜 망설이는 거지? 손가락이 썩어간다면 당연히 잘라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팔 전체를 잃게 될 테니까. 대체 왜 대의에는 다소의 희생이 따른다는 간단한 사실을 모르는 걸까?

 

 

*

 

 

늑대 피의 계승자 100명과 531인의 기사, 그리고 130명의 주술사와 성직자가 동쪽으로 진군했다. 세간에 검은색이라면 신분고하를 가리지 않고 말살한다는 냉혈한 집단이라고 알려진 덕분에 그들의 경로에 거치적대는 건 무성히 자라난 잡초뿐이었다. 먹지도, 자지도 쉬지도 않는 14일에 걸친 고된 행군 끝에 그들은 제나에 도착했다. 가장 먼저 그들을 반긴 것은 박살난 성문과 무너진 성벽이었다. 군단장인 호크우드는 먼저 대오를 정비하며 시가지로 척후대를 보냈다. 그리고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와중이었다.

 

“어?”

 

한 순간, 검은 그림자가 지상에 밀집한 군단을 뒤덮었다가 사라졌다. 호크우드와 아르토리아를 비롯한 682명의 전사들이 동시에 시선을 들어 머리 위를 살폈다. 호크우드는 눈을 좁혀 안력을 돋궜다. 그러자 동부의 맑은 하늘 위를 날아다니는 검은 물체가 눈에 보였다. 검은색? 요새? 아니다. 저것은-.

 

“드래곤, 드래곤-!!”

 

호크우드가 등에서 검을 풀러 쥐며 외쳤다. 용을 마주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군단 사이로 순식간에 혼란과 수런거림이 퍼져나갔다. 냉정해야할 지휘관인 호크우드조차도 잠시 공황에 빠졌다. 그 사이에도 검은 용은 그들을 향해 수직으로 하강하고 있었다.

 

“단장, 어서 명령을!”

 

부관이 호크우드를 닦달했다.

 

“화, 화살? 아니, 대궁? 대궁 같은 게 남아있을 턱이.”

 

용과 처음 마주한 호크우드는 당황했다. 그러는 사이 검은 용은 밀집한 전사들의 머리통 바로 위에서 두 장의 날개를 펼쳐 급정지했다.

 

“아, 안 돼.”

 

용의 입가로 이글거리는 불꽃을 본 호크우드의 투구 속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내 검은 용이 목을 쭉 빼내 운집한 전사들을 향해 불을 내뿜었다. 십 수 명의 기사가 공격 한 번 못해보고 그대로 쇳물로 녹아내렸다. 괴기스러운 용의 포효가 대기를 뒤흔들며 호크우드의 고막을 울렸다. 군단대오는 박살난 개미집처럼 순식간에 와해되었다.

 

채애애애애애앵-.

 

수정이 공명하는 소리와 함께 푸른결정으로 이뤄진 반투명한 창이 날아가 용의 몸통에 꽂혔다. 용은 고통스러운 듯 몸을 비틀며 다시 하늘로 날아올랐다. 쌍둥이 자매, 결정의 노야가 하늘로 결정마술을 쏘아 올리고 있었다. 그 틈에 주어진 짧고 귀중한 여유 속에서 호크우드는 눈을 굴리며 주변을 살폈다. 정신력이 약한 기사들은 전열을 갖추는 것조차 잊고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기 바빴고, 노야를 제외한 마술사들은 처음 보는 용에게 다른 의미로 넋이 나가 있었다. 성직자라고는 부르지만, 팔란 늪에서 송진심부름이나 하던 원시인에 불과한 그루들은 다룰 수 있는 기적이 적어서 도움이 되진 못할 것 같았다. 게다가 지성이 옅은 놈들이라 벌써 건물 뒤로 숨어버린지 오래였다.

 

“여기서 지면, 미래는 없겠지.”

 

호크우드는 그렇게 직감했다. 불사대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 순간 군단은 와해될 것이라고. 그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무언가, 이 공포와 혼란을 잠재울만한 계기가 필요했다. 그때 군단의 반대편에 용이 내려앉았다. 무거운 굉음과 함께 지면이 뒤흔들렸다. 용이 내지르는 괴성에 남은 군단병들은 땅이 무너지기라도 하듯 반대편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그 풍경이 마치 호크우드에게 파도가 밀려오는 것 같았다. 그는 묵묵히 두 손에 대검과 단검을 쥐고 인파를 뚫고 저벅저벅 걸어갔다. 사방에서 흙먼지가 휘날렸다. 앞으로 나간 그는 불을 뿜으며 성난 황소처럼 달려오는 용을 쳐다보며 두 팔을 교차해 불사대의 의례를 취했다.

 

“그거 알아, 우디?”

 

시야를 온통 가린 흙먼지 속에서 문득 옆을 돌아보니 아르토리아가 그곳에 서있었다. 대검의 끝으로 용을 겨누고 단검을 쥔 주먹을 팔뚝 위에 포갠, 그와 같은 자세를 취한 채.

 

“난 항상 용이 되고 싶었어.”

 

팽팽히 당겨진 활시위처럼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별안간 아르토리아가 호크우드에게 뜬금없는 말을 던졌다. 그 사이에도 이빨이 촘촘이 박힌 아가리를 벌리고 땅을 쿵쿵 울리며 다가오는 용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호크우드는 그녀의 장단에 어울렸다.

 

“왜?”

 

“너, 바보야? 날개 달렸잖아!”

 

“날개달린 거라면, 파리가 되는 게 더 쉬울 걸.”

 

“… 바보자식.”

 

용의 눈동자는 붉었다. 움푹 들어간 눈두덩 속 세모꼴의 홍채가 요사스러운 적광으로 길게 번져나고 있었다. 쿵쿵쿵쿵쿵. 용의 발톱이 땅을 긁어낼 때마다 땅이 울리며 돌조각이 우수수 튀어 올랐다. 그렇게 광견처럼 돌진해가던 용을 향해, 호크우드는 몸을 날렸다. 그리고는 곧장 집채만한 앞발에 얻어맞아 튕겨나가 건물 벽에 쳐박혀 온몸의 뼈가 산산 조각나 절명했다.

 

“우디-!!”

 

분노한 아르토리아가 용을 향해 돌진해 검을 휘둘렀고, 그녀 또한 짓밟혀 즉사했다. 둘을 죽인 용은 하늘을 향해 목을 곧추세우고 길게 포효했다. 그 사이 땅을 가린 안개 같은 먼지구름이 점점 옅어지기 시작했고, 밀집한 98인의 계승자들이 나타났다. 한 점의 흐트러짐도 없이 빽빽하게 대열을 갖추고 있던 그들은 용을 향해 일사분란하게 돌진했다. 그 광경은 마치 드높은 절벽을 향해 돌진하는 듯 부질없어 보였다. 용이 꼬리를 휘두를 때마다 계승자들은 무더기로 죽어나갔다. 하지만 그들의 수는 전혀 줄지 않았다.

 

“크헉.”

 

무너진 돌무더기 사이에서 다시 깨어난 호크우드는 곧장 검을 집어들고 용을 향해 달려 나갔다. 불사대는 죽을 수 없기에 불사대인 것이다. 이윽고 가랑비에 서서히 옷이 젖듯 용의 딱딱한 바위비늘이 점점 깨지고 갈라지기 시작했다. 호크우드는 용의 등덜미를 두드리며 생각했다. 대체 이 지겨운 전쟁은 언제쯤 끝나는 걸까. 끝이 있긴 한 건가? 하나를 없애면 둘이, 셋이 생겨나는데 완치가 가능하긴 한 건가? 그래, 썩은 부위를 도려내고, 도려내다보면 언젠가는 결착이 나겠지. 그때까지 나는 묵묵히 주어진 사명을 수행하면 된다.

 

죽어도 죽지 않는다. 부나방들이 다시 되살아나 끝임 없이 싸우는 광경은 멀리서 지켜보던 나머지 전사들에게 커다란 용기를 가져다주어 나머지 수백 명의 전사들이 전투에 가세했다. 그러자 이윽고 용은 개미떼에게 갉아 먹혀가는 전갈처럼 넝마가 되어 그 기다란 목을 땅에 뉘였다. 붉은 안광이 흐릿해지다가 까맣게 꺼져버렸다.

 

“용, 용이야! 용!”

 

전투가 끝난 뒤, 다른 전사들과 마찬가지로 너덜너덜한 차림이 된 아르토리아가 무너진 요새 같은 용의 사체 위에 발을 올리며 말했다.

 

“그래서 이 덩치가 제나의 모든 사람들을 먹어치운 거야? 우릴 대신해서?”

 

“… 그건 아닌 것 같은데.”

 

호크우드가 턱짓하는 곳, 아르토리아가 고개를 돌리는 곳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심연에 잠식된 비룡의 습격을 피해 숨어 있다가 사태가 정리되자 쭈뼛쭈뼛 고개를 내민 모양새였다. 제나의 국민들이 하나 둘씩 건물에서 빠져나와 시가지로 모이기 시작했다.

 

“괴물이 죽었네. 괴물이 죽었어! 괴물이 죽었다-!!”

 

한 남자의 외침은 곧 일파만파로 번져 도시 전체가 환호성으로 떠들썩해졌다. 감동한 군중들이 군단 앞으로 몰려들어 그들에게 앞 다투어 감사를 전하는 와중, 한 모녀가 호크우드와 아르토리아의 앞으로 다가왔다.

 

“정말 감사합니다, 재의 영웅들이시여.”

 

“뭘요, 당연한 일을 가지고요. 엣헴.”

 

아르토리아가 헤벌쭉 풀어진 얼굴로 콧등을 찡긋거렸다. 투구와 목깃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칭찬에 약한 그녀의 하얀 얼굴은 지금쯤 빨갛게 달아올랐을 것이다.

 

“저기, 기사님. 이거.”

 

여인의 치마폭 뒤에 숨어있던 여자아이가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호크우드에게 다가가 작은 인형을 내밀었다. 어린아이의 성의를 무시해서 좋을 건 없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호크우드는 인형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다가 무심코 아이의 눈동자가 그의 시야에 들어와 그는 멈칫하다가 인형을 받아들었다.

 

“이름이 뭐지?”

 

호크우드의 물음에 아이는 머뭇머뭇 대답했다.

 

“… 마르셀라.”

 

“그래, 마르셀라. 네게 줄게 있단다. 눈을 감아볼래?”

 

“정말요?”


“그래. 대신 절대 눈을 뜨면 안 된다.”

 

아이가 잔뜩 기대에 찬 얼굴로 눈을 감았다. 그러자 호크우드는 작은 인형을 벨트갈퀴에 매달았다. 그런 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대검을 휘둘렀다. “어…?” 아르토리아와 아이의 어미는 그 인지를 벗어난 광경에 멍하니 허공으로 떠오른 아이의 머리통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는 듯 평온한 표정의 머리통이 바닥을 때림과 동시에 정체되었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끼야아아아아악-!!”

 

여인은 검은 피를 뿜어내는 시체 앞에 주저앉아 비명을 내질렀다. 아르토리아가 뭐라고 말하려 입을 연 순간, 호크우드는 그런 여인까지 베어 넘겼다. 칼을 휘두르는 그의 얼굴은 한없이 무표정했다. 인간이 아닌, 조각상인 것처럼. 주춤 굳어있는 불사대에게 그는 명령을 내렸다.

 

“심연을 정화하라!”

 

선고가 내려지자 팔란의 불사대는 훈련받은 것처럼 톱니바퀴처럼 정교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죽어나간 이들은 광장에 모인 군중들 중 가장 앞 열이었다. 무성한 잡초를 베며 정글을 나아가듯 전사들은 혼란에 빠진 양민들을 가차 없이 베어 넘겼다. 그들의 검은 어른이나 아이를 가리지 않았다. 그 아비규환의 중심에서 아르토리아는 백치처럼 얼떨떨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뭐…. 왜, 왜…?”

 

호크우드는 그녀의 옆에 우두커니 서서 그녀에게 말했다.

 

“붉은 안광은 심연의 징조. 이게 유일한 방법이야.”

 

굴곡 없는 그의 목소리에 아르토리아는 그를 쳐다보며 말을 더듬었다.

 

“하, 하지만. 하지마안-.”

 

“너도 알고 있었잖아, 토리.”

 

“그래도…. 그래도-!!”

 

이건 옳지 않다는 듯 아르토리아가 외쳤다. 그녀의 손에서 힘없이 빠져나온 검과 방패가 바닥에 떨어졌다. 이윽고 호크우드는 덤벼드는 아르토리아에게 밀려 털썩 쓰러졌다. 그는 그의 몸을 올라탄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냥…, 아이였을 뿐이잖아.”

 

어둠은 어른과 아이를 가리지 않는다. 그 당연한 사실을 호크우드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오만고통이 한데 뒤섞인 것처럼 아파보이는 그녀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왜, 왜….”

 

호크우드의 멱살을 쥐고 흔들던 그녀는 이윽고 목이 매여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던지 그의 가슴에 이마를 갖다 대고 작게 흐느끼며 몸을 떨었다. 도시가 불타며 사방에서 맵고 싸한 연기가 솟구쳤다. 비명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그녀의 슬픔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의 가족도 아닌데, 일면식도 없는 타지인 따위를 위해서 눈물을 흘리는 그녀의 심리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아서, 호크우드는 그녀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

 

 

최근 급증한 늪지대의 흑귀 토벌을 마치고 성채본영으로 돌아온 호크우드는 무기창으로 걸어가던 도중 쇠사슬에 묶인 채 그루들에게 어딘가로 끌려가던 한 계승자와 마주쳤다. 투구 아래로 드러난 희미한 붉은 안광을 본 순간 그는 반사적으로 등 뒤의 칼자루를 쥐었다. 하지만 이내 그는 눈앞에서 끌려가는 여인이 아르토리아라는 것을 알아보고 손을 내렸다. 그는 짐짓 태연한 목소리로 그녀의 양팔을 붙든 그루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무슨 일이지?”

 

“께륵? 께륵?”

 

군단장이 말을 걸어오자 그루들은 당황한 듯 그들 특유의 원시적인 목 울림만 반복했다.

 

“여기서부터는 내가 데려가지.”

 

간단히 그루들을 따돌린 호크우드는 남들의 눈을 피해 자신의 막사로 아르토리아를 데려갔다. 그 뒤 그녀를 묶은 사슬을 풀고 피에 절은 투구와 갑옷을 벗겼다.

 

“… 토리.”

 

수백 일 만에 다시 만난 아르토리아는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더욱 초췌해져있었다. 보석처럼 빛을 머금고 반짝이던 눈동자는 어두운 늪처럼 가라앉아있었고, 눈빛은 건조했다. 마치 강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는 것 같아서, 호크우드는 마음이 착잡해졌다. 그가 알던 철부지는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은 것 같았다.

 

“… 너는, 누구?”

 

아르토리아의 붉은 기운이 감도는 푸른 눈동자는 멍하니 풀려 있었는데, 그녀의 초점은 코앞에 있는 호크우드의 얼굴을 잡지 못하고 허공을 헤맸다. 잠시 그렇게 어렵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녀는 곧 환하게 미소 지었다.

 

“아. 아아…. 그래, 너구나. 우디….”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손을 들어 기쁜 듯 호크우드의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그녀는 기사들에게 사로잡혔을 때 주술에 걸려 눈이 멀어버린 것 같았다. 그녀의 여린 마음은 제나에서 있었던 일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지난날의 참상이 속에서부터 그녀를 파먹어나갔을 것이다. 그녀가 팔란을 떠나 법왕을 토벌하기 위해 이루실로 떠났을 때 그녀를 붙잡았어야 했다. 그녀의 곁에 있어줘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마음은 그녀를 원했지만 이성은 숭고한 대의를 따랐다.

 

“느껴져?”

 

아르토리아가 호크우드의 손을 잡아 그녀의 가슴에 가져다 대며 그에게 물었다. 손바닥 아래로 전해지는 뭉클한 감촉 뒤에 짙게 깔린 어둠을 느끼며 호크우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 안의 구멍이, 계속 커지고 있어.”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곧 나는 모든 걸 잊겠지. 너도, 나도. 그러니까….”

 

“방법, 어딘가에 방법이 있을 거야.”

 

사실 방법 따위는 어디에도 없다는 걸 알았지만, 이어질 말을 듣기가 두려웠던 호크우드는 그렇게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러자 아르토리아는 그의 뺨을 만지면서 미소 지었다.

 

“너, 바보야?”

 

그녀의 입가에 걸린 쓸쓸한 미소가 호크우드의 눈에는 어쩐지 기뻐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가봐.” 그렇게 말하며 호크우드는 아르토리아를 끌어안았다. “… 죽기 싫어.” 흐느낌으로 시작된 작고 힘없는 그녀의 목소리가 호크우드의 귓가에 맺혔다. 그녀는 곧 덜덜 떨며 울기 시작했다.

 

“흐윽, 죽기 싫어. 나는 살고 싶은데, 근데 죽어야 해. 우디, 나는 어떡하면 되는 거야 우디?”

 

안타깝게도 호크우드가 엉엉 우는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금방 탄로 날 거짓말을 내뱉는 것뿐이었다.

 

“울지 마 토리. 괜찮아질 거야. 분명 괜찮아질 거니까.”

 

그녀 또한 거짓말이라는 걸 알 테지. 호크우드는 구슬프게 미소 짓는 그녀의 얼굴을 더듬었다. 지금 자신의 피부를 덥히는 그녀의 체온, 그녀의 음성을 영원히 잃어버릴 것만 같아서 그는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비비며 그녀의 체온을 탐했다.

 

“너를 잃고 싶지 않아.”

 

호크우드와 이마를 맞댄 아르토리아가 울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호크우드는 두 손을 들어 엄지로 그녀의 뺨 위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쳐내며 말했다.

 

“여길 떠나자.”

 

“… 떠나? 어디로?”

 

“북쪽 땅 끝자락에 아무도 찾지 않는 오두막이 있어. 거기서 함께 살자.”

 

“함께? 정말?”

 

푸른 하늘을 상상하기라도 하는 것인지 그녀는 기분 좋게 웃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그의 품에 쓰러졌다.

 

“그래, 정말.”

 

정말로 불가능하리라. 하지만 이미 그들에게 주어질 결말을 아는 냉정한 이성을 마음 속 깊은 곳으로 밀어 넣으며 호크우드는 그녀의 등에 그녀의 방패를 단단히 묶었다. 그런 뒤 그녀를 등에 업고 밧줄로 그녀의 자그마한 몸을 자신의 몸에 꽉 묶었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대검을 뒤로 돌려 그녀의 엉덩이를 받히고 막사를 나섰다. 여느 때처럼 바쁘게 움직이는 전사들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들 중 몇몇의 의심스러운 눈길이 호크우드의 등에 업힌 아르토리아를 향했다. 하지만 호크우드의 얼굴을 본 순간 그들은 의심을 접고 다시 제 본분으로 돌아갔다. 이대로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단장.”

 

부관이 둘의 앞을 가로막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의 길을 가로막은 계승자가 의뭉스런 눈빛으로 아르토리아와 호크우드를 번갈아보며 그에게 물었다.

 

“노야가 기다리는 곳은 반대방향일 텐데?”

 

그렇게 물어보면서도 그의 손은 등에 난 검 손잡이를 쥐고 있었다.

 

“그냥, 우리를 보내줄 수는 없나?”

 

“늑대의 피를 계승한 자는 불사대의 소유. 당신이 세운 규율이잖아.”

 

10년이 넘도록 등을 맞대고 함께 싸워온 동료의 사무적인 대답에 호크우드는 자신이 여태껏 행해온 일에 작은 회의감이 드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피를 추출한 뒤에는 맘대로 해도 상관없어.”

 

“이대로 피를 추출하면 그녀가 죽는다는 걸 너도 알잖아.”

 

호크우드를 쳐다보는 계승자의 눈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아이를 벨 때 자신의 눈빛도 저랬던가? 한 순간 그는 자기모멸감에 사로잡혔다.

 

“아르토리아가 네 멍청한 면상을 구해주지 않았으면 넌 이 자리에 존재하지도 않았을 거다.”

 

“숭고한 대의를 위해서라면.”

 

계승자는 칼을 뽑아 불사대의 의례를 취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잠시 후 그는 가족처럼 여겼던 동지의 검을 받아내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도 10년이 넘도록 함께 한 동료인데. 그는 정말로 자그마한 호의조차 내줄 수 없었던 것일까. 잠깐의 공방 뒤 그의 허리를 베고 지나가며 호크우드는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그의 등 뒤에서 털썩 무릎을 꿇은 계승자가 왈칵 피를 토하며 말했다.

 

“어리석어, 어리석어…. 그깟 여자하나 때문에 스스로를 져버리겠다는 건가.”

 

“나는. 나는 그저-.”

 

호크우드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혼란에 빠졌다. 그가 막 베어 넘긴 것은 계승자뿐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의 삶의 근간이자 그를 움직이던 신념 또한 두 동강난 것이었다. 그의 이성은 지진 난 것처럼 중심을 잃고 흔들렸고 시야가 어지러워졌다. 문득 고개를 털며 시선을 들자 그는 그를 둘러싼 수백 개의 칼날을 볼 수 있었다. 한때 그의 곁을 지켜주었던 불사대의 예리한 창끝이 이제는 그를 겨누고 있었다.

 

 

*

 

 

피부를 적시는 따스함에 호크우드는 정신이 들었다. 피가 말라붙어 부르트고 찢어진 입술을 벌려 막혀있던 숨을 토하면서 그는 조용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한쪽 눈두덩이 완전히 피에 절어 제대로 떠지지가 않았다. 누군가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을 몇 번 끔벅이자 곧 흐릿하게 번졌던 사물의 윤곽이 선명해졌고, 그는 걱정으로 가득한 아르토리아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있었다.

 

“… 디. 우디!”

 

또한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것처럼 멀어졌던 소리가 되돌아왔다. 그는 그녀의 뺨을 만지려고 왼팔을 들었다가 잘려나간 팔뚝의 단면이 시야에 들어와 잠시 동작을 멈췄다. 그녀는 슬픈 눈빛으로 그를 쓸어보며 걱정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움직이지 마. 출혈이 심해.”

 

“이제, 앞이 보이는 거야?”

 

“응, 주술이 풀렸나봐.”

 

아르토리아는 평소 그녀가 아끼던 펜던트를 손에 쥐고 있었는데 물끄러미 펜던트를 보고 있던 호크우드는 그녀의 손안에서 기습적으로 터져 나온 빛에 눈을 질끈 감고 잘려나간 팔뚝으로 얼굴을 가렸다. 곧 안락함이 그의 전신을 휘감았다. 마치 뜨겁게 데운 물속에 지친 몸을 뉘일 때처럼 편안한 감각이 그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그는 이 빛이 정신이 들기 직전 그가 느낀 따스함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빛에 닿은 팔의 절단면이 점점 재생되고 있었다.

 

“네가 성령을 다루는 건 처음 보는데.”

 

“우리 집안에 전해지는 백의 마술이야.”

 

“마술을 쓸 수 있으면서 검을 든 너도 정말 미련하군.”

 

그 말에 아르토리아는 유독 기다란, 하얀 앞니를 드러내어 작게 웃었다.

 

“그냥, 궁금했거든. 내 어머니는 먼 외증조모를 구한 고명한 기사의 이름을 따 내 이름을 아르토리아라고 지었는데, 나는 나를 있게 한 늑대의 기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고 싶었거든. 하지만 막상 그 고생을 해서 피를 잇고 보니 별 거 없었지만. 죄다 너 같은 바보들뿐이고.”

 

억울하다는 듯한 그녀의 말에 호크우드는 낮게 그렁대며 웃었다.

 

“엄밀히 말하면, 네가 받은 피는 내 것이니까.”

 

“그래서, 나도. 바보가 된 걸지도.”

 

빛을 만들어내는 아르토리아의 창백한 얼굴 위로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빛이 강해질수록 그녀의 안색이 나빠지는 것을 본 호크우드는 그만두라고 말하려다가 결연한 그녀의 눈동자를 보고 도로 입을 다물었다. 이윽고 그의 팔이 완치되자 그녀는 손에 쥔 펜던트를 놓치고 풀썩 그의 품속으로 쓰러졌다. 그러자 그녀의 등에 자라난 울긋불긋한 고름이 눈에 호크우드의 들어왔다. 두려웠던 가정이 현실이 되어 그의 앞에 나타난 순간, 호크우드는 머리가 하얗게 비어버렸다. 그런 그의 가슴에 뺨을 묻고 있던 아르토리아가 말했다.

 

“결국 너도 심장이 있었네. 두근두근. 너랑 달리 꽤 말이 많아.”

 

일종의 잠꼬대 같은, 천진난만한 그 목소리에 호크우드는 힘없이 웃었다.

 

“… 그래.”

 

“우리가 가려던 오두막. 거긴 어떤 곳이야?”

 

그녀의 물음에 그는 눈을 좁혀 중부의 잿빛 하늘을 올려다보며 잠시 뜸을 들였다.

 

“거긴 산 중턱이라 동부처럼 하늘이 맑아.”

 

“또?”

 

“커다란 늑대가 살고 있어서 망자들은 얼씬도 못해.”

 

“늑대? 정말? 늑대를 봤어? 늑대는 어떻게 생겼어?”

 

“늑대는, 그냥…. 늑대야.”

 

“그게 뭐야.”

 

“… 미안.”

 

호크우드는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그녀의 등가죽 위에 붙어 꿈틀대는 종기를 쳐다보았다. 어딘가에 희망이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 이 순간, 기적처럼 누군가가 심연을 떨어뜨릴 방법을 찾았을지도 모른다. 단 몇 초 동안 그녀가 없는 세상을 상상한 것만으로도 그는 공포에 빠졌다. 온갖 사선을 넘나들면서 단련된 심장이 터질 것처럼 답답해졌고 숨통이 옥죄어왔다. 그는 미칠 것 같았다. 지금 느껴지는 그녀의 숨결이, 체온이, 체취를 다시는 느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니 부모가 살해당하던 광경을 숨어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어릴 때로 되돌아 간 것처럼 무기력해졌다. 혹여나 그녀에게 눈물을 보일까봐 두려워, 그는 그녀의 머리와 몸을 더욱 강하게 감싸 안았다.

 

“크흐윽….”

 

하지만 부서질 정도로 악문 잇새로 새어나오는 울음까지는 막지 못했다. 세상에는 아직, 그녀의 빛나는 미소가 필요했다. 그녀를 구하기 위해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죽여야 한다면 망설임 없이 행하리라. 자신의 심장이 필요하다면 산 채로 뜯어내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호크우드는 그녀의 등에 단검을 박아 넣었다. 칼날이 그녀의 살점을 파고 들어가 다크링(dark ring)을 관통한 순간, 정작 자신이 가슴을 찔린 듯 호크우드는 눈을 부릅떴다. 그는 칼날에 그의 소울을 흘려보냈다. 그러자 불사의 상징인 다크링이 파괴된 그녀는 서서히 신체 말단부터 재가 되어 부스러져 내리기 시작했다.

 

“… 울지 마 우디.”

 

작은 울림만을 그의 귓전에 남겨둔 채, 그녀는 그렇게 완전히 재가 되어버렸다. 호크우드는 그녀의 재를 끌어안고서 목전까지 올라온 울음을 참으며 끅끅댔다. 눈물과 콧물이 계속해서 그의 얼굴 아래로 흘러내렸다. 이내 그는 참지 못하고 그녀의 재가 묻은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고 슬픔과 울분을 내질렀다.

 

“ㅁㅁㅁㅁㅁ-!!”

 

불현듯 피에 절은 수많은 군상이 엉망이 된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숭고한 대의라는 미명하에 그가 살해해온 무고한 생명들이. 그녀가 그의 인생에서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는지 깨닫는 지금, 사랑하는 이를 잃은데서 비롯된 한없는 허무함을 느끼는 지금에서야 그는 그가 행한 일이 얼마나 그릇되었는지를 깨달았다. 실상, 그가 지켜낸 건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산마루에서 내려다보는 전경처럼 대의라는 안개너머에 가려져있던 진실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그가 숭고함이라고 추구했던 것이 그가 평소 비웃던 깊은 곳의 사제들처럼 눈먼 신앙에 불과했다는 것과 정화라는 행위가 약자를 핍박하는 것뿐이었다는 끔찍한 사실이 그의 심장을 짓눌렀다. 바위처럼 육중하게 전신을 내리누르는 죄악감에 그는 결국 견디지 못하고 꺾여버렸다.

 

이윽고 그는 생기를 잃은 인형처럼 일어나 수북이 쌓인 잿더미 위에 외롭게 떨어져 있던 아르토리아의 펜던트를 집어 목에 걸었다. 그리고 그녀의 방패와 그 자신의 부러진 검을 주워들었다. 탈주자에게 면죄는 없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그는 묵묵히 늪지를 나아갔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조금이라도 바로잡기 위해서.

 

 

*

 

 

에필로그

 

태초에 불을 계승했던 네 명의 선각자들 중에 인간은 없었다. 불사의 저주에 걸려 검은 고리가 생긴 종족도 오직 인간뿐이다. 심연에 맞섰던 인간의 군세는 결국 패배해 서로를 증오하며 죽고 죽이길 반복하게 되어버렸다. 인간이라는 종의 근본이 나약하기 때문이다. 신, 거인, 마녀, 난쟁이, 인간. 결국 심연을 이기지 못했다. 이제 남은 건 하나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남자는 손안에 쥔 돌을 자신의 가슴팍에 박아 넣었다.

 

콰득.

 

돌이 뼈를 뚫고 들어가 심장의 자리를 대신한 순간, 남자는 털썩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땅을 짚었다. 검은색 피가 바닥 위로 후두둑 떨어졌다. 남자의 몸이 제 형태를 잃고 부풀기 시작했다. 팽창하는 살점에 밀려 그의 몸을 감싼 갑옷이 허물처럼 떨어져 내렸다.

 

머리 양옆으로는 강철보다 단단한 뿔이 자라났다. 검은 피막이 견갑골을 뚫고 펼쳐졌다. 길어진 주둥이 안으로는 기존의 나약한 치아를 밀어내며 뾰족한 송곳니가 촘촘히 자라났고, 두 다리는 늑대의 그것처럼 뒤로 휘었다. 굵은 꼬리가 자라나 땅을 때렸다. 마지막으로 미끌거리는 하얀 가죽 위로 딱딱한 바위비늘이 자라났다. 그렇게 공터 위에 나타난 한 마리의 검은 용은 잿빛하늘을 향해 포효했다. 그런 뒤, 바닥에 떨어진 펜던트를 물고 날개를 펼쳐 하늘로 날아올랐다.

 

용의 눈동자에는 언뜻 붉은 기운이 감도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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