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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 Spider to Begin(2)




  비가 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시에 시이의 미묘한 표정을 보는 것은 드문 경험이다. 평소대로라면 입과 눈이 알기 쉽게 일그러지고, 얼굴에는 홍조를 띠며, 환희와 열의를 담은 목소리로 '지금 내리는 비는 374년 전의 예언가 바리타가 언급했던 천지개벽의 전조'임을 주장했을 것이다.
  시에 시이의 말을 빌리자면 멸망론을 믿는 사람은 세 분류로 나누어진다고 한다. 첫째, 멸망을 기대하며 신기원의 도래를 갈망하는 자. 둘째, 멸망을 두려워하여 피할 수 없는 화에 굴복하여 절망에 빠진 자. 셋째, 새 시대를 고대하지도 않고 끝의 시작에도 겁내지 않는 자.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그럼 너는 첫 번째 분류에 들어가는 사람이구나?" 그렇게 가볍게 말했지만, "아니, 나는 세 번째야." 그런 대답이 돌아왔었다. 그때는 그저 농담이라고만 생각했었지만, 눈앞에서 뭐라 형용하기 힘든 표정을 짓는 그를 보니 그는 정말로 세 번째로 분류되는 멸망론자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쉽게 생각하면 500년 전의 알스케아 전쟁에서 패한 모블랑 왕녀의 저주인 게 틀림없지. 겨우 1년의 오차 정도로는 부정할 근거가 빈약해. 왕실의 검증된 예언가 펭케도 '어마하게 큰 사건일수록 오차범위가 더럽게 커진단 말이야'라고 못 박아두었던 발언도 있잖아?"


  아니다. 아직 섣불리 판단할 게 아니다. 잠시 생각을 멈추고 그의 말에 귀 기울여보기로 했다.


  "하지만 비라고? 비와 우박은 같은 물이기는 하지만 엄연히 구분되는 자연현상이야. 고대문명에서도 문자표기가 중복되는 일은 없었어. 그렇다면 모블랑 왕녀의 차가운 얼음 덩어리가 일세계를 뒤덮을 것이라는 저주는 비가 아니라 우박이겠지. 이 저주는 선택지에서 제외하자. 그럼……."


  미묘하게 일그러져 있던 시에의 표정이 갑자기 밝아졌다. 마음속에 응어리진 고민이 모두 풀려 심신의 자유를 얻은 듯한, 만족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지금 내리는 비는 374년 전의 예언가 바리타가 언급했던 천지개벽의 전조구나!"


  "넌 첫 번째다!"


  아무렇지도 않게 기뻐하지 말라고. 멸망이라고. 멸망할 리는 없겠지만.
  시에는 그제야 내 존재를 깨달았는지 나와 눈을 마주쳤다.

  "모나! 지금 내리는 비는 374년 전의 예언가 바리타가 언급했던 천지개벽의 전조야!"


  "그거 두 번 반복할 필요가 있는 거야?"


  "쉽게 생각하면 500년 전의……."


  아까 전의 중얼거림을 내가 듣지 못했다고 생각했는지, 시에는 자신의 사고 흐름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이 녀석은 너무 성가시다. 건수라도 하나 잡히면 붙잡혀 여러 가지 쓸모없는 정보들을 접하게 된다. 어째서 멸망론자도 아닌 내가 바리타의 예언을 멸망론자인 시에보다 일찍 생각해내야 하는가. 아니, 지식 자체는 시에가 더 많으니, 이 녀석은 예언 자체는 이미 떠올린 후에 많은 선택지 중에 고민한 것일 테지만.
  어쨌거나 이 녀석에게 피곤함을 느끼지 않으려면, 일 년 내내 온화한 기후의 땅에서 만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아니, 너무 극단적인가. 일반적으론 날씨가 좋지 않은 날에는 마주치지 않도록 하면 그렇게까지 힘들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한 건물이다. 같은 '세계'에 거주하는 사람이다. 날씨가 나쁠 때마다 방 안에 처박혀 있을 수는 없다.
  인간은 적응의 생물이라고 했던가. 적당히 맞장구를 치면서 속으로 이런저런 푸념을 늘어놓을 정도로, 그의 멸망론 피력에도 익숙해졌다. 이 지루한 이야기가 언제 끝날지 가늠하는 사이, 이곳, 낡은 테이블과 의자가 있는 초라한 식사실에 다른 사람의 그림자를 눈치챘다. 방금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내가 이곳에 도착하기 전부터 있었다. 그저 방금 깨달았을 뿐이다. 아마 내가 나타나기까지 시에의 이야기에 묶여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것은 익숙한 얼굴이 아니었다. '세계'에 거주하는 엔딩도, 모나 모나모도, 시에 시이도, 베스 베르벳도, 밀로 로밀로도, 노네 늬오네왼느노네도, 메리 메리스도, 스리메 메리스도 아니었다. 처음 보는 풍채, 처음 보는 얼굴, 처음 목격한 그림자다.
  나의 맞장구가 멈추자 이상함을 깨달은 시에는, 나의 시선을 쫓아 알지 못하는 인물을 발견해냈다. 나는 시에의 입으로부터 나올 새로운 인물에 대한 소개를 기다렸다. 하지만, 시에는 너무나도 예상 밖의 말을, 당당한 어투로 내뱉었다.


  "누구?"


  네가 모르면 안 되지!
  더는 이름 모를 남자에게 무안을 주고 싶지 않아서,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생각해보면 그렇게까지 예상 밖의 말은 아니다. 분명 빗소리에 정신이 팔려서 누군지 확인도 하지 않고 자신의 지론을 펼쳐 보였을 것이다. 시에는 그런 녀석이다.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이 자신의 말을 하는 사람. 날씨가 나쁜 날의 시에에게 있어 대화상대는 자신의 사고를 정리하고 확신하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시에를 바라보며, 나는 입을 열었다. 나는 이 사람의 정체를 안다.


  "새 입사자야."


  시에는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나는 품속에 넣어둔 쪽지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곳에서 살다 보면 한 번쯤은 마주치는 스리메의 '공지'. 오늘 아침에 내 방문 사이에 끼워져 있던 것이었다. 그 내용은 새 입사자의 안내와 소개하기였다.




  그러므로 자기소개.


  "모나 모나모야. 4층 끝방에서 살고 있어. 별 특징 없는 음침한 놈이지만, 잘 부탁해."


  그러므로 멸망론자 소개.


  "이 녀석은 시에 시이. 2층 첫째 방에 살고 있어. 보다시피 듣다시피 경험했다시피 멸망론에 목을 매는 녀석이야. 나보다 배는 음침한 놈이지만, 잘 지내봐."


  그러므로 유령 소개.

  아, 화나서 어디론가 가 버렸지.


  "그럼 새로운 입사자의 자기소개, 부탁해도 될까?"


  앳되어 보이는 소년은 쭈뼛거리면서 말을 꺼냈다.


  "비, 빈센트라고 합니다. 스리메 씨에게 불려서 오게 되었어요."


  거의 형식적인 이름 교환일 뿐이었지만,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과는 크게 부딪힐 일은 없을 테니까. 대부분 자기 세계에 빠져 사는 사람들이다. 빠져서 못 나오는 사람들이다. 나올 생각도 없는 사람과, 나오고 싶어도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이렇게 자기소개가 끝나자, 다시 멸망론 쪽으로 화제를 돌리려는 시에로부터 나는 '공지'를 핑계로 빠져나왔다. 시에는 다소 아쉬워하는 표정이었지만, 아무래도 스리메의 '공지'인 만큼, 한 발 물러섰다.
  일단 1층을 안내했다. 세면시설과 식사실, 부엌으로 이루어진 간단한 구조다. 간단하다는 말 대신 초라하다는 말을 덧붙이고 싶었다. 이 '세계'의 주인은 아니지만, 괜히 부끄러워질 정도로 낡은 건물이다. 이왕 안내하는 김에 세수까지 마친 후, 2층으로 향하는 계단에 발을 내디뎠다. '공지'에 따르면 빈센트의 방은 2층의 다섯 번째 방이다.


  "그나저나 짐 같은 건 안 가지고 온 거야?"


  "네. 있긴 있었는데, 대부분 다시 못 쓸 정도여서……."


  "그럼 스리메에게 부탁해서 가구나 책 등 원하는 걸 마련해. 가구는 될 수 있으면 화려한 게 좋아. 이곳은 분위기든 색채든 온통 잿빛이라서 우울증을 불러일으키거든."


  "잿빛……이요?"


  "그래, 잿빛. 아, 스리메에게 부탁할 건, 서면으로 방문 앞에 두면 될 거야. 곧 알게 될 테지만, 스리메는 마른 사막의 물고기만큼이나 보기 힘들거든."


  본인은 화를 낼 만한 비유지만, 이를테면 희귀동물 보호종 정도의 출현도다. 연극을 비유로 한다면, 극 전체에서 한 번 나오는 조연 배우보다도 찾기 힘들 정도의 출연도다. 숨겨져 있다. 비밀의 존재다.


  "네…… 그럴게요."


  2층 다섯 번째 방에 도착했다. 열쇠는 메리 메리스에게 받으면 된다는 것을 일러주고 나서, 새로 떠오르는 사실이 있었다.


  "그래, 일단 안내라고 하면, 이곳의 규칙부터겠지."


  규칙이라는 단어가 주는 딱딱한 어감이 빈센트의 얼굴을 굳게 만든 것일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세계'에 들어온 후부터 빈센트는 쭉 이렇게 경직되어 있었다. 그야 처음 만난 사람이 스리메이고, 다음 만난 게 시에 시이고, 그다음이 나라면, 걱정될 만도 하겠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세계'의 누구를 어떤 순서로 만나도 같은 기분을 느낄 것이다. 그만큼 이상한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이니까.


  "규칙이 따로 있나요?"


  "미칼렉시부속종합대학 제3구역 비인가 기숙사. 일단 명목상으론 기숙사니까. 수업에 가지 않더라도."


  "……."


  "그래서 규칙이야. 그렇다고 막 복잡한 건 아니고, 두 가지만 외워두면 돼. 첫째, 자유로울 것. 둘째, 자유롭지 않을 것."


  모순이다. 모순이기에 덧붙여야 한다.


  "일단, 가감 없이 그렇다는 거고. 주어나 목적어가 통째로 생략되어서 알아먹기는 힘들지만, 기본적으로는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고 해석하고 있어."


  그렇다고 해도 저런 규칙은 분쟁을 일으킨다. 첫째 규칙을 들어서 자유를 추구하고, 둘째 규칙을 들어서 타인을 제한하고. 그럼에도 이 기숙사가 평화로운 것은, 독단적인 사람들만이 모여있음에도 일상이 이어지는 것은, 사생 회장 스리메 메리스가 절대적인 위치에서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걸 규칙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다시 한 번 쪽지를 꺼내, 빈센트에게 보여주었다.


  "통칭 '공지'. 스리메로부터의 전언이야. 스리메의 말로는 자신이 보낸 게 아니라, '세계'가 보낸 것이라고 하지만."


  괴짜만이 모여있는 이 '세계'에서도 가장 특이하고 괴상하고 이상한 괴짜. 사생 회장. '세계'의 주인. 스리메 메리스.


  "이 공지는 될 수 있으면 따를 것. 물론 첫째 규칙을 들어서 따르지 않더라도 불이익은 없지만, 일단은 모두 따르고 있어."


  스리메 메리스가 특이하고 괴상하고 이상하더라도, 절대적인 위치에서 통제하고 있더라도 반감을 사지 않는 이유.


  "옳으니까."


  옳지 않더라도 내게 해가 될 일은 시키지 않는다. 그게 사실이 아니더라도, 이곳으로 초대받은 이들은 그렇게 믿고 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알아?"


  "왜죠?"


  "나도 몰라."


  빈센트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표정을 풀었다. 경직된 얼굴이 풀어질 정도로 맥빠진 대답이었나?
  하지만 정말로 스리메가 옳다고 믿는 이유는 모른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짐작 가는 곳은 있다. 절대적인 신뢰는 신앙과도 같다. 그리고 신앙이라는 단어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대체하기도 한다. 우리는 그녀에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녀에게 연심을 품는다. 그렇다면 그녀에 대한 믿음은 그녀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사랑은 물리적인 거리를 가깝게도 멀게도 하지만, 무엇보다 심리적인 눈을 멀게 만들어버린다. 흐릿해진 눈으로 사리판단을 할 수 없게 된다.
  사실 모두 내 편협한 생각일지 모른다. 나 혼자만이 그녀를 사랑하고, 다른 이들은 그들 나름의 이유로 행동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타인의 행동을 첫째 규칙을 들어 멋대로 해석한 것일 뿐이다. 편견이고, 일반화다.


  "어쨌거나, 이곳에선 괜히 눈치 볼 필요 없어. 기본적으론 모두 개인주의인 사람들이니까. 상대하긴 힘들더라도, 자유롭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다면 잘 생활할 수 있을 거야."


  "자유롭지 않고 자유롭게……."


  빈센트는 말도 안 되는 말을 그렇게 곱씹으며, 생각에 잠겼다.
  자, 그럼 이제 빈센트의 옆방에 사는 사람을 소개해줄 차례다. 아마 깊게 생각할 겨를도 없을 것이다. 심장이 쿵 내려앉을 정도의 장면을 목격할 테니까. 2층 넷째 방.


  "베스 베르벳이야."


  이중으로 위험한 여자.

 

 

 

 

 

 

 

 

/I-2 사족/
대화에 너무 의존하는 것 같습니다. 어서 궤도가 본격적으로 올라야 하는데 아직도 인물 소개나 하고 있습니다. 으아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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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님 2014.01.27 15:50
    음... 대화와 서술의 전체적인 밸런스가 필요하고.. 그 비율은 쓰는 사람 취향에 따라 쓰는 사람을 괴롭게 만들지만...
    전 개인적으로 대사로 이루어지며 정황을 진행하게 하는걸 좋아하는 편이기에..
    (그러면서 안될거 같아서 어떻게든 어색함을 피하기 위해 서술을 집어넣으려고 하는)

    조금씩 전개가 되어가는 것이 좋네요

    노네 늬오네왼느노네 는 정말 좋네요 작명 취향이 정말 제 취향입니다 ㅋㅋㅋㅋ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명은 이영도의 눈마새나, 니시오 이신의 헛소리꾼 시리즈나... 그런 작명을 좋아하는데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인상 있는 이름을 톡톡 던지시는게 정말 좋습니다
  • ?
    부와명예 2014.01.31 12:55
    이야... 노네 늬오네왼느노네...

    작명 센스에 감탄하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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